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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정말 정안궁으로 간다고 하였느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러하셨습니까. 소인이 또 지나치게 앞서 나갔군요.”
“흠. 안정전으로 가자.”
황후궁이나 다른 후궁의 처소로 향하는 건 아예 안중에도 없는 황제의 모습을 알아채고 있는 건 오로지 오 태감뿐이었으니. 태감은 아직까지 저의 마음을 전부 깨달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황제를 위해 굳이 다른 처소를 청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가마에 오르며 황제가 말했다.
“아침에 날이 밝거든 어제 연빈이 자기 전 내가 보낸 차를 마셨는지 알아 와라.”
“……예, 폐하.”
이한은 찰나에 느껴진 오 태감의 침묵을 모른 척했다. 너무나도 우습고 멍청한 말이라고 스스로도 생각을 하긴 하였으나 당장 정안궁으로 달려가는 일은 참아냈으니 이 정도 이상한 소리는 해도 된다고, 그렇게 위안을 삼는 이한이었다.
“쉿.”
조심스럽게 태후궁의 침실로 들어서던 궁녀는 태후가 누워 있는 침대 앞에 앉아 그의 팔을 가만히 주무르고 있던 황후의 단속에 황급히 움직임을 멈춘다. 황후가 문안을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침대 위의 태후는 이미 잠이 든 것 같았다.
병으로 앓게 된 지 오래인 태후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잠들어 있었다. 황후는 몇 번 더 잠든 태후의 팔을 주무르다 움직임을 멈추곤 태후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느덧 늙고 왜소한 얼굴을 하고 있는 태후는 세상을 손에 쥔 황제의 당당한 어미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지쳐 보였다. 황후는 이불 속에 파묻힌 듯 잠들어 있는 태후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태후는 진정한 승자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황후의 자리에 있을 때 지아비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후궁들의 기세에 모욕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시절 또한 길었으나 어찌 되었든 그의 아들은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오랜 시간을 견디고 견뎌 마침내 유일한 태후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야말로 길고 긴 고난 끝에 승자의 자리에 앉은 여인이었다고, 그리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태후는 불행했다. 황후가 되기 전부터 태후가 된 지금까지 언제나 그랬다. 왜냐하면 그가 간절히 원하던 단 하나의 욕심은 황후가 되는 것이 아니요, 태후가 되는 것 또한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지아비인 황제의 사랑만을 유일하게 원했던 여인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얻을 수만 있다면 황후의 자리를 기꺼이 내놓았을 것이다. 후궁이 되어 황제가 가장 귀애하는 귀비가 될 수 있었다면 기꺼이 정궁의 자리를 내어주고 후궁이 되었을 여인이었다. 만약 누군가 아들을 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대가로 황제의 사랑을 주겠다고 했다면 기꺼이 제 아들조차도 밀어내었을, 그는 그토록 사랑에 약한 인물이었다.
“그것이 무에 그리 대수라고….”
고요하고도 쓸쓸한 태후궁의 침전에 황후, 자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자란은 사실 아주 오랫동안 저의 시어머니에게 묻고 싶었다. 그것이 그리도 대단한 것이냐고. 황후가 되어서도 황제의 연심을 얻는 것이 그토록 절박했느냐고.
물론 황실에서 황제의 총애란 곧 권력을 상징하는 법이었으니 황제를 모시는 모든 여인들은 천자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모든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는 일임을 자란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황자의 비로 그 모든 황실의 파도를 지켜봐왔던 자란이 생각할 때 태후의 가장 큰 패착은 그가 저의 황제를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황제의 총애가 대단하다고 한들 황후와 후궁들 사이에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의 거리가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총애하는 여인이 따로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미쳐 피를 부르는 폭군이 아닌 이상 황후의 집안과, 대신들의 반대와, 황후를 비호할 민심을 모두 무시하고 황후의 자리를 제멋대로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태후는 황제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 하나만으로 세상이 전부 다 자신을 등진 것처럼 절망하고 괴로워했다. 후궁들이 감히 저를 능멸하려 들어도 대거리 한 번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저 주눅이 들었다. 태후의 마음속에 그 자신은 이미 패배자였고, 귀비는 황제의 진심을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그는 혹시라도 귀비를 냉대하였다가 황제에게 더 큰 미움을 받을까 봐 늘 불안해하며 몸을 사렸다.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귀비가 그렇게까지 방자해지기 전에 얼마든지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터인데. 수없이 많은 기회와 손에 가진 힘을 두고도 태후는 그저 버림받은 가련한 여인이 되는 것을 자처했다. 자란은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토록 억눌린 황후의 손에서 오로지 어머니 하나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내세워지던 태자가 얼마나 만만했을까. 누군들 어찌 한번 해볼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물론 귀비와 그의 아들은 천 번을 찢어도 시원치 않을 대역죄인들이었으나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자란은 태후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선택을 이해했다.
