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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에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가늠해 보아야 할 건 어떠한 결정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인지, 아닌지였다. 어떤 사람을 어떤 자리에 앉혀놔야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핍박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깨닫기 위해 책을 보았고, 문화를 이해하는 황제가 되어야 하기에 그림을 보는 것뿐이다.
설령 개중 조금 더 좋은 것들이 있다고 한들 이한에게는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 성이한이 아닌, 안국을 이끌어가는 황제의 삶이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화운이 이한에게 묻고 있었다. 황제가 아닌 당신이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고.
하찮은 질문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데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물음이었다. 검은색을 좋아하든, 붉은색을 좋아하든 황제의 자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런 별것도 아닌 질문 하나에, 황제는 어찌 바보 멍청이가 된 것처럼 낯이 뜨겁고 속이 덜컹 내려앉은 걸까.
어색하게 굳어 있는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화운이 이내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면… 한번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화운은 어째서 황제가 내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그 대답을 들었을 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던 건 저 역시 그렇게 살았던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굶어죽을지 알 수 없는 삶에서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알아볼 여력이 없었다. 누군가 저에게 버리듯 쓰레기 같은 음식을 던져 주는 것도 그저 감사하게 받아먹을 지경인데 내가 고기를 좋아하는지, 생선을 좋아하는지 어찌 알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하물며 색깔 같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화운에게, 아니 어린 하운에게는 세상이 모두 다 무채색일 뿐이었다.
하지만 화운은 제가 처음 ‘내가 좋아하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에 느낀 거대한 감동을 기억했다. 세상에 새로운 색깔이 덧입혀져 번지는 것 같은 감각은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하게 벅차오르는 기억이었다. 거적때기를 대충 주워 둘러 입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푸른색의 옷을 찾아 입을 때 화운은 비로소 제가 금수가 아닌 사람인 것을 깨닫기도 하였다.
물론 황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자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게 무언지 생각하지 않았던 건 자신처럼 목숨을 연명하는 게 급급했기 때문은 아니란 걸 알았다. 좋아하는 게 없어도 황제는 고기와 생선을 넘치게 먹고, 온갖 화려한 색의 옷을 입으며 살아왔음을 안다. 알고 있었다.
“분명히 특별히 더 눈이 가는 색이 있으실 것이옵니다. 제가 감히 궁금하다고 하면… 그것을 제게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운이 오늘 굳이 황제에게 그것을 물은 건 그분이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길 원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온갖 화려한 색색의 비단에 둘러싸여 있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색이 없다면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비단 중 그 무엇도 특별해질 수 없었다. 화운은 세상에서 가잔 존귀한 황제 폐하께서 언제나 특별한 무언가를 손에 쥐시길 바랐다. 가질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것을 취하시길 바랐다.
이한은 한동안 말이 없이 그저 화운을 바라보기만 했다. 황제의 침묵에 화운은 다소 긴장하는 듯했으나 시선을 피하려 들지는 않았다. 빛이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옅은 화운의 눈동자가 참으로 따뜻하게도 이한을 마주하고 있어, 한참 만에 이한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마.”
이 대답 한마디를 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아마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한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욕망을 철저하게 누르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라왔다. 처음은 결코 후궁을 지나치게 총애하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에서부터 비롯되었으리라. 제아무리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고 하더라도 황제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만을 내세우며 누군가를 특별하게 마음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지금의 태후는 어린 이한에게 언제나 집요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하여 너무 어릴 때부터 황제가 될 이는 개인의 욕망을 내세워선 안 된다는 생각을 거의 강박적으로 하게 된 이한은 자라며 단지 후궁에 관한 일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개인적인 욕구를 애써 생각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이한이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해 보겠다고, 그리 대답을 한 것이. 내가 무엇을 특별하게 좋아하는지 떠올려 보겠다고 말을 한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일이겠는가.
화운은 모르더라도 그 자신이 지금 얼마나 큰 변화의 첫 걸음을 떼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는 이한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목으로는 마른침이 넘어가고 손바닥에는 땀이 찼다. 그것은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이한은 순식간에 자신이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고, 당장이라도 어머니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호통을 칠 것만 같았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때, 눈앞의 화운이 말했다. 이한은 거기에 앉아서 폐하께서 좋아하는 색을 찾으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이의 눈매가 얼마나 다정한지를 본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입매가 얼마나 수려하고 아름다운지.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또 얼마나 온화한지.
