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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88)화 (88/167)

88

“기뻐하더냐.”

이한이 내관에게 물었다. 지금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이는 정안궁으로 차를 들고 갔던 내관이었다. 조금 전까지 대신들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들여다보던 장계를 손에서 놓은 채로, 황제는 다소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관이 고개를 숙여 답했다.

“예, 폐하. 크게 티를 내신 것은 아니었으나 폐하께서 주신 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시며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연빈마마가 큰일을 당하신 이후로 폐하께서 정안궁으로 선물을 보내신 건 처음이니 오죽 기쁘셨겠습니까.”

내관의 말을 받아 덧붙여 말을 꺼낸 건 곁에 서 있던 오 태감이다. 이한의 입꼬리가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씰룩씰룩 움직였다.

“그리고. 그리고 또 무어라 하였느냐.”

어디 입꼬리뿐인가. 답지 않게 들썩이는 엉덩이는 당장이라도 정안궁으로 튀어나가고 싶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황제의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심각하게 경박한 황제의 모습에 오 태감은 차라리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내관이 대답했다.

“그리고 마마께서 전하시길, 폐하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뭐?”

반사적으로 되물은 이한의 몸이 덜컥, 하고 멈추었다. 내관이 다시 말했다.

“폐하를 기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뭐라고?”

“연빈마마께서는 폐하가 오시기를 기다리겠다고… 그리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두 번이나 되물은 것도 모자랐는지 또다시 입을 열려 하는 황제에 한발 앞서 오 태감이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연빈마마께서 폐하께서 오시기를 몹시도 기다리고 계신 듯합니다.”

오 태감이야 그간 너무나도 달라진 이한의 모습을 빠짐없이 보아왔으나 일개 내관의 앞에서 굳이 솔직한 모습을 전부 다 보일 필요는 없는 일이다. 오 태감이 그리 끼어들고 나서야 이한은 자신이 멍청이처럼 계속 말을 되묻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흠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알았다. 이만 물러가라.”

말을 하는데 웃음이 자꾸만 삐죽삐죽 흘러나오려 했다. 눈이며 입이며 얼굴 근육이 온통 통제를 벗어난 것만 같았다.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가는 내관을 바라보다가 이한은 이내 두 손을 들어 저의 얼굴을 가려버린다. 애써 꽉 다문 입술 새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연빈이 나를 기다린단다.”

얼굴을 몇 번이나 쓱쓱 위아래로 문질러대던 이한이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오 태감을 보며 말했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목소리였다.

저만 보면 몸을 웅크리고 물러서기 바빴던 연화운이. 제가 찾아가기만 하면 매번 왜 왔냐, 그리 물어 이한을 섭섭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다는구나.”

저에게 마음이라고는 단 한 자락도 내어주지 않을 사람처럼 딱딱하게 굴던 이가 그 입으로 저를 기다리겠다고 했단다. 그것이 어찌나 사람의 마음을 벅차오르게 만드는지. 이한은 오 태감에게 아주 우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 기분을 누구에게라도 표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오 태감이 허리를 굽히며 말을 받았다.

“예, 폐하. 정안궁은 폐하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황제의 시선이 저만치 야속하게도 밝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영영 저물지 않을 것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며 이한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밤은 언제 되느냔 말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너무나도 긴 하루가 될 모양이었다.


“너무 아파 보이지는 않느냐?”

면경에 부지런히 저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화운이 말했다. 아진이 화운의 머리카락을 의미 없이 다시 한 번 빗어 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주 아름다우세요, 마마.”

화운은 오늘 마음이 왠지 분주했다. 폐하께서 오신다고 한 밤은 아주 오지 않을 것처럼 더딘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부산스러워 뭔가에 바삐 쫓기는 것만 같았다.

생전 먼저 들여다본 일이 없던 면경을 달라 하여 침대에서 저의 얼굴을 가만히 비춰 보려니 안색은 물론이고 입술까지 파리하여 당장에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상처의 통증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자꾸만 깨문 탓인지 입술은 색뿐만이 아니라 모양새도 마치 환자의 그것처럼 거칠기 그지없다.

이러한 모습으로 폐하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꼴 같지 않은 행태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면서도 화운은 폐하께서 오셨을 때 조금이라도 건강해 보이는 모습으로 그분을 맞이하고 싶었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서라고 변명을 해보아도. 이깟 상처에도 마음을 쓰시는 분이시니 아픈 모습으로 괜한 염려를 더해드리고 싶지 않다고 핑계를 대 보아도 스스로의 마음까지 전부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화운은 자신의 모습이 폐하께서 보시기에 조금이라도 보기 좋은 모습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외형에 신경을 써 본 적이 없는 화운으로서는 당황스러운 감정이었다.

