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 폐, 폐하!”
깜짝 놀란 화운이 저도 모르게 두 팔로 황제의 목을 감싸 안으며 소리를 지르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 와중에도 이한은 혹시나 화운의 상처에 무리가 갈까 더없이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괜찮습니다, 폐하. 제가 혼자 내려갈 수 있습니다!”
“조심하여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느냐.”
화운이 연달아 황제에게 내려 줄 것을 청했으나 계단은 어차피 몇 개 되지도 않았고 한마디씩 말이 오고 가는 사이 화운은 이미 황제의 품에 안긴 채 계단 아래로 내려온 후였다. 하지만 이한은 계단을 다 내려온 후에도 화운을 내려놓지 않은 채로 잠시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혹시 나 때문에 더 아팠느냐?”
안을 때는 이편이 몸에 무리가 덜 갈 것 같아 그리한 것인데 제 품에서 잔뜩 얼어 있는 화운을 보자니 오히려 긴장하여 몸에 더 힘이 들어가 상처에도 무리가 갔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가까이 다가온 황제의 체온이며 시선에 긴장한 화운은 등의 통증 같은 걸 느낄 정신이 아니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화운이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민망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싶었는데 두 손은 황제의 목을 안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묻을 곳이라곤 황제의 어깨밖에는 보이지 않아 화운은 그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한 품에 다 들어오는 작은 몸을 하고선 제 품에 안겨 어쩔 줄 모르는 화운의 모습이 이한에게는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이한은 꼭 자그맣고 흰 토끼를 품에 안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내려 줄 테니 조심하거라.”
이대로 화운을 안은 채로 정안궁을 한 바퀴 돌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이한이 그를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목을 감았던 얇은 팔이 떨어지자 마치 한기가 돌듯 허전함이 밀려왔으나 그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이한이 화운을 향해 한쪽 팔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이한의 팔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마주쳐 오는 화운에게 이한이 은근하게 턱짓을 했다. 내 팔을 잡아 의지하며 걸으라는 뜻이었다.
“혼자서도 괜찮습니다, 폐하.”
“너는 참 간도 크구나. 매번 내가 해 주겠다는 것은 전부 거절할 셈이냐?”
흘러나온 문장만 보자면 당장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야멸찬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하지만 화운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말하는 이한은 꼭 제 선의를 거절당해 시무룩해진 소년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하면… 감사합니다, 폐하.”
화운이 다시 대답하며 작은 손을 사뿐히 이한이 내민 팔 위에 얹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쉽게 중심이 잡히지 않는 몸을 황제에게 의지한 채로, 화운은 천천히 한 걸음씩 발을 내디뎠다.
사위는 이미 어둑해지기 시작하였으나 낮 동안 부지런히 태양빛을 받은 나무들은 어느새 새파랗게 우거지기 시작한 자태를 고스란히 뽐내고 있었다. 어느덧 초여름으로 접어든 계절의 기운이 들이마시는 숨을 타고 폐부를 가득 채워오자 내도록 방에 갇혀 있다시피 하느라 답답했던 가슴이 그제야 한결 가벼워졌다.
이리 새로운 몸으로, 새롭게 맞이하는 계절이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애틋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이렇게 좋은 날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어찌하나 걱정이 되다가도, 이토록 아름다운 날들이 너무 오래도록 지속되면 어쩌나 그것이 무섭기도 하였다.
“너는 또….”
이한의 목소리가 화운의 상념을 파고든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돌아보자, 이상하게도 심각한 얼굴을 한 황제의 얼굴이 지척에 있었다.
“너는 또 그런 얼굴을 하는구나.”
흘러나오는 이한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이한은 화운을 보고 있었다. 그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주변의 나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을 때에도 이한은 오로지 그와 속도를 맞춰 걸으며 그의 얼굴만을 보고 있었다. 처음엔 혹시나 아프지는 않은지 걱정이 되어서였고, 다음엔 주위를 감싸는 공기 하나까지 전부 가늠하여 느끼고 있는 것 같은 화운의 얼굴이 어여뻐 계속 보았다.
그러다 마음이 또 천 길 아래로 떨어지듯 내려앉은 건 화운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바뀌었을 때였다. 처음 느끼는 감각은 아니다. 분명 이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낯설고 아득한. 단지 이전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이 없어 연화운을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낯선 것이라 단순하게 여길 수 없을 만큼 생경한. 연화운은 또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으나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반짝이며 빛이 나는 것도 같았다가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다시 보면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한은 그 얼굴이 싫었다. 단순히 낯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화운은 멀어 보였다. 도무지 저와 같은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꼭 생사의 경계에 있는 어딘가를 떠도는 사람처럼.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사람처럼.
