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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일을 다 마치고 온 것이 아니라….”
“아…….”
“정무를 다 끝마치고 오자면 너무 늦은 밤이 될 것 같아 잠시 먼저 들른 것이다.”
행여나 몸도 안 좋은 이가 저를 기다리다 먼저 잠들어버릴까 봐 황제가 얼마나 조바심을 내며 초조하게 굴었는지에 대해서 오 태감은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이한의 말을 들은 화운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허면 어서 돌아가 보셔야지요.”
“…그래. 너는 이만 푹 쉬어라.”
돌아가시라 말을 하면서도 화운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하고, 가 보겠다는 황제의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모른다. 서로 별달리 나누는 말이 없는데도 그러했다. 보다 못한 오 태감이 다시 한 번 ‘폐하.’ 하고 얄미운 목소리를 내고 나서야 이한은 가까스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한의 만류에도 덩달아 몸을 일으킨 화운이 말했다.
“정무를 보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폐하. 항상 옥체를 가장 먼저 생각하시옵소서.”
“그래. 그러마. 내 걱정은 말고 너야말로 몸을 잘 챙기고 있거라. …내일 다시 올 테니.”
내일 다시 올 테니. 그 말이 화운에게는 또다시 거대한 울림이 되어서. 제게 어울리지 않는 말인 줄을 알면서도 화운이 대답했다.
“하오면… 폐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단 한 번도 기다림을 서로 주고받았던 적이 없는 두 사람이 그리 서로를 향해 말했다. 어느새 새롭게 다가온 계절의 바람이 정안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황제를 따라 정안궁을 나서 청건전으로 돌아가던 오 태감의 시선이 저만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황제의 가마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한 사내에게 머물렀다. 숙이고 있어 얼굴이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물론 오 태감은 황궁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이였으니 눈에 익은 시위가 있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음….”
오 태감은 이내 그 얼굴을 기억해냈다. 연빈마마께서 연못에 빠졌을 때 그를 구하고 죽은 시위의 시신을 수습해 갔던 친우라던 자였다. 당시 황제는 그 시위의 죽음을 크게 안타까워하시며 일가친척 하나 없는 이의 시신을 챙긴 친우에게 장례비를 챙겨 주었는데, 그때 장례비를 직접 전달해 준 이가 바로 오 태감이었다.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태감이 직접 움직였다는 건 그만큼 황제께서 그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민간에서 뽑아 올린 일개 시위를 위해 오 태감을 직접 보낸 건 정말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어가가 그를 지나치기 시작하자 오 태감의 고개가 살짝 그를 따라 뒤로 돌아갔다. 어쨌든 그러한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자체는 특별할 게 없는 시위들 중 한 명이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그에게 시선이 머무는 건 지금 이 길이 정안궁에서 나선 길이기 때문인 건지.
오늘날 연빈의 변화는 모조리 그 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날 연빈이 물에 빠지고, 어느 시위가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 대신 목숨을 잃고 난 후 연빈은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달라진 연빈의 모습은 그와 관련이 있는 황궁의 모든 이들과의 관계를 변화시켰고 급기야는 연빈이라면 치를 떨며 경멸하던 황제의 마음까지도 변화시키고 있다.
크게 본다면 나쁠 게 하나 없는 일이다. 연빈은 내명부의 유일한 문젯거리나 다름이 없었다. 그 하나 때문에 고통 받는 궁인들이 너무나도 많았으며 황제마저도 그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일이 벌어지곤 했으니 무엇을 고려해 보아도 그 일로 인해 연빈이 변한 것은 지극히 다행이고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이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아마도 그를 소중하게 여겼을 친우는 여기에 남아 제 친우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이를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누구도 그 일을 의도하지 않았고, 세상만사가 본래 모든 이에게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라지만 오늘따라 무릎을 꿇고 앉은 이름 모를 시위의 굽은 등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건 그저 어둠이 내려앉은 밤의 기분 탓이런가.
“어찌 그러느냐.”
그사이 멈칫거리는 오 태감의 기색을 눈치챈 이한이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오 태감은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
어찌 되었든 오 태감은 오로지 천자를 섬기며 살아가는 이였으니 폐하께 좋은 일이라면 다른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을 터. 이 드넓은 황궁에 안타까운 삶이 어디 그 하나뿐일까. 오 태감은 괜한 상념을 서둘러 거두고 그저 앞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에 집중했다. 삶이란 늘 그렇듯이 지극히 불공평한 것이었다.
