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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89)화 (89/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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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또 한 걸음. 천천히 눈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걸었다. 이한의 발밑에 닿는 돌과, 뜰 이곳저곳을 채우고 있는 화단과 꽃과 나무들 하나하나가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웠다. 정안궁이 이토록 아름다운 궁인 것을, 이한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실감하지 못했었다.

“…….”

황제의 걸음이 다시 한 번 멈춘 것은 길의 끝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을 때였다. 노을빛이 길게 늘어진 아름다운 궁의 끝에, 그 무엇보다 가장 낯설고 새로운 연화운이 서 있다.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한 번 내딛자 바닥이 거대한 진동을 내며 울었다. 온 궁이, 온 세상이 쿵쿵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은 세계가 아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을 만들어내는 건 오로지 이한의 심장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오로지 연화운을 볼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연화운의 앞에서만, 이한은 저의 심장이 자꾸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하면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이 심장박동의 주인이 연화운이란 말인가. 연화운이 정녕 황제의 심장을 틀어쥐어 멋대로 날뛰게 만드는 이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아무리 부정하고 또 부정해도 흔들리는 길을 걸어 그의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은 막을 수가 없었으니.

“몸도 좋지 않으면서 어찌 나와 있단 말이냐.”

마침내 바로 앞까지 다가선 황제를 향해 인사를 올리려는 화운의 팔을 서둘러 잡아 몸을 굽히지 못하게 막은 이한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설렘을 다 감추지 못한 음성으로 말했다.

인사를 올리지 못해 당황한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화운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한은 생각했다.

모든 것은 여전히 답을 알 수가 없다. 어째서 오늘 하루는 하염없이 시간이 느리기만 하였는지. 어찌하여 결국 밤이 무르익을 때까지 참지 못하고 해조차 채 떨어지지 않은 시간에 다급하게 예까지 와버린 건지. 정안궁은 어째서 이다지도 낯설게만 보이며 어째서, 연화운을 보면 자꾸만 심장이 뛰어대는지. 이한은 여전히 그 이유 같은 건 하나도 알 수가 없다고 여겼다.

그리 답을 구하지 않고 외면하면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으니.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몸을 굽히지는 못해도 꿋꿋하게 인사를 올리는 연화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이한은 그렇게 깊어지는 생각을 멈추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저 다친 화운이 건강해지도록 챙기는 것뿐이었다.


“오늘은 얼굴이 조금 나아 보이는구나.”

일찍 아진과 부산을 떨어댄 보람이 있는지 손수 화운을 부축하여 다시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힌 이한이 가만히 그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가능한 자연스러워 보였으면 싶어 신경을 썼는데 다행이었다. 화운은 입가에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내가 보낸 차는 잘 받았느냐?”

그러자 황제가 제가 보낸 선물을 얼른 칭찬 받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그 물음에 오늘 낮에 느꼈던 과분한 설렘과 행복이 또다시 떠올라 숨을 짧게 참았다 뱉은 화운이 입을 열었다.

“예, 폐하. 향이 어찌나 좋던지… 폐하의 성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네게 감사하다는 말이나 듣자고 보낸 것이 아니다.”

“…….”

“네가 덜 아프고, 어서 나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낸 것이지.”

흠. 흠흠. 이한은 그 짧은 말을 하면서도 몇 번이나 중간에 헛기침을 섞었다. 허튼소리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민망하고 얼굴에 열이 올라 화운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황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애꿎은 옷자락만 손가락으로 연신 조물거리며 화운이 대답했다.

“어서… 어서 낫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자기 전에 꼭 내려 마시고.”

“예, 폐하.”

귀하고 아까워 도무지 마실 수가 없을 것 같은 속내를 숨기고 화운이 말했다. 폐하께 처음으로 받은 선물인데 그것을 제가 전부 마셔 사라지게 만드는 건 너무 아까운 것 같았지만 황제의 앞에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허나 화운과는 전혀 다른 걱정에 사로잡혀 있던 이한은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주지 말고 너만 먹어라.”

생각지도 못한 말에 화운이 다소 놀란 얼굴로 시선을 들어 황제를 바라보려니 이한이 꽤나 진지한 얼굴을 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귀한 것이니 누가 놀러왔다고 막 내어주지 말고 너만 먹으라는 말이다.”

