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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02)화 (10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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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황께서 그리 어마마마를 박대하지 않으셨다면 다르셨을까요.”

황제는 요즘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잠들어 있다는 태후의 곁에 앉아, 잠든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냐. 설마 또 그 계집의 처소에 가 계신 것이냐?’

태후궁을 찾은 아들의 모습에 반가워하던 것도 잠시, 태후는 다시 잠에 빠져들기 전까지 아들의 손을 붙잡고 계속 그러한 것들을 물었다.

‘폐하께서 분명 오늘은 나를 보러 오신다고 하였는데 어찌 오시질 않는 것이냐. 그 요망한 것이 또 폐하를 꼬여내었느냐. 이 모든 게 다 그것 때문이다. 그것이 천박하게 폐하를 꼬여내지 않았다면 어찌 폐하께서 이토록 내게 잔인하실 수가 있단 말이냐.’

이한으로서는 이제 특별한 것도 없는 말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부터 과거에 갇혀 같은 날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만 이한은 때때로 서글펐다. 어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아들은 이제 장성하여 황제가 되었고, 나라는 날이 갈수록 부강해지고 있으며, 어머니께서 그토록 증오하던 여인은 역적의 무리가 되어 선황의 곁에서 이름조차 지워졌건만. 이제는 태후로서 모두의 부러움을 받으며 세상을 느긋하게 내려보아도 되는 자리에 선 어머니는 여전히 자신이 가장 불행했던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황제를 미워하지 않았다. 정작 저를 내버려 두고 후궁의 손에 온갖 애정과 권력을 쥐여 준 건 자신의 부군이건만 어머니는 오로지 여인 하나가 만악의 근원인 것처럼 모든 증오를 그에게 쏟아부었다. 마치 그 여인이 아니었다면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는 이한 역시 제 어머니를 괴롭히는 건 세상천지에 오로지 한 명뿐인 것처럼 그를 미워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차차 자라나 세상을 자신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이한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려 애썼던 후궁보다, 그 후궁이 황후를 업신여기도록 도운 저의 아버지를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한이 황제가 된 후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자리에 올라, 이런 무게를 지고 나라를 이끌어가는 이가 어찌 내명부의 꼴이 그리 돌아가도록 만들고 나아가 그들이 대역한 마음을 품도록 방조하였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것이 모두 사랑이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며 끝끝내 이렇게까지 망가지게 된 것도,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토록 무시하여 일국의 황후이자 자신의 정실을 일평생 지옥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었던 것도.

전부. 전부 사랑이 이유라고 하였다.

“차라리 사랑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든 게 다 좋질 않았겠습니까.”

아들의 목소리가 늙은 어머니의 주름진 손 위로 떨어졌다. 위엄 있는 태후의 모습으로 가장 높은 곳에서 내명부를 내려다보아야 하였을 여인은 제 나이보다 너무 많이 늙고 지쳐 보였다.

거기에 앉아 이한은 다시 저의 지난 며칠을 되돌아보았다.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하루 종일 발을 동동 구르며 어서 빨리 밤이 되어 시간이 나기를 기다리던 자신을. 그리하여 틈이 생기면 한달음에 정안궁으로 달려가 후궁 하나의 곁에 붙어 앉아서 그의 몸 상태 하나에 전전긍긍하던 자신의 모습을. 온종일 그 후궁에 관한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한 채 그의 말 한 마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시도 때도 없이 웃던, 그런 자신을 떠올렸다.

문득 저의 아버지도 그러하였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제 아버지 역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인 생각에 하루가 여삼추였을까. 그 여인이 저를 향해 한 번 웃어 준 얼굴에 종일 가슴이 뛰어 어쩔 줄을 몰랐을까. 그러했을까.

“…….”

황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태후궁에 문후를 들러 오기 전까지만 하여도 언제 또 정안궁에 얼굴을 비출까 내내 생각하였던 황제였으나 이 순간 바라본 어머니의 모습이 화살처럼 아프게 심장에 박혀와서. 황제는 애써 떠오르는 얼굴을 지워내며 태후궁을 나섰다.


“몸은 괜찮은가.”

“예, 숙비마마. 염려해 주신 덕분에 이제는 거의 다 좋아졌습니다.”

숙비는 저의 앞에서 흔들림 없이 겸손한 태도로 앉아있는 연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통으로 인해 고생했던 지난날들을 선명하게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수척한 모습이었으나 그 얼굴이 보기 싫지가 않고 오히려 더없이 연약하여 사람 마음에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니 그 또한 이전의 연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금의 연빈은 숙비에게 딱히 악감정이 없고, 숙비 역시 연빈을 보는 마음이 달라지긴 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단번에 서로를 친밀하게 느끼는 것은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아 숙비가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사이 연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날 숙비마마께서도 많이 놀라셨을 텐데 괜찮으신지요.”

