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96)화 (96/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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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뭐가 중요하지?”

어쩔 수 없이 화운이 말을 이었다.

“단지… 그것이 폐하께서 제게 주신 첫 번째 선물이기에….”

화운은 뒷말을 흐렸으나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할 이한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연화운이 처음 받은 선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지금의 화운이 기억하는 첫 번째 선물이었다. 물론 이한은 진실을 전부 다 알고 있진 못하였으나 이미 이한이 지금의 화운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었으니 사실 이한에게도 그것은 제가 연화운에게 내린 첫 번째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갑자기 이한은 그 차를 다 마셔버리는 것이 마찬가지로 아까워졌다. 그것이 아주 오래오래 정안궁에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화운이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며 자신을 생각해 주길 바랐다. 나아가, 이 정안궁에 화운이 저를 떠올리게 만들 만한 물건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허면 곧장 다른 차를 보내 주마.”

짧은 침묵이 지난 후 이한이 말했다.

“나의 첫 번째 선물은 네 뜻대로 아끼고, 새로 보내 주는 차를 부지런히 마시면 되겠지.”

“…폐하의 성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살포시 눈을 내리깔고 인사를 올리는 화운을 바라보며 이한은 문득 저에게도 그리 아끼어 바라볼, 연화운이 제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마 그것을 제 입으로 꺼낼 수는 없어 속이 쓰린 황제였다.


“두 분은 어떠하냐.”

침실 안에 간단한 다과를 놓고 재빨리 밖으로 나온 아진에게 마찬가지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 태감이 물었다. 아진은 그런 오 태감에게 슬쩍 눈짓을 하더니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섰다. 태감이 그 뒤를 따라가 곁에 서자 아진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들어가니 두 분 다 말을 멈추셨는데, 조금 어색해하시는 것 같기는 했지만 분위기는 좋아 보였어요.”

“흐음.”

“공공. 오늘 폐하께서 정안궁에 머무실까요?”

이어진 아진의 물음에 오 태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마마께서 아직 완쾌하지를 못하셨는데…!”

마마께서 아직 다 낫지 못하셨으니 폐하께서 곁에 계셔 주시면 더 좋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던 아진이 이내 그의 말에 숨겨진 뜻을 깨닫고는 마찬가지로 얼굴을 와락 구기며 말했다.

“아, 아니 뭐! 꼭… 꼭 무엇을 해야만 머무실 수 있는 건가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곁에 계셔 주실 수도 있는 거지. 불경하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리는 아진의 목소리를 용케도 들은 오 태감이 눈을 부라렸다.

“마마께서 오냐오냐 해 주시니 네가 아주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경을 쳐야 정신을 차릴 테냐?”

“제가 틀린 말을 하였습니까?”

따끔한 타박에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아진이 지지 않고 대꾸하자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오 태감이 이내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연빈마마께서는 오늘 폐하 생각을 하기는 하셨느냐.”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진지한 목소리였다. 오 태감은 요즘 이전에는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걱정거리들이 부쩍 늘었다.

짧게 본다면 어제오늘만 해도 그러했다. 연빈과 천년만년 떨어져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강제로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도 아닌데 말 한 마디면 가든 부르든 하여 볼 수 있는 사람을 두고 하루 종일 초조해했다. 무어라 말로 표현을 한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황제를 모셔온 오 태감은 지금 저의 주군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황제는 당장 몇 시간 후면 볼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불러올 수 있는 후궁 하나를 두고 종일 그리움에 애를 태웠다. 시간이 왜 이리 느리게 흐르느냐 답지 않게 짜증을 내고 장계를 보다가도 갑자기 허공에 시선을 두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황제의 모습에 오 태감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전의 연빈이야 황제 폐하라면 버선발로 어디든 뛰어나올 분이였으니 걱정할 것이 없었겠으나, 지금의 연빈은 도대체 폐하께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오 태감도 애가 탔다. 물론 최근의 연빈은 전에 없이 황제에게 깍듯했고, 예의가 발랐으며, 진심으로 황제를 염려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 행동들이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오 태감은 알지 못했다.

변한 뒤의 연빈은 황제뿐만이 아니라 지나가다 만나는 궁인들 한 명 한 명에게도 봄바람처럼 다정하기가 그지없으니, 오 태감은 연빈이 저의 주군에게 보이는 태도도 그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일까 봐 걱정이 되었다. 오 태감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진이 대답했다.