화운은 사실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정안궁에는 폐하를 제외하고는 드나들 이도 별로 없었다. 지난번 정빈이 한 번 놀러오긴 하였으나 화운은 그런 일이 앞으로도 자주 벌어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숙비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에 찾아왔던 건 그날의 일로 자신이 다쳤기 때문이지 딱히 숙비와 친분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정안궁으로 와서 차를 마실 만한 사람은 대부분 황제일 거고 그마저도 화운의 몸이 다 낫고 나면 자주 있을 일도 아닐 텐데 어째서 폐하께서는 저런 말을 하시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알겠느냐? 내가 너를 위해 준 것이니 너만 마시거라, 꼭.”

“예, 폐하.”

어쨌든 폐하께서 거듭 당부를 하시니 영문은 몰라도 대답을 하는 화운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 이한은 지난번 정안궁에서 정빈을 마주쳤던 일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한이 생각할 때 그 일은 너무나도 빤했다. 누구라도 정안궁에 놀러오면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은 죄다 꺼내어 대접을 할 테니 그것이 황제가 하사한 최고급 차라고 한다면 지금 저 성격에 분명히 제일 먼저 내오라 할 것이 뻔해 보였다.

몇 번이나 화운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만족하여 배부른 고양이 같은 얼굴로 화운을 바라보던 이한의 시선이 화운의 입술에 덜컥 멈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단순히 어제보다 안색이 나아 보여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입술에 붉은 기운이 덧그려진 것 같아 이한은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리며 그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치장을 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발끝이 오싹했다. 다친 주제에. 그토록 큰 상처를 입고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 굳이 치장을 하였다. 왜일까. 어째서일까. 이유를 파고들자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황제라도 단 한 가지의 결론밖에 낼 수가 없다.

자신이 온다고 하여서. 밤에, 자신이 그를 보러 가겠다고 하여서. 그래서 연화운은 굳이 아픈 몸을 이끌고 치장을 한 것이다. 오로지 자신에게 보이기 위해.

당연한 일이었다. 후궁이 되어 황제가 온다고 하면 성심성의껏 치장을 하여 황제를 맞이하는 건 법도이기도 하니 하나 특별할 게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한은 저를 위해 머리를 빗고 연하지만 입술에 색을 입혔을 화운을 상상하면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주책없는 심경을 애써 참아내며 이한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태연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종일 누워만 있으려니 그것도 곤욕이겠구나.”

“…사실 조금 그러합니다. 하여 내일부터는 몸 상태가 괜찮으면 정안궁에서라도 짧게나마 산책을 해볼까 합니다.”

“벌써? 너무 이르지 않으냐.”

“그저 몇 걸음 걷는 정도이니 괜찮을 것입니다.”

굳이 세세하게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는데 이리 황제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건 화운에게는 여전히 다소 어색한 일이라 저도 모르게 솔직한 말이 튀어나갔다. 화운의 말을 들은 이한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리고 말이 없더니 이내 무언가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허면 우선 태의에게 물어보고, 조금 걷는 것쯤은 괜찮다고 하면.”

갑자기 말을 끊는 이한의 모습에 화운이 가만히 말을 기다리자 이윽고 비장한 표정을 한 이한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내일… 나와 함께 정안궁을 산책해 보도록 하자.”

“폐하와요?”

“왜. 싫으냐?”

화운으로서는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믿기가 힘들어 반사적으로 되물은 것이나, 이한은 혹시나 화운이 저와 함께 걷는 것이 싫어 저리 놀란 건 아닌가 싶어 절로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싫으냐 묻는 황제의 목소리에 화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그럴 리가요. 다만 폐하께오선 바쁘신데….”

“내일도 오늘처럼 저녁에 올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혼자 걷겠다고 나가서 괜히 더 다치지 말고.”

“…예, 폐하.”

애써 차분하게 대답하려 해보아도 목소리에는 감추기 힘든 기쁨이 담겨 있는 것 같아 화운은 짧은 대답 후 서둘러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긴장을 풀면 바보같이 헤실거리며 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저 한 번 다친 것으로 이토록 호사를 누려도 되는가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벌써부터 내일 밤이 기다려지는 기분이었다.

“폐하.”

그때, 침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 태감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며 이한을 불렀다. 동시에 이한이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이 되어 오 태감을 노려보았다. 사실 오 태감이 어째서 들어온 건지 이한 역시 이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속으로는 부아가 났어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아니라 이한은 곧장 체념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 태감에게 굳이 대답을 하지 않은 이한이 그대로 다시 화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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