그것이 이상하게도 용기가 되어서. 그가 기다리겠다고 하는 말이 꼭 이한에게 일종의 면죄부가 되어 주는 것만 같아서.
그것을 빠짐없이 눈동자에 새긴 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깨닫게 된다면 네게 알려주마.”
아주 오랫동안 견고하게 머물러 있던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색 하나일 뿐이었으나 그 끝이 어디로 가닿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진이옵니다.”
약사발을 들고 안으로 들어온 아진은 아직도 낯설기만 한 황제의 시선에 괜히 눈치를 보며 허리를 굽히고 들고 온 약을 살짝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마마께서 약을 드실 시간인지라….”
황제는 그제야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내었다. 어색한 침묵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건만 시간 가는 줄을 모른 채로 앉아 있었다. 적막이 찾아들면 그것대로 좋았다. 고요한 방에 단둘이 앉아 있는 것이 어쩐지 운치 있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때로는 이한 자신이, 때로는 화운이 별것도 아닌 사소한 말을 꺼내 별것 아닌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것은 더더욱 좋아 뱃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한은 화운이 환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 쉬어야 하는 것을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아…. 저야말로 피곤하실 폐하를 살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말을 나누는 서로의 목소리에는 차마 감추기 힘든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데 정작 두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데 바빠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돌아가지 않고 있었던 것인데 송구는 무슨….”
이한은 그리 말을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괜히 몸을 궁싯거렸다. 약 먹는 것만 보고. 걱정이 되니까 약 먹는 것만 보고 가자. 이한은 지금 속으로 그런 핑계를 치열하게 대는 중이었다.
그사이 황제고 뭐고 다 중요한 일이지만 주인의 몸 상태가 가장 중요한 아진이 화운의 손에 약을 들려 주더니 이내 무슨 생각이 났는지 시선을 한 번 황제 쪽으로 작게 힐끔거렸다. 그리곤 약과 함께 가지고 온 작은 사탕이 담긴 종지를 슬쩍 함께 내민다.
“마마,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사탕도 준비해 두었어요.”
화운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만큼 나이를 먹고도 쓴 약 하나 태연하게 넘기지 못해 매번 사탕을 찾는 모습을 폐하께 보이자니 민망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운이 너는 어찌 괜한 말을 하느냐, 하고 야속한 시선을 아진에게 보내는 사이 이한은 다른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예전 어느 밤, 이한이 불쑥 정안궁을 찾아왔을 때의 기억이었다. 기별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이한 때문에 화운은 당황했고, 그 때문에 약을 먹고 나서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뱉는 것도 잊어 볼록하게 솟아오른 볼을 하고 이한을 맞이하였던 날이 있었다. 그때는 서로 간의 사이가 이토록 좋아지기도 전이었건만 동그란 볼을 보고서 저도 모르게 귀엽다는 생각을 하여 충격을 받았던 것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리 내라.”
그 기억 탓인지 이한은 반쯤은 충동적으로 아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사실 이런 상황을 노리고 굳이 사탕 이야기를 꺼내긴 하였으나 정말로 폐하께서 사탕을 달라 하실 줄은 몰랐던 아진이 놀란 얼굴을 하였다. 안 그래도 민망한데 폐하께서 사탕을 콕 집어 이리 내라 말씀을 하시니 그 의도가 쉬이 가늠이 되지 않아 화운도 당황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한 그 자신만큼 놀라고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 사탕을 받아서 뭐. 이걸 굳이 내 손으로 받아서 무얼 하겠다고. 그리 스스로에게 다그치듯 물으면서도 이한은 아진이 내민 사탕을 선선히 받아 든다. 놀라고 당황한 마음이 들기는 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미묘한 기대와 설렘이 함께 피어난 탓이다. 이한은 결국 저의 손에 떨어진 자그마한 사탕 한 알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멍한 얼굴을 한 화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얼 하느냐. 식기 전에 어서 먹질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