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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 예. 예, 폐하.”
여전히 황제의 심산을 가늠하지 못한 화운이 당황한 표정을 다 풀지 못한 채로 천천히 약을 들이켰다. 평소의 화운이었다면 분명 황제에게 먼저 돌아가 쉬실 것을 권하였을 터인데 이미 머릿속이 어지러워져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한은 화운이 약을 넘기는 모습을 긴장한 채 주시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초조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한 모금 한 모금 약이 넘어갈 때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화운의 목젖을 보고 있으려니 괜히 입이 말랐다. 고개가 조금씩 젖혀질 때마다 도드라지는 화운의 목선이 지나치게 희고 가늘어 한 손으로 쥘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화들짝 놀라 민망함에 괜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는 없겠으나 행여나 이 생각이 누군가에게 들렸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기까지 하고 나니 제가 정말 어딘가 이상해진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남은 약을 모두 넘긴 화운이 사발에서 입을 뗐다. 이한은 여전히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쓴맛 때문인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화운의 얼굴에 반사적으로 반응하여 제가 들고 있던 종지에서 사탕을 집어 그대로 화운을 향해 내밀었다.
화운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진은 차마 불경하게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어 미소를 참고서는 고개를 숙였다.
터질 것처럼 뛰어대는 심장을 애써 모른 척하며 이한이 입을 열었다.
“어서 먹거라. 약이 쓰질 않아.”
“예. 예, 폐하. 감사하옵니다.”
“어허.”
화운은 서둘러 손을 내밀어 이한이 내민 사탕을 받으려 했으나 팔을 슬쩍 빼며 사탕을 내어 주길 거부한 이한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손을 민망하게 만들 참이냐.”
억지인 것을 알았다. 화운의 손에 그냥 사탕을 놓아주는 것이 오히려 덜 민망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임을 이한도 알았다. 그런데도 이처럼 억지를 부리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더더욱 이상한 건 그걸 알면서도 이 고집을 물리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화운은 제가 혹시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그 짧은 순간에도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혹시 폐하께서 다른 의도가 있으신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보아도 지금 상황에서 제가 처음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이 아닌 다른 의도는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폐하의 말씀은, 폐하께서 직접 그 사탕을 제… 제….”
제 입에 넣어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차마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물어볼 수가 없어 화운은 그저 입을 벙긋거렸다. 설마 정말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 하는 화운의 생각을 완전히 깨부수며 이한이 대답했다.
“그래. 알았으면 어서.”
이한이 다시 사탕을 든 손끝을 까닥거리며 화운을 재촉했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는데, 일개 후궁인 화운이 더 이상 반항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약의 쓴맛 같은 건 벌써 잊어버린 화운이 두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살짝 앞으로 빼며 입을 벌렸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눈을 꼭 감고 있는 화운의 모습은 흡사 벌 받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자그마한 입이 조심스럽게 벌어진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던 이한이 저도 모르게 꼴깍, 하고 침을 삼켰다.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안쪽의 분홍빛 여린 살이 보이자 열길가 들불처럼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떨리는 손이 천천히 화운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사탕을 그 입에 슬쩍 넣던 찰나 손가락 끝이 미미하게 화운의 입술에 닿았다.
이한은 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대로 화운의 목덜미를 감싸 끌어당길 뻔했다. 아니,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아직 몸이 아픈 화운에게 해서는 안 될 일까지 해버리고 싶어질 것 같았다. 이한은 제가 느낀 충동을 무시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가 보마!”
목소리는 굳어 있고 움직임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지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화운은 덩달아 삐걱거리는 몸으로 자리에서 함께 일어나 밖으로 나서는 황제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사람답게 움직이는 건 그 모습을 전부 다 힐끔거리며 지켜본, 얼굴이 환해진 아진뿐이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이한이 저를 따라 나오는 화운을 보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어딜 나와. 너는 어서 들어가 쉬어라.”
“…인사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있는데, 저 앞까지 배웅이라도 하게 해 주십시오, 폐하.”
단호한 화운의 목소리에 이한은 그를 더 막지 않고 아주 느리게 변한 걸음으로 전각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과연 누구의 것이었을까.
전각 밖으로 나오자 안과는 다른 밤의 공기가 두 사람의 주위를 감쌌다. 그제야 들뜨고 요란스러워졌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은 화운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아, 헌데 폐하….”
“음?”
“숙비마마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숙비?”
이한의 얼굴이 의아함에 물들었다. 왜 갑자기 숙비의 얘기를 꺼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화운이 말을 이었다.