늦은 밤, 정안궁의 순찰을 돌던 서천의 발걸음이 문득 멈추어 섰다. 옆에서 함께 걷던 동료가 의아한 얼굴로 같이 멈춰서 서천을 바라본다. 서천은 가만히 서서 쳐다보고 있는 곳은 정안궁의 연못이었다.
“왜?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아니. 그냥….”
동료의 물음에 대충 말을 얼버무리면서도 서천의 시선은 그곳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하운이 죽었다던 정안궁의 연못을 서천은 오늘 처음 보았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하운의 시체를 거둔 것은 서천이었다. 그건 다시 말해, 하운의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이 서천이었다는 말이다. 늘 단정하고 깨끗하던 얼굴에 어떠한 상처가 있었는지, 서천을 비롯해 모두에게 따뜻한 온기를 건네주던 그의 몸이 얼마나 차갑고 딱딱했는지, 그것은 오로지 이미 숨이 끊어진 몸을 품 안에 끌어안고 울음을 멈추지 못했던 서천만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하운이 그리 한순간에 비명횡사한 연못의 앞에서 서천이 평정심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서…!”
그제야 이 연못에서 벌어진 일이 기억났는지 동료가 잠시 목소리를 높였다가 곧 서천의 눈치를 보며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지냈던 방은 하운이 있던 곳과 떨어져 있어 그다지 교류가 깊지는 않았으나 서천이 하운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는 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서천이 처음 정안궁으로 옮겨올 때 도명이 놈이 저에게 당부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 녀석이 여전히 하운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으니 행여나 정안궁에서 허튼짓거리를 하지 않도록 잘 좀 살펴달라는 말이었다.
“이러다 늦는다. 이만 가자!”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동료는 짐짓 모른 척 서천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행히 서천은 별다른 반항 없이 그대로 가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하지만 서천은 저와는 하나 상관도 없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연못에 뛰어들었던 하운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몇 번이나 뒤를 돌아 그곳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오진성.”
새벽이 다 되어서야 청건전을 나선 황제가 걸음을 옮기다 말고 입을 열었다. 오 태감이 곧바로 예, 하고 대답을 해왔지만 황제는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달빛이 내려앉은 청건전의 뜰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가 말했다.
“연빈은 잠들었겠지.”
사실 묻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당연한 일이었다. 환자가 이 시간까지 잠들지 않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또 문제였다. 하여 오 태감은 황제의 이 물음이 어떠한 대답을 바라고 하신 물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지금 연빈이 정말로 잠들었는지 잠들지 않았는지 같은 것이 궁금한 게 아니었다. 지금 황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분명히 따로 있을 터였다.
“…지금 찾아가면 분명 방해가 될 테지.”
바로 이러한 마음처럼.
이한은 불과 몇 시간 전에 화운을 보고 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정녕 무언가에 홀려 시간이 허투루 사라진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연화운을 본 것이 이토록 억만년 전은 되는 것처럼 낯설 리가 없었다.
가마로 향하는 황제의 발걸음이 몇 번이나 망설여 느려졌다. 정안궁으로 가자 하고 싶은데. 그리 말을 하고 싶은데. 이 시간에 굳이 그곳으로 향할 만한,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괜히 마음이 답답했다. 급기야는 연화운이 이미 잠들었을 테니 조용히 가 잠든 얼굴만이라도 보고 오면 어떻겠나, 그러한 생각까지 떠오르는 자신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폐하.”
그런 황제의 앞에 나선 것은 늘 그렇듯 오 태감이었다.
“물론 폐하의 걸음을 감히 마다할 이가 어디 있겠냐만, 폐하께서 가시면 아무리 조용히 드신다고 하여도 정안궁은 소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라도 연빈마마께서 약을 드시고 겨우 잠이 드셨다면 필시 방해를 받지 않으시겠는지요.”
“…….”
“게다가 폐하께서도 근래 너무나도 잠이 부족하셨습니다. 이러다 옥체라도 상하시면 소인이 죽어도 그 죄를 다 갚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쉬시고 내일 연빈마마께서 깨어있으실 때 걸음 하신다면 더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구구절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나 이한 역시 화운의 밤을 방해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기에 이 시간에 굳이 정안궁으로 갈 이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았다.
다만 이한은 그저 아쉬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짧게라도 화운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은 것뿐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