화운이 이한을 돌아보았다. 옅은 가을빛의 눈동자가 선명해지며 자신의 모습을 담자 그제야 만족스러워진 이한이 말을 이었다.
“네가 가끔 처량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느냐.”
“제가 그러했습니까.”
“그래. 지금만 하여도 기껏 함께 산책을 나왔는데 그런 얼굴이나 하고 있으니 여기 궁인들이 멀리서 보면 내가 또 너를 괴롭히고 있는 줄 알겠다.”
이유도 없이 불안하여 무거워진 마음을 감추고 부러 가벼움을 꾸며낸 황제가 말했다. 처량스럽다는 말 같은 걸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었지만 딱히 제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도 없었다.
다행히 화운은 이한의 표현을 꼬집지도, 다시 전의 표정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저를 괴롭히신 적이 없는데 어찌 아이들이 그런 오해를 하겠습니까.”
화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아이들이’라는 단어가 이한의 귓가에 머물렀다. 그토록 친근한 단어를 쓴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것 같은 화운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진심으로 이 정안궁의 궁인들을 그리 여기고 있는 것이다. 틈만 나면 아랫것들을 때리고 모욕하던 과거의 연화운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폐하께서는 저를 괴롭히신 적이 없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또 어떠한가. 이한은 황제의 자리에서 아부하는 자들의 목소리를 누구보다 많이 들어온 사람이었다. 이한은 바라는 것이 있는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황제를 칭송하는 말들은 질리도록 많이 들어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한이 단언컨대, 지금 연화운의 목소리에는 황제의 마음을 삿되게 어지럽히려는 어떤 수작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기도 하지.
연화운이 도무지 제게 원하는 것이 하나 없는 것처럼 그저 온화하게만 구니 어찌하여 그 두 손이 다 차고도 넘치도록 가진 것을 다 주고만 싶어지는 것인지.
“…….”
이한은 말이 없이 화운이 붙들고 있던 팔을 살짝 돌려서는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만들곤 손을 펼쳤다. 어찌 하라 말하지 않았다. 다만 화운이 저의 뜻을 알아주길 바랐다. 강인한 사내의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저는 황제이니 거절당할 일이 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행여나 화운이 내밀어진 제 손을 못 본 척할까 봐 두려웠다.
제게로 겨누어진 형제의 칼끝에서도 결코 두려움을 몰랐던 황제가, 성이한이, 고작해야 한 품도 되지 않는 후궁 하나가 저를 모른 척할까 봐 떨고 있었다.
연화운은 고요한 시선으로 저를 향해 내밀어진 황제의 손을 바라본다. 설마, 하고 혼란스러워하기엔 지나치게 명백한 의도가 화운의 온 감각을 파고들었다.
화운은 두려웠다. 불안했다. 죄책감을 느꼈고 때로는 고통스러웠다.
화운은 악몽을 꾸었다. 이미 죽은 이와, 이미 죽었어야 하는 이가 나오는 꿈이었다.
허나 봄이 가면 여름이 오는 계절의 섭리처럼 연화운의 시간 또한 계절과 함께 흘렀으므로,
화운은 설레었다. 행복했다. 내일을 기대했고 때때로 기다리기도 했다.
화운은 악몽이 지나가고 맞이한 아침에 웃음을 지었다. 저의 곁을 지켜주는 이들과, 저를 다시 보아준 황제가 현실에 존재했다.
그러니 살아가야 한다면. 어찌할 바 없이 살아가야만 한다면.
언젠가 지금에 쌓아가는 업보에 허덕이며 죗값을 받게 되더라도 한 번쯤은 마음 가는 대로 손을 내밀면 아니 되는 것인지.
아주 천천히, 화운의 손끝이 이한의 팔을 쓰다듬듯 움직였다. 이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화운의 손이 저의 손까지 가까워지는 시간이 우습게도 황홀했다. 하여 마침내 두 손이 겹쳐졌을 때는. 이한의 커다란 손이 다시 한 번 화운의 연약한 손을 부드럽게 감싸 꽉 쥐었을 때는 마치 세상이 전부 폭발하듯 거대한 충격이 심장에 전해져서.
하마터면 신음을 흘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낸 이한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말했다.
“좋은 것을 보아라.”
“…….”
“네가 무엇 때문에 이따금 그런 얼굴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너를 힘들게 하는 감정이 밀려오거든 그것이 너를 잠식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고 싸워.”
어느새 이한은 화운의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황제의 자리란 어찌하여도 후궁의 곁에 종일 있어 줄 수는 없는 자리였다. 이한은 제가 없는 곳에서, 더 많은 시간 동안 화운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