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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빈은 괜찮습니까?”
숙비가 그렇게 질문을 해왔을 때, 이한은 꼭 같은 말이 아니었음에도 어젯밤이 떠올라 멍한 얼굴을 했다. 어젯밤 정안궁에서 화운이 이한에게 숙비의 안부를 물어 오늘 이리 오찬을 들러 운화궁으로 온 것인데 정작 여기에 오니 숙비는 저에게 연빈의 안부를 묻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연빈을 묻는 것이냐?”
“예, 폐하. 연빈이 아직 다 쾌차하지 못하여 직접 가볼 수가 없는데 걱정이 되어서….”
이한이 저도 모르게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숙비와 연빈은 서로 앙숙이나 다름없는 사이라 어디에서든 마주치기가 무섭게 서로 악담을 쏟아내기로 유명한 사이였는데 이제는 마치 아주 애틋한 사이가 되기라도 한듯 서로를 걱정하고 있다.
연빈이 성격을 죽여 다른 비빈들과 원만한 관계로 지내는 건 황제 역시 늘 바라 마지않았던 일이었건만 막상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고 보니 어째서 마음 한구석이 미묘하게 껄끄러운지 모를 일이다.
“아직 무리해서 움직여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진 것 같더구나. 그리고 어제는 연빈 역시….”
“……?”
이한은 말을 하다말고 뜸을 들였다. 별것 아닌 말 한 마디를 전해 주는 것이 이상하게 망설여졌다. 허나 뒷말을 기다리는 숙비의 시선에 떠밀린 이한은 결국 말을 이었다.
“연빈이 어제 네 걱정을 하더군.”
“예…?”
“네가 행여나 자기 때문에 자책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면서, 내가 보기엔 어떠하냐고 물었다.”
황제의 말을 듣는 숙비, 비영의 눈동자가 일순 격렬하게 떨렸다. 저야 빚이 있으니 그 일이 있은 뒤 줄곧 연빈의 생각에서 쉬이 벗어날 수가 없었다지만 연빈 역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지난번 정안궁의 궁녀가 와서 숙비마마의 잘못이 아니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마시라는 연빈의 말을 전해 주긴 하였으나 그 이후로도 줄곧 걱정해 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깊어지는 눈동자를 한 비영을 향해 이한이 다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네게 무심했다는 걸 깨달았어. 너 또한 마음고생이 심했을 터인데….”
“아닙니다, 폐하. 저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연빈이지요.”
“그 일은 사고였다. 연빈 역시 너를 탓하고 있지 않으니 혹여나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면 이만 거두거라.”
황제의 목소리는 이전에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다정하고 따스했다. 하지만 거기에 앉아 황제의 위로를 듣는 비영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영은 그사이 황제가 자신에게 무심하였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까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매일 밤 황제가 정안궁을 찾는다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폐하께서 나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으시나, 하는 생각 같은 건 하루도 떠올린 날이 없었다. 오히려 비영은 황제가 정안궁을 찾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폐하께서 그래도 자주 연빈을 찾아 위로해 주시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벌어진 거대한 변화를 실감하며 비영이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지금 제가 느끼는 마음의 짐은 응당 제가 감당하여야 할 일이고, 이후 연빈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면 풀어질 일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
“그러니 폐하께서는 제게 신경 쓰지 마시고 조금 더 연빈을 자주 살펴 주시지요.”
숙비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진중하고 무거웠다. 그는 마치 연빈이 그토록 아픈데 그를 두고 운화궁으로 와 식사를 하고 있는 황제를 탓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후궁이 되어 황제가 자신의 궁을 찾았다고 타박을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내리깐 채 황제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은 채로 조금 더 자주 연빈을 살펴 달라 말하는 숙비의 모습은 어떻게 보아도 전혀 이한을 반기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 그러마.”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든 이한이 웅얼거리듯 얌전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황제였다.
“아직도 안 된대?”
정빈, 송현은 막 정안궁에 다녀온 궁녀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정안궁으로 병문안을 가도 되는 건지, 기다리다 애가 다 타버린 송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정안궁으로 사람을 보냈었다. 궁녀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그것이… 연빈마마께서는 괜찮다고 하시는데 곁에 있는 궁녀인 아진이 아직 마마는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지라….”