파리한 얼굴에 생기를 주고 싶어 뺨과 입술에 붉은 기를 더하자 꼭 죽은 사람처럼 보이던 몰골은 다소간 나아졌으나 화운은 무엇이 그리도 불안한지 연신 면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화운은 또 작게 한숨을 내쉰다. 제 얼굴도 아닌 것을 두고 이리저리 비춰 보며 신경을 쓰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뻔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저에게는 그저 과분하게 아름다운 얼굴이건만 애초에 제 것이었던 것처럼 굴고 있는 모습이 우습기 그지없다.

“마마, 정말이에요. 마마께서는 워낙에 피부가 희시니 다소 창백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많이 회복되신 듯 보여요. 폐하께서도 걱정을 한시름 놓으실 수 있을 거예요.”

순간 어두워진 화운의 표정을 다르게 해석한 아진이 말을 덧붙였다. 화운은 그제야 아진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어디에 말하지도 못할 상념일진데 아진에게까지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

“폐하께서 주신 차는 잘 두었니?”

이어진 화운의 물음에 아진은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차를 잘 두었느냐고. 잘 보관해 두었느냐고. 폐하께서 주신 것이니 아주 잘 관리를 하여야 한다고. 화운은 벌써 몇 번째 그런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까는 한참을 그저 찻잎 조각들을 바라보고만 있으시기에 ‘끓여드릴까요.’ 하고 물었는데 아까워 죽겠다는 얼굴로 귀한 것이니 잘 놓아두라고만 대답을 하시더니 이후로는 내도록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다.

대놓고 좋다는 말씀을 하시지만 않았지 폐하께서 주신 선물에 제 주인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가 전부 다 보이는 것만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아진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마마. 아이들에게도 각별히 조심해서 잘 보관해 두라 단단히 일렀어요. 저도 매일 꼼꼼하게 확인할게요.”

“아니, 뭐…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무슨 말씀이셔요. 무려 폐하께서 마마를 위해 보내 주신 건데요. 제가 정말로, 정말로 신경 쓸 테니 걱정 마세요.”

말로는 그리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반복하여 다짐하는 아진의 말에 화운은 안심한 표정을 했다. 우리 마마께오서 이리 날이 갈수록 사랑스러워지셔서 어찌하나. 그 순간 아진이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을 화운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시간이 어찌 이리 안 가는지….”

잠시 찾아온 침묵 끝에 화운이 혼잣말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주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창밖은 아직도 어스름할 뿐, 계절 따라 부쩍 길어진 해는 여전히 하늘에 걸려 있다. 해가 빨리 저물든 늦게 저물든 흘러가는 시간이야 달라질 것이 없건만 오늘따라 길어진 해마저도 괜히 야속하여 화운이 그리 중얼거렸을 때.

다급한 걸음으로 뛰어 들어온 궁녀 하나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마! 폐하께서 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아직 밤이라고 하기엔 한참이나 밝은데. 벌써 오실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화운의 얼굴에 순식간에 맑은 미소가 어렸다. 걸음이 느리던 해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던 심장이 쿵, 쿵, 다시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한은 그 앞에 잠시 멈추어 서서 중문 안쪽으로 보이는 정안궁의 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당연히 처음이 아니다. 화운이 달라지겠다고 선포하고 나서도 이한은 몇 번이나 이 길을 지나쳐 정안궁을 드나들었다. 그러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드나들었던 이곳이, 이 길이, 오늘에 와서 또 새삼스럽게 낯설어 보이니.

월궁으로 가는 길을 걷는 것 같았던 어느 밤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찾아와 화운의 앞에서 멍청한 소리만 늘어놓다가 도망치듯 정안궁을 벗어났던 밤의 기억이다. 제멋대로 구는 황제의 모습에 당황하고 불쾌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 날의 연화운은 오히려 그를 두고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닌가 걱정을 하여 이한의 마음을 더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일이다. 어떻게 따져 보아도 오래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한은 그날이 마치 아주 오래전처럼 아득하게 느껴져 괜스레 아련히 코끝이 찡해졌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감정인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리 멀지도 않았던 날들이 사이에 무엇이 이리도 많이 변했기에 오늘의 자신은 이토록 낯설고 생경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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