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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99)화 (99/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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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더 말도 하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는 황제의 마음이 걱정되어 오 태감이 조용히 그를 불렀으나 이한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상하게 그것이 싫었다. 머리로는 운화궁으로 가서 숙비가 괜찮은지 살피고 그와 밤을 보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거부감이 일었다. 오늘밤도 연화운은 상처의 고통에 신음하며 불편한 잠자리를 보내야 할 터인데 자신은 다른 이의 몸을 품는다니. 황제로서는 당연하기 그지없는 일이 오늘따라 왜 이리도 잔인하고 무도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결국 이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안정전으로 가자.”

“…….”

“운화궁에는 내일 점심에 들르겠다.”

“예, 폐하.”

“…….”

“안정전으로 가자!”

밤길에 울려 퍼지는 오 태감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한은 눈을 감았다. 폐하께서는 어떤 색을 좋아하시느냐 묻던 화운의 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사람이 살아가며 어느 색깔을 좋아하는 건 너무나도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니, 이한은 그 이후의 일은 굳이 지금 떠올리지 않기로 하였다.


“왜 한번 잡지도 않으셨어요?”

화운의 붕대를 새로 갈아 주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걸 도운 아진이 다소 아쉬운 얼굴로 화운에게 말했다. ‘뭘 잡아?’ 하고 되물어오는 주인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라 내도록 밖에서 혼자 두 손을 꼭 모은 채 바라는 바가 있었던 아진은 허탈해지기까지 했다. 입술을 한 번 삐죽이며 아진이 이어 말했다.

“폐하요. 오늘밤 정안궁에 머무셨어도 좋을 텐데….”

“폐하? 폐하께서 왜 정안궁에…?”

얼마나 안중에도 없었으면 아진의 말뜻조차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화운이 이내 뜻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폐하께서 왜 정안궁에 머무시니.”

“머무시지 못할 건 또 뭐가 있어요? 마마께서는 당당한 폐하의 후궁이시니 폐하께서 정안궁에서 밤을 보내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걸요!”

물론 그간은 연빈의 패악질로 인해 황제의 마음이 아주 떠나버려 그런 일은 기대조차도 할 수가 없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나.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실 정안궁의 궁인들은 언제쯤 폐하께서 정안궁에서 밤을 보내실까 저들끼리 날을 가늠해 본 지 오래되었다.

화운을 조심스럽게 부축해 침대에 눕도록 도운 아진이 이불을 정리해 주는 척 은근슬쩍 침대에 걸터앉았다. 화운은 이 주제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피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아진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요. 마마, 이제 마마께서도 생각을 하실 때가 되었어요.”

“무얼….”

“무얼이라니요. 폐하와 사이가 이만큼 좋아지셨으니 다시 시침을 드실 날도 곧 오지 않겠어요?”

“아니, 그건… 아니 그건 지금 말할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아진의 말에 화운은 눈앞이 다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시침이라니. 화운이 생각할 때 그것은 일러도 너무 이른 문제였다. 황제가 연빈에게 학을 떼 마주치기도 싫어하며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사이가 조금 나아진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아진의 화운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당장에 마마께서 무얼 하시라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왕이면 하루라도 빨리 그런 날이 오면 좋은 거니까요. 마마께서도 이제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셔야 한다는 거죠.”

아진은 마치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부모라도 된 것처럼 이불 밖에 나와 있는 화운의 팔을 안으로 넣어 주며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오늘만 해도 그래요. 물론 마마께서 아직 몸이 낫지 않으셨으니 시침을 들 수는 없겠으나 폐하께서 계셔 주신다면 한결 마음이 놓일 거라고 은근히 티를 내실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으음….”

“하고 많은 말을 놓아두고 숙비마마에 대해 물으시다니요.”

지금도 제 주인이 황제를 배웅하며 숙비를 걱정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어이가 없는 아진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황제의 옷자락이라도 슬쩍 잡아 보았다면 이야기는 또 달랐을지 모른다. 자주 악몽을 꾸고 힘들어하시니 그것을 은근슬쩍 털어놓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친밀해지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할 수 있는 말은 별처럼 많고 많았을 테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죄다 제쳐놓고 겨우 한다는 말이 숙비에 대한 걱정이라니.

“폐하께서 그 말을 듣고 운화궁에라도 가셨으면 어쩌시려구요.”

“그러셨다면 좋은 일이지….”

“마마!”

