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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식당하지 말고 싸우라. 그 말이 화운의 마음에 어떠한 파동을 주고 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로 이한이 말을 이었다.
“이리 좋은 풍경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고운 말들을 듣고. 그리고 좋은 사람을 생각하거라.”
좋은 풍경도, 맛있는 음식도, 고운 말과 좋은 사람도 화운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라 여겼다. 남의 것을 빼앗아 취하고 있는 생각을 버리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화운에게는 이 순간이 특별했다. 애초에 지금의 연화운에게는 허락된 적이 없는 것들을, 이한은 화운이 하여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누구의 것이라 가려 명명하기엔 어려운 감정이었다.
“네가 원하면 나를 생각하여도 좋다.”
이한의 말은 일견 너그러운 자비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사실 그 안에 담긴 것은 애원과도 같은 마음이었음을. 오늘처럼 서러운 감정이 될 때면 부디 나를 생각하며 견뎌내 주길 간청하던 마음이었음을.
아마도 지금은 이한조차 그것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영은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은 깊은 골목 한쪽의 무너진 담벼락 위에 걸터앉아 서서히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처럼 유달리 노을이 어여쁜 날에는 일찍 소굴로 돌아가 저와 같은 거지들과 어울리고 싶지가 않았다.
사실 영이 어여쁜 노을이나 푸르른 하늘 따위를 바라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하루 빌어먹고 살기도 빠듯한 어린 거지의 삶이 어디 그리 만만할까. 해가 뜨고 지는 풍경 같은 것을 감상하는 것도 전부 배가 부르고 등이 따수워야 할 수 있는 일이지, 누가 먹다 버린 음식이 없나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다니다 보면 하루가 꼬박 가도 하늘 한번 쳐다보지 못한 날이 부지기수였다.
“형은 이제 정말 안 오나….”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영의 얼굴이 어느새 그리움으로 젖어들었다. 그리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팍팍하게 살아가던 어린 소년에게 하늘을 보여 준 것이 바로 하운이었다. 하운은 이따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배를 덜 곯게 보살펴 준 이였다.
누군가 영에게 하운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영은 그를 영웅이라 칭할 것이다. 물론 어느 날 영이 ‘형이 내 영웅이야!’ 하고 신이 나서 떠들었을 때 하운은 기겁을 하며 절대로 나 같은 사람을 영웅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리고 말렸으나 영의 생각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운은 영의 짧고도 기구한 삶에 있어 유일한 영웅이었고, 은인이었으며,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세상천지에 그리도 많다는 훌륭한 사람들은 영에게는 전부 환상 같은 존재였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아주 작고 작은 영의 세상에 그들은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대신 어린 소년은 하운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의 자신처럼 가난하고, 약하고, 돌봐 줄 이 하나 없던 소년이 검을 쓸 줄 알고, 소란을 피우는 못된 사람들을 혼쭐내는 무인으로 자라났다니 영은 세상 천지에 그것만큼 흥미진진하고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하운은 영에게 이야기 속 멋진 주인공이었고, 영의 세계를 구해 주는 영웅이었다.
게다가 이 시장통에서 검 좀 쓸 줄 안다 하는 이들은 전부 우락부락하여 말조차도 욕이 없으면 할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경박하기 그지없는데 하운은 전혀 달랐다. 하운은 선하고 고우며 단정한 얼굴을 하고 매사에 소란스러움이 없이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영을 만나 반가워하며 웃을 때는 어린 영의 마음이 다 두근거릴 정도로 다정하게 웃을 줄 알았고, 말을 할 때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자라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정한 음색과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영은 그 나긋한 목소리가 좋아서 늦은 밤 남들이 없는 구석에서 몰래 하운이 하는 투를 흉내 내 본 적도 있을 정도였다.
단지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영은 하운을 닮고 싶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미래 같은 건 꿈꾸지도 못하고 살아왔던 영은 하운을 만나 처음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감정을 깨달았다. 영은 하운처럼 살고 싶었다. 그건 막연히 들리는 ‘훌륭한 사람’ 같은 형체와는 완전히 달랐다.
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면. 하운이 그랬던 것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선한 마음을 잃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며 그렇게 나아가면 언젠가는 꼭 그와 같은 사람이 될 수가 있을 거라고.
하운은 소년에게 그렇게 손에 잡힐 듯 선명한 꿈이었다.
“보고 싶다….”
친동생을 대하듯 다정하게 저를 바라보던 표정. 따사로운 눈동자. 소년의 눈에는 막연히 고와만 보이던 얼굴. 영은 하운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 좋다는 황궁으로 가면서도 영을 잊지 않고 찾아와 인사를 해 주고, 객잔에 귀한 돈까지 부쳐가며 여전히 영을 비롯한 어린아이들을 돌보아주고 있는 그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형. 형이 올 수 없으면… 내가 갈게.”