“음…. 말로는 아니라고 하시기는 하는데 제가 보기엔 어제도, 오늘도, 폐하를 몹시 기다리시는 것 같았어요.”

“그게 정말이냐.”

“어찌 감히 이런 일을 두고 거짓을 말하겠어요. 오늘은 그 몸을 하시고서도 전각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시고….”

“허면 네가 보기에 마마께서 달라진 후에도 여전히… 그러니까 여전히 폐하를….”

거기까지 말을 이어가던 오 태감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묻고 싶은 말이 있기는 한데, 그것을 무어라 표현을 해야 좋을지 순간 망설여진 탓이다.

황제의 비빈은 응당 가진 모든 마음을 오로지 황제 폐하 한 사람에게 바쳐야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목적으로 황궁에 들어왔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황제를 마음을 다하여 연모하는지 아닌지도 사실상 상관없는 일이었다. 황제의 후궁이 된 이상,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은 황제를 연모하여야만 했다. 그러하다고 말해야 했다. 그것이 곧 법도이다.

그러니 여기서 오 태감이 아진을 향해 ‘연빈마마께서 여전히 폐하를 연모하시느냐.’ 같은 질문을 하는 게 얼마나 당치 않은 일이냔 말이다.

“아니. 아니다.”

결국 오 태감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황제의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한낱 궁녀에게 폐하의 위엄에 반하는 질문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폐하께서 오늘 밤 머물고 가시면 좋을 텐데….”

다행히 태감의 말을 더 파고들지 않는 아진이 여전히 주제넘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오 태감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답답하여 불안하기 그지없었으나 그나마 연빈 역시 폐하를 기다리며 하루의 시간을 보낸 것 같긴 하다니 그것으로 작은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푸른색 옷을 자주 입는구나.”

아진이 가져온 과일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이한이 문득 눈앞에 보이는 화운의 옷자락을 가만히 쳐다보다 물었다. 청아하게 푸른 옷감이 그의 흰 피부와 몹시도 잘 어울리는군, 따위의 생각을 저도 모르게 하다 보니 불현듯 깨달은 사실이었다. 확실히 최근의 연빈은 푸른 계통의 색을 자주 걸치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폐하께서 어느 과일을 더 많이 드시는지, 같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피고 있던 화운은 갑작스러운 황제의 물음에 잠시 어깨를 움찔했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아…. 제가 좋아하는 색인지라….”

“그러하냐.”

그게 뭐 그리 심각한 이야기라고, 이한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벌써 공물로 들어오는 것들 중 푸른색 옷감이 얼마나 많을지 하는 것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다음번에는 화운에게 어울릴 만한 푸른색의 비단을 보내 주어야겠단 생각이 뒤따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잠시 말이 없던 화운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어떠한 색을 좋아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딴에는 엄청난 용기를 낸 물음이었다. 화운은 여전히 자신이 황제의 앞에서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말하고, 묻고, 그분을 궁금해하여도 되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색을 좋아하시느냐 묻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화운의 목소리 끝이 눈에 띄게 떨렸다.

하지만 이한은 그 떨림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알아채기는커녕 무슨 일인지 오히려 멍한 얼굴을 하고선 그저 화운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화운도 덩달아 당황하여 죄를 청해야 하나 어쩌나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주눅이 든 것 같은 목소리로 이한이 대답했다.

“그… 나는… 내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잘….”

“……?”

“…잘 모르겠는데.”

방 안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이한은 제가 뱉은 말이 멍청하게 들려 민망해했고 화운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눈만 깜빡였다. 변명하듯 이한이 말을 덧붙였다.

“그런 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 말을 하며 이한은 살면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기호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좋게 말하자면 굳이 좋아하는 것을 따로 염두에 두고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황제는 대충 보고 아무거나 골라도 언제나 최상급의 물건을 사용할 수가 있었다. 가장 좋은 음식, 가장 좋은 차, 좋은 책과 그림, 하물며 사람까지. 이한은 굳이 자신의 성향을 따져 내세우지 않고 주변에서 권하는 것을 대충 골라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이한이 그 자신의 욕망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황궁에서 나오는 음식은 무엇이든 좋은 것일 테니 제 입맛에 무엇이 더 맞고 아니고는 가려 따지지 않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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