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01)화 (10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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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란이 생각할 때 황제는 아마 이 약을 전해 주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의도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황제이고, 연빈이 후궁인 이상 황제가 이 연고를 내리면 흉터가 보기 싫으니 어서 빨리 지워버리라는 의도로 느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란이 아는 황제는 사람의 마음을 신경 쓰시는 분이시니 마음이 있더라도 쉬이 직접 약을 내리기는 힘들 테다. 허니 마찬가지로 화운이 낫는 것을 바라고 있는 황후가 먼저 나선 것이다.

이 일로 연빈은 물론이요, 황제까지도 제게 고마움을 느낄 테니 어느 모로 보아도 황후에게는 나쁠 게 없는 일이었다.

“허면 더 쉬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가 볼 테니 괜히 또 인사를 올리지 말고 편하게 있거라.”

황후는 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상처가 상처인 만큼 몸을 꼿꼿하게 펴고 앉아 있는 것도 힘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황후가 움직임을 멈추고 연빈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들었을지 모르겠으나 여름이 되어 날이 더워지면 이궁인 명하원으로 거처를 옮길 것이다.”

“예, 마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네 상처가 다 아물고 나면 아마도 그 시기가 될 것 같으니 아이들에게 미리 일러 준비하도록 해라.”

그 말을 들은 연빈은 그저 고개를 숙여 대답을 할 뿐이었으나 그간 여름에 이궁으로 옮길 때마다 연빈을 이곳에 남겨두고 싶어 하였던 분위기를 알고 있던 아진은 뒤에서 마주 잡은 저의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조금씩 제 주인이 정말로 황궁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더없이 뿌듯하였던 탓이다.

“그럼 이만 가 보마.”

말을 마친 황후가 다시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황후마마를 배웅합니다.’ 하는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으나 보지 않아도 이제는 그 얼굴을 선하게 그릴 수 있어 굳이 돌아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벌써 잠이 들었느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정말로 잠이 들었다는 말에 온몸의 기운이 죄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연빈마마께서 이미 잠드셨을 수도 있으니 먼저 사람을 보내 보자 하였던 오 태감의 말을 무시하고 서둘러 달려왔는데 이미 늦은 모양이다. 덩달아 침울해진 얼굴로 아진이 대답했다.

“예, 폐하. 오늘은 아니 오시는 줄 알고….”

오늘은 폐하께서 정안궁에 오실 거란 전언이 없었다. 이한의 입장에서는 오늘 일정이 빡빡하여 늦게까지 시간을 내지 못할 것 같아 그러한 것인데 예까지 와서 화운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니 이제 와 괜히 후회가 되었다. 황제의 침묵에 변명하듯 아진이 말을 이었다.

“물론 마마께오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꽤 늦은 시간까지 폐하를 기다리셨습니다. 다만 약을 드신 이후에는 약 기운을 이기기가 어려우신지라….”

“알고 있다. 내가 말도 없이 너무 늦게 오긴 하였지.”

아진의 목소리에서 혹여나 저의 주인을 탓할까 걱정하는 기색을 읽은 이한이 서둘러 말했다. 그래도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서운함은 다 가실 줄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중간에 잠시 들를 것을 싶었다. 행여나 아직 몸이 아픈 화운이 저의 눈치를 보느라 식사를 편하게 하지 못할까 봐 오찬 때도, 석찬 때도 정안궁을 찾지 않았던 이한이었으나 지금은 그 또한 은근히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이한의 발걸음이 한 걸음, 화운의 침실 쪽으로 가까워졌다. 황제로서의 위엄은 전부 다 어디로 가고, 이한은 어느새 고개를 길게 빼고는 문을 닫아 보이지 않는 화운의 침실을 기웃거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발걸음이 쉬이 돌려지지가 않았다. 몇 번이나 그 앞에서 발을 멈칫거리던 이한이 아진을 보며 말했다.

“잠깐… 잠깐 들어가서….”

“……?”

“얼굴만 잠깐 보고 나오면 안 되겠느냐.”

뒤에 서 있던 오 태감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황제 폐하의 입에서 지금 나온 말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황제가 되어 일개 몸종에게 ‘안 되겠느냐’며 허락을 구한 것도 어이가 없거니와 이미 잠들어 말 한 마디 나눌 수도 없는 이를 두고 그 잠든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어 하는 황제의 마음을 짐작하기가 망설여지는 탓이었다.