연빈의 그 물음에 숙비가 잠시 시선을 들어 연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량한 눈망울로 저를 바라보는 연빈의 눈동자에서는 비꼬거나 하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숙비가 말했다.

“나야말로 자네 덕분에 무사하였지.”

연빈은 마치 과분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숙비의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이제는 말을 해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마음 졸이며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이제는 해야만 했다.

“연빈….”

“예, 마마.”

“내가 실수했네.”

이윽고 흘러나온 숙비의 말에 연빈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연빈이 서둘러 대답하려 했으나 손을 들어 연빈의 말을 가로막은 숙비가 이어 말했다.

“나는 자네가 정말로 변했다고 쉽게 믿을 수가 없었네. 자네와 나는 이 궁의 누구보다도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섣불리 믿었다가는 뒤통수를 맞을 거라 생각했지.”

“당연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숙비마마.”

“그래. 나름대로는 명분이 있는 이유이긴 하였어. 하지만 그 때문에 애꿎은 자네가 크게 다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처음 연번이 자신을 불렀을 때 움직여 몸을 피했다면 그런 일을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 누구도 피를 보지 않고 모두가 무사히 그 밤을 넘겼을 것이다. 그새 마른침을 한 번 삼킨 숙비의 말이 이어졌다.

“…내 잘못이네. 그 탓에 자네는 크게 다치고 몸에 흉터까지 얻게 되었으니 내가… 내가 무슨 말로 사과를 해야 좋을지….”

“마마….”

“나는 황제 폐하를 모시는 후궁이고, 우리 가문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자식이기도 하지만 또한 은원을 분명히 알아야만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

숙비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단호했다. 연빈은 몇 번이나 그리 자책하지 마시라 숙비의 말을 막고 싶었으나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숙비의 눈빛 앞에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오늘 자네 앞에서 약조하지. 나는 앞으로 지난날 우리 사이에 있던 모든 앙금을 잊을걸세. 이것은 자네가 나를 용서하든, 하지 않든 그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마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이미 그날의 일을 모두 잊어 마음에 담아둔 것이 없습니다.”

“은혜를 베푼 자는 잊어도 받은 자는 잊어서는 안 되는 법. 지금 당장엔 내가 자네를 위해 해 줄 일이 마땅치 않으나 내 반드시 그날의 일을 잊지 않고 꼭 보답을 할 것이네.”

이제 숙비에게는 연빈이 정말로 변한 건지 아닌지 같은 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은 의미가 없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날 매의 공격을 숙비가 정면으로 받아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면 상황은 정말로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심하다면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고 운이 좋아 생명을 건지더라도 고통스러운 여생을 보내야 했을 수도 있었다. 숙비는 이제 연빈이 변한 것을 믿었지만, 설령 그게 아니라도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제가 받은 것을 보답할 때까지 숙비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숙비가 그제야 아주 미세하게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자네도 이제 나를 어려워 말고 편하게 생각하시게.”

그러니 이제 와 변한 자신을 인정해 준 숙비의 말을 화운으로서도 거부할 필요가 없었다. 화운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마찬가지로 은은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숙비마마.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씩, 하나씩. 사람과 사람 사이에 드리워진 그늘이 또한 거두어졌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날들이 보상받는 나날들이었다.


“마마. 조금 좋아지셨다고 무리해서 움직이시면 안 돼요.”

“그래그래. 알았어. 오 분만. 오 분만 걷고 들어가자.”

화운은 저의 곁에 바짝 붙여서 연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쏟아내는 아진을 달래듯 대답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이 정도로 걱정할 때는 넘겼다고 생각하는데 아진의 기준에는 전혀 아닌 모양이다. 아진의 마음은 물론 고마운 것이었지만 황후궁과 운화궁에 다녀온 뒤로 또 며칠간 정안궁에서만 보내려니 답답한 것도 사실이었다.

화운은 천천히 걸으며 저의 침실에 잠들어 있는 목검을 생각했다. 처음 내무부에서 목검을 보내 주었을 때까지만 해도 당장 검을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들떴는데 뜻하지 않은 일로 또 이렇게 요양하는 신세가 되니 괜히 마음이 서글퍼졌다. 허나 지금 화운이 이리 마음이 답답하고 서글픈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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