화운은 제 말이 끝나자마자 목소리를 높이며 저를 노려보듯 바라보는 아진의 모습에 슬쩍 이불을 끌어당겨 코 아래까지 얼굴을 가렸다. 이토록 단호하고 매서운 아진의 표정을 화운은 처음 보았다. 작은 호랑이 같은 얼굴을 한 아진이 말을 이었다.

“물론 마마께서 다른 비빈들과 두루 잘 지내는 건 좋은 일이에요. 다른 분들도 그러시니까요. 하지만 마마, 항상 잊지 마셔야 해요. 결국 이 황궁에서 후궁의 처지를 결정짓는 건 폐하의 총애라는 것을요.”

말을 하면서도 아진은 자신이 화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게 새삼 낯설다고 느꼈다. 이전의 연화운은 그 총애에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여 오히려 황제의 마음을 더더욱 멀어지게 만든 사람이건만 지금의 연화운은 그런 일에는 아예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달라진 주인에게 적응했다고 생각하는 아진으로서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아진은 마치 겁을 먹은 작은 동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의 주인을 바라본다. 야차 같던 예전 모습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이제는 어디 내놓으면 누군가 낚아채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날 지경이다.

문득 자신이 주인을 너무 다그쳤다는 생각이 든 아진이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조급하게 생각하시라는 건 아니에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시고, 폐하께서도 마마께 마음을 많이 여셨으니까요. 몸도 안 좋으신데 소인이 너무 버릇없이 굴었어요, 마마. 죄송해요.”

“아니다. 너도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잖아.”

“네, 마마…. 우선은 몸을 회복하는 데 힘쓰시고, 남은 일들은 또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나가면 되니까요. 소인이 항상 옆에 있어드릴게요.”

그리 말하는 아진의 목소리에는 오로지 화운에 대한 애정과 염려만이 가득 차 있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화운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도,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주는 손길에도, 아진이 보여 주는 그 어떤 모습에서도 화운은 저를 향한 그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여전히 누군가 저를 향해 보여 주는 무조건적인 애정에 익숙하지 않은 화운은 괜히 마음이 간지러워 이불 속에서 발가락을 꼼질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고마워, 아진. 네 말대로 지금은 어서 낫는 것만 생각할게.”

“네. 그럼 불을 줄여드릴 테니 어서 주무세요. 오늘 오래 앉아 계셔서 고단하셨을 거예요.”

“으응. 너도 오늘은 좀 편하게 자, 알겠지?”

“예, 마마.”

오늘도 여전히 그러겠다고 대답을 한 뒤 화운의 침실 근처에서 쪽잠을 잘 아진을 떠올리며 화운은 하나의 촛불만을 남겨두고 모두 끈 뒤 조용히 물러나는 아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혼자가 된 방에 조용히 누워 있으려니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황제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매일 조금씩 익숙해졌다. 처음엔 눈만 마주쳐도 죄를 지은 사람처럼 심장이 쿵쿵 떨어져 내렸으나 오늘은 무려 황제에게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시냐 묻는 것도 모자라 그분의 대답을 기다리겠다고까지 말했다. 황제와 이리도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날이 올 거라고는 사는 내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기분 좋게 심장이 뛰었다. 과연 폐하께서는 어떤 색을 좋아하실까 궁금증이 일었다. 황룡포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을 좋아하실까. 화원을 좋아하시니 나뭇잎의 푸르름을 사랑하시진 않을까. 세상엔 천만 가지의 아름다운 색이 있으니 화운은 그것을 가늠해 보는 것만으로도 밤을 지새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분을 떠올리고, 그분의 취향을 예상해 보는 일이 재밌었다. 어쩌면 그분의 입으로 직접 답을 듣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나도 설레어 당장 밖으로 뛰어나가고픈 심정이 되었다. 폐하께서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시는지. 무엇을 즐겨하시고 저어하시는지. 그런 것들을 앞으로 하나하나 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을 만큼 마음이 들떴다.

그러다 또 불쑥 아진이 말한 ‘시침’ 같은 단어가 떠올라 온몸에 열기가 일기도 하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저와는 너무나도 머나먼 일인 것만 같아 그때마다 서둘러 그런 단어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화운은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이렇게 황제의 가까운 곳에 머물 수 있고, 이따금 그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정안궁의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더 이상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탐하지는 말아야지. 그리 다짐을 하며 화운이 두 눈을 꼭 감았다. 왠지 쉬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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