과거, 후궁을 총애하였던 황제는 수도 없이 많았다. 선대의 황제들이 총애하는 후궁을 어찌 대했는지 생각해 보면 오늘 이한의 행동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장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정안궁만 하더라도 후궁 하나를 위해 황제가 쌓아 올린 애정이질 않았나. 그러니 고작해야 자는 얼굴 한 번 보고 가고자 하는 이한의 마음 같은 건 특별하다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 태감은 그의 황제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분이 황제의 사사로운 감정을 얼마나 경계하는지, 얼마나 마뜩찮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오 태감이었다. 그러니 어찌 오 태감이 지금 이 순간을 놀라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그사이 당황하여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선 아진에게 이한이 다시 말했다.

“아니. 아니다. 괜히 들어갔다가 잠이라도 깨면 큰일이지. 잘 자야 몸도 얼른 회복할 테니.”

누가 말린 것도 아닌데 홀로 체념하는 황제의 목소리에 어린 짙은 염려를 오 태감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가벼운 호감이라고 생각하여서. 늘 저의 황제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연빈이 제대로 달라진다면 그것이 결국 내명부는 물론이고 황제 폐하의 심신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겨서. 황제가 가장 아끼는 충신 집안의 아들을 냉대하는 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연 대인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늘어날 수 있고, 그리 되면 폐하께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니리라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때로는 적극적으로 달라진 연빈을 비호하고 나서기도 하였던 오 태감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정말로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돌아가자.”

이윽고 황제가 아쉬움 가득한 몸짓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인사를 대강 들으며 전각을 나와 뜰에 내려선 이한이 문득 제 앞에 펼쳐진 정안궁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본다.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어린 궁녀들과 내관들이 보였다. 천천히 가마를 향해 걸으며 이한이 오 태감을 향해 물었다.

“정안궁에 수령태감을 두지 않은지 오래되었지.”

“예. 폐하께서 명하신 이후로 연빈마마는 줄곧 수령태감 없이 지내고 계셨습니다.”

“흐음….”

정안궁에 수령태감을 두지 못하도록 명한 건 과거 연빈이 황제가 정안궁을 찾지 않는 책임을 매번 그 태감에게 물어 패악을 부려댔기 때문이었다. 이한이 잠시 고개를 돌려 화운이 잠들어 있을 침전을 바라보았다. 새삼 그사이 연빈이 얼마나 많이 변하였는지 실감이 되어 기분이 묘했다.

다시 움직여 가마에 오른 황제가 입을 열었다.

“들으라.”

“예, 폐하.”

“내무부에 일러 총명하고 믿을 만한 자를 뽑아 정안궁에 보내라 이르도록.”

“…….”

“내무부에서 뽑은 자는 네가 최종적으로 살펴보아서 문제가 없는 이로 잘 가려야 할 것이다. 그자가 정안궁의 새로운 수령태감이 될 것이니.”

하나씩, 하나씩. 오랫동안 정안궁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거둬졌다. 정안궁은 두 번 다시 수령태감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 명을 내리던 날의 황제의 얼굴이 얼마나 차가웠는지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오 태감은 아주 짧게 눈을 깊이 감았다 뜨고는 ‘예, 폐하.’ 하고 대답하며 허리를 굽혔다.

“안정전으로 돌아가자.”

오늘도 정안궁이 아닌 다른 처소로는 가지 않을 황제의 가마가 천천히 어둠 속을 걸었다.


“연빈이 올 때가 되지 않았느냐.”

숙비, 비영은 답지 않게 초조한 목소리로 옆에 선 명주를 향해 물었다.

“예, 마마.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니 곧 오지 않을까요.”

생전 들어 본 적이 없는 주인의 목소리를 낯설다 여기며 명주가 대답했다.

정안궁에서 연락이 왔다. 몸이 많이 나아졌으니 오늘 황후마마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운화궁에도 잠시 걸음을 하겠다는 전언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었으나 막상 연빈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과연 연빈은 자신 앞에서 어떤 표정을 할까. 변한 뒤의 연빈은 자신의 차가운 태도에도 줄곧 부드럽고 담담한 태도로 일관했는데 이리 큰일을 겪고 나서는 과연 어찌 바뀌었을까. 비영으로서는 쉽게 예측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난 며칠간 폐하께서는 정무를 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정안궁에 모든 신경을 다 쏟고 계셨으니 보통의 후궁이라면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을 게 뻔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몸에 흉터까지 남게 될 상처를 입도록 만든 이를 만나게 되면 과연 어떤 반응을 할 것인지, 비영은 쉬이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마마, 연빈마마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다소 긴장한 얼굴로 들어온 궁녀가 비영을 향해 고했다. 비영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몸가짐을 바르게 한 뒤 크게 심호흡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연빈이 제게 어떤 태도를 보이든, 비영은 오늘 그것을 마땅히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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