궁녀의 대답에 송현이 대번 입술을 쭈욱 내밀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들어도 아직 괜찮아지지 않은 것을 연빈이 송현을 생각하여 괜찮다 대답했다는 게 뻔히 보이지만 송현은 이대로 모른 척 연빈의 말을 믿어버리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냥 잠깐 얼굴만. 정말 괜찮은지 얼굴만 보고 오면 안 될까?”
급기야 송현이 습관처럼 옆에 선 주아를 바라보며 묻자 오늘도 속으로 한숨을 삼킨 주아가 대답했다.
“연빈마마는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마마. 숙비마마도 얼마 전에 정안궁에 갔다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오신 걸 모르세요? 괜히 갔다가 불청객이 되지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그때는 연빈이 자고 있어서 들어가지 못한 것이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그리고… 폐하께서는 밤마다 가시는걸.”
“마마….”
주아는 오늘도 초인적인 힘으로 ‘마마,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아냈다. 후궁이 되어서 왜 자꾸 연빈이 아니라 폐하와 자신을 같은 선상에 놓으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제 주인이 황궁 생활에는 그다지 정이 없어 황제의 총애니 무어니 하는 것에도 영 관심이 없으신 것을 몰랐던 바는 아니지만 주아는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다 괜찮아질 거라 여겼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 같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냔 말이다.
“알아, 알아. 나도 그냥 답답하니까 한 소리지.”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 말을 조금 지나쳤다 싶은지 송현이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말을 덧붙이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직 연빈과는 깊이 교류를 나누기도 전인데 벌써 이 모양이니 앞으로 지금 송현과 비영이 가깝게 지내듯 연빈과도 가깝게 지내게 되면 어떤 모습을 보일지, 주아는 앞일이 막막해졌다.
주아가 그러거나 말거나 송현은 정안궁에 다녀온 궁녀에게 다시 말했다.
“몸이 괜찮아지는 대로 꼭 나를 불러 달라 그리 전하고 왔지?”
“예, 마마. 잘 전하고 왔습니다.”
“알겠어. 너희는 행여나 정안궁에서 기별이 오면 꼭 나에게 바로 전해야 해. 알겠지?”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 건지 여전히 의문스럽기만 한 진녕헌의 궁인들이었다.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리는 화운의 팔을 황후가 서둘러 붙들어 일으키곤 의자에 앉혔다. 황후궁에서 오전 문후가 끝난 뒤 곧바로 정안궁으로 찾아온 황후가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아 화운을 향해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냐.”
“예. 황후마마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마음 같아선 좀 더 일찍 찾아오고 싶었으나 나 때문에 괜히 더 불편하여 몸에 무리가 갈까 이제야 온 것을 이해하거라.”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황후마마. 이리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제게는 과분합니다.”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는 깍듯한 태도에 황후, 자란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최근 폐하께서 정안궁에 자주 드나드셨지만 연빈에게서는 그것을 우쭐해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자란이 말을 이었다.
“오래 시간을 빼앗으려 온 것은 아니고, 전해 줄 것이 있어 겸사겸사 들렀다. 선아.”
자란이 이름을 부르자 뒤쪽에 서 있던 선이 품에 가지고 온 작은 연고통을 가만히 화운의 앞에 올려두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흉터를 없애는 데 좋다고 하는 약이다. 사가에 연통을 넣어 특별히 구한 것이고 태의원에도 이미 보인 것이니 상처가 조금 아물면 잊지 말고 꾸준히 사용하면 좋을 것이야.”
“마마….”
화운이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태의에게 흉터가 남을 거란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었지만 사실 화운은 흉터에 대한 건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몸에 흉터가 생기는 건 사실 지난날의 하운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진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사색이 되어 거의 눈물을 쏟을 뻔했지만 화운은 듣고 돌아선 뒤에는 곧장 잊어버린 일이었다.
일렁이는 눈동자를 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화운을 향해 자란이 말을 이었다.
“물론 폐하께서는 흉터 따위를 저어하시는 분이 아니시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상처는 깨끗하게 치료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황후마마…. 마마의 보살핌에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일어나지 말고 그대로 앉아 있어.”
화운은 감사 인사를 올리기 위해 몸을 일으켰으나 그마저도 황후의 제지에 이어지지 못했다. 황후는 그저 너그러운 얼굴로 말했다.
“네가 정녕 내게 감사하다면 어서 건강해지거라. 그것이 나의 염려에 보답하는 일일 테니.”
“…예, 마마. 그러하겠습니다. 마마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