자란은 인자하고 자애로운 황후였다. 그는 황제가 어느 후궁의 처소에 머물든 좀처럼 투기하는 일이 없었고 늘 후궁들을 살펴 그들을 자신의 선 안에 품었다. 하지만 자란이 그토록 자애로울 수 있는 건 그들이 황후의 권위를 감히 능멸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궁들이 황후의 뜻을 진심으로 따르고, 언감생심 황후의 자리를 탐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날의 연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가 황후에게 버릇없이 굴어도 황후가 굳이 그를 어찌 강제하지 않았던 건 연빈의 집안의 눈치를 봐서도 아니고, 연빈의 눈치를 봐서는 더더욱 아니었으며, 다만 연빈이 유일하게 욕심내는 것이 황제의 마음 하나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연빈이 아무리 황제의 마음을 갈구해도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황제와 연빈의 사이는 더더욱 멀어지기만 하였으나 설령 연빈이 정말로 황제의 총애를 얻어냈다고 하더라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황제는 제 마음을 내세워 황후의 자리를 어찌할 분이 결코 아니었으니 말이다. 만약 황제가 정말로 사랑에 눈이 멀어 황후의 자리를 뒤바꿀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자란은 그까짓 사랑 놀음에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한참이나 조용히 태후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던 황후는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듣지 못한 듯, 그저 고개를 숙이는 궁녀를 뒤로하고 태후궁을 나서는 황후는 본래 가진 체구를 쉬이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커 보였다.
전각의 앞까지 걸어 나오자 어느새 꽤나 따가워진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태후는 귀하디귀한 황실의 적장자를 낳고서도 평생을 불안함에 떨며 결국 불행한 여인의 자리를 자처했다. 자란에게는 아직 소생이 없었고 때때로 어떤 이들은 그것을 두고 불안을 이야기 하였다. 하지만 이대로 영영 제 배로 후사를 품지 못한다고 하여도 결코 불행한 여인이 될 생각은 없는 자란은 태후궁을 돌아보지 않은 채 앞을 향해 걸었다.
어느 황후는 모든 것을 다 손에 쥐고도 평생에 사랑 하나를 얻지 못하여 불행하였으나, 자란은 제가 가고자 하는 길에 사랑 같은 건 조금도 필요치 않은 여인이었다.
“대인께서 연빈마마를 한번 만나 보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주원이 황궁에서 돌아온 후 내내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눈치를 보던 숙진이 급기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며칠 전 자수를 놓다가 바늘에 손을 찔린 밤 이후 숙진은 내도록 불안한 마음을 어찌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숙진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주원이 대답했다.
“오늘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연빈마마의 상처는 잘 아물고 있고, 아직까지 고통이 있기는 하나 태의원에서도 최선을 다해 마마를 돌보고 있다고 하셨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
“이전과는 다르게 폐하께서도 이번에는 무척이나 마음을 쓰시고 있는 것 같더이다.”
주원은 오늘 조회가 끝난 후 자신을 불러 세워 친히 연빈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 주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황제는 마치 주원이 정말 장인어른이라도 되는 것처럼 죄책감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연빈이 아팠던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건만 황제가 이토록 염려가 담긴 표정으로 말을 한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던 기분이 떠올랐다. 주원은 요즘 놀라고 당황스러운 일이 많았다. 숙진이 말을 이었다.
“허나 대인, 저는 아무래도 마음이 불안합니다.”
“폐하께서 잘 챙겨 주고 계신데 뭐가 불안하단 말이오.”
“기르던 강아지도 제 눈앞에서 아파 시름시름하면 보기 싫으니 갖다 버리라고 하던 아이입니다.”
“…….”
“그런 아이가 숙비마마를 위해 대신 다쳤다고 하질 않습니까. 대인, 정녕 대인은 이것이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주원은 무어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제 아들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 순간부터 주원 역시 줄곧 해왔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애틋하게 연모하는 황제 폐하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 하여도 믿기 어려울 판국이다. 헌데 황제도 아니고 평소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숙비를 위해 제 몸에 상처가 나는 일까지 감수하였다니. 두 눈으로 직접 보았어도 믿기 힘들었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