잠시 슬픔이 어려 있던 소년의 얼굴이 금세 의욕으로 가득 찼다. 천민인 하운이 들어갈 수 있는 황궁이라면 영이라고 들어가지 못하란 법은 없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 되겠지만 결코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영은 지금부터 매일을 더 열심히 살아서 꼭 하운이 있다는 황궁의 시위가 되어 그의 곁에 설 생각이었다.
담벼락에서 훌쩍 뛰어내려 굴로 돌아가는 소년의 어깨가 당당하게 펴졌다.
그 스스로는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겠으나, 저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꿈이 되고, 어린 소년이 유일하게 품어 가진 욕심이 된 하운의 이야기였다.
“내가 보내 준 차는 입에 맞았느냐.”
짧은 산책을 마치고 침실 안으로 돌아온 이한이 품에 안고 있던 화운을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히고선 그를 마주 보고 앉으며 물었다. 당연히 전각으로 되돌아오는 길에도 계단 앞에서부터 화운을 안아 들었던 이한이다. 화운은 여전히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하였으나 그랬다가 또 거절을 하느냐 타박을 받을까 순순히 안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입에 맞은 것은 물론이고, 그 차 덕분인지 지난밤에는 뒤척이지 않고 바로 잠들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폐하.”
“뭐, 감사를 받자고 물어본 건 아니었고.”
흠흠, 헛기침을 하는 이한의 입꼬리가 눈에 띄게 씰룩였다. 물론 황제가 하사한 차를 두고 감히 별로였다 고할 간 큰 이는 없겠으나 그래도 화운이 제 입으로 그것이 참으로 도움이 되었다 말을 하니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듣고 싶어서 오 태감을 시켜 화운이 차를 잘 마셨단 것을 이미 알아와 놓고도 굳이 생색을 내듯 물었다.
그러다가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화운을 바라보며 이한이 말했다.
“괜히 아끼지 말고 매일 끓여 마셔라.”
그것은 마찬가지로 오 태감의 보고를 통해 들었던 말이었다. 정안궁의 어린 궁녀가 말하길 연빈이 차를 몹시도 마음에 들어 했으나 폐하께서 주신 것이라 아까워하며 오늘 맛만 보고 두고두고 아껴 마실 거라 말을 하였다 하니 그 말을 들은 이한의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이한이 미리 알아낸 것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화운이 정곡을 찔린 말을 듣고 당황한 얼굴을 하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황제가 말을 이었다.
“알아들었느냐? 안국의 빈은 차 따위를 아껴 마신다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으니.”
“허나 폐하께서 주신 귀한 차이지 않습니까. 어디 보통의 차와 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허….”
“누구도 그것을 감히 차 따위라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폐하께서 처음으로 내려 주신 것을 아끼고 싶은 마음인 화운이 곧장 수긍하지 못하고 대답했다. 전에 없이 단호한 목소리였다.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저를 멸시하고 조롱하는 말을 할 때에는 세상에 다시없이 얌전한 얼굴로 다른 말없이 순종하더니 고작해야 차 하나 때문에 이리도 단호한 목소리를 내다니 말이다. 그러다가 또 웃음이 흘러나왔다. 연화운이 이토록 강경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 내려 준 선물이라는 게 몹시도 흡족하였다.
심지어 그의 말을 들어보면 차 자체가 귀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준 사람이 자신이기 때문에 귀하단 뜻이 명백하렷다. 황제의 얼굴이 자꾸만 경박하게 허물어졌다 애써 굳어지길 반복했다.
마음이 즐거워진 황제가 봄볕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이번뿐이겠느냐.”
“……?”
“차를 다 마시면 또 보내 주마. 아니, 당장 내일이라도 좋은 것을 잔뜩 보내 줄 테니 애써 아낄 필요는 없다.”
이한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할 화운의 얼굴을 상상했다. 얼마 되지도 않은 작은 상자 하나도 이리 애지중지하니 더 많이 보내 준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한의 예상과 달리 화운은 고개를 저었다. 또 내 성의를 거절하는 거냐 이한이 따져 묻기 전에, 화운이 말했다.
“제게는 과분한 성은에 감사드리옵니다. 다만, 다른 차를 아무리 많이 보내 주셔도 그것들은 일전에 받은 차만 하지 못한 것을요.”
“어째서지? 수량차가 좋은 차라고는 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차는 얼마든지 더 있다.”
“무슨 차인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단지….”
화운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제 마음에 너무나도 귀한 것이 별거 아닌 취급을 당하자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는데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고 이한은 이미 화운의 다음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