“그날 숙비마마께오서도 많이 놀라셨을 텐데 저까지 이리 되어 괜히 마음을 쓰고 계신 건 아닌지 염려가 되어서요. 정안궁에 오시었을 때 제가 약 기운에 자고 있었던지라 뵙지를 못하였는데, 아직 제 상황이 이러하니 찾아가지도 못하고 있어서….”
“아…….”
“행여나 괜한 자책을 하고 계신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폐하께서 보시기엔 어떠하셨습니까.”
그제야 이한은 자신이 그날 이후 한 번도 숙비를 찾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화운의 말이 옳았다. 비록 화운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으나 숙비 역시 그날 성난 매의 공격을 정면에서 맞이한 이였으니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게다가 연빈이 자신을 대신해 이리 다치기까지 하였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그러니 황제는 그러한 숙비의 마음을 헤아려 진즉 운화궁을 찾아 그를 위로하였어야만 했다.
헌데 이한은 어떠했나. 그의 정신은 내도록 오로지 연화운에게만 쏠려 있었다. 연화운이 다치고, 아프고, 힘들 생각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이 놀랐을 마음 같은 건 아예 떠올리지도 못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늘 공평하게 모두의 마음을 살펴 달래 주곤 했던 지난날과는 너무나도 다른 대처였다.
새삼스럽게 깨달은 자신의 행적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지만 또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면 황제의 무심이 마치 자신의 죄라도 되는 양 마음 쓸 연화운이 빤히 보여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한이 대답했다.
“…너는 환자가 무얼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느냐.”
“하오나, 폐하.”
“밖의 일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너는 네 몸을 회복하는 일에만 집중하도록 해라.”
화운은 여전히 숙비가 걱정되긴 하였으나 말씀대로 다정한 폐하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 보살펴주실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여 ‘예.’ 하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뒤로하고 멈추었던 걸음을 내디디려던 이한이 이내 다시 한 번 화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몸조리 잘하고.”
“…예, 폐하.”
주고받는 목소리에는 서로 간에 절절한 미련이 흘러넘쳤어도 돌아서는 발걸음은 잡는 이가 없어 멈추지 못하고, 남아 있는 이는 차마 떠나가는 걸음을 불러 세우지 못하였다.
“어디로 모실까요, 폐하.”
가마에 오른 이한에게 오 태감이 물었다. 이한은 앉아서 제게 숙비에 대해 물었던 화운의 목소리를 곱씹고 있는 중이었다.
어찌 이리도 무심하였을까, 하는 자책이 들어왔다. 숙비뿐만이 아니라 정빈에게도 그러하다. 어찌 되었든 그 밤의 일로 모두가 크게 놀랐을 것이 자명한데 어찌하여 단 한 번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까.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어찌 그러했나, 하는 물음에는 사실 너무나도 명쾌한 대답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화운 때문이었다. 화운이 다친 것에 온통 마음이 쏠려 황제는 다른 이들을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아니 될 일이다. 아니 될 말이었다. 황후도 아니고 일개 빈 하나가 다친 것 때문에 다른 모든 비빈들을 이토록 잊고 신경 쓰지 않았다는 건 선대의 황제들에게는 몰라도 지금의 성이한에게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한은 특별히 좋아하는 색이 없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옷이나 장신구 같은 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특별히 아끼는 후궁 따위는 평생 이한이 가장 경계해 마지않았던 존재이다. 헌데 이제 이한은 좋아하는 색을 고민할 것이다.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생긴 변화였다. 그래서 이한은 두려웠다. 좋아하는 색 다음에는 좋아하는 옷이 생길까 봐. 특별히 여기는 장신구를 차게 될까 봐. 그리하여 종내에는 특별히 아끼는 후궁 같은 것이 생길까 봐.
“운화궁으로 가자.”
한참 만에 황제가 말했다. 예상치 못하였던 명에 아주 잠시 놀란 얼굴을 했던 오 태감이 이내 고개를 숙이며 ‘운화궁으로 간다!’ 하고 큰 목소리를 내었다. 오래 멈추어 있던 가마가 천천히 밤의 길을 흘러가기 시작했다.
“잠깐.”
“멈추어라!”
하지만 그 움직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가지 못해 황제가 다시 가마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이한은 어둠에 휩싸인 길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이대로 운화궁으로 가면 분명 밤을 보내야 할 것이다. 황제의 위로란 보통 그런 식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밤에 처소를 찾고서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나오는 건 정안궁이 아닌 곳에서는 거의 벌어지지 않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