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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나 다친 상태의 화운이 마시면 안 그래도 약한 몸에 안 좋은 영향이라도 갈까 조심하는 황제의 마음을 가늠해 보며 오 태감이 다시 허리를 굽혔다.
“예, 폐하.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 폐하.”
“저녁에… 들르겠다고… 그리 전해라.”
낮은 목소리로 덧붙이는 말에는 미미한 설렘이 있다. 하루하루 그저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기만 하던 황제로서는 낯선 감정이었다. 미미하게 씰룩이는 입꼬리를 누구에게 들킬까 재빨리 갈무리한 이한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자.”
그리하여 이제야 다소 가벼워진 황제의 목소리에 멈추었던 가마가 다시 움직였고 오 태감의 지시를 받은 내관 하나만이 바쁘게 다른 길을 내달렸다.
“마마, 많이 답답하세요?”
아진은 의자에 앉아 아까부터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는 화운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진의 입장에서는 오래 앉아 있는 것도 혹여나 몸에 무리가 되진 않을까 싶어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하루 종일 방에서 누워 지내는 일 역시 만만한 일은 아닌지라 아진은 그저 화운이 조금이라도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을 수 있게 신경 쓰고 있을 뿐이었다.
아진의 물음에 화운이 기다렸다는 듯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답답해. 산책을 가고 싶은데….”
“안 돼요.”
하지만 아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며칠은 최대한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직은 안 돼요.”
“그럼 내일은?”
하지만 이어진 화운의 물음에는 아진의 단호하고 냉정했던 표정 역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 늘 차분하고 좀처럼 무언가를 먼저 요구하는 일이 없는 화운이 마치 과자를 조르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묻자 갑자기 당장에 수화원으로 화운을 데리고 가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내일… 내일은….”
“내일은 괜찮지 않을까?”
“내일 마마의 몸 상태를 봐서요. 오늘 푹 잘 주무시고 내일 통증이 좀 더 가라앉으면 정안궁의 정원을 천천히 같이 걸어요.”
하마터면 당장 나갈까요? 하고 되물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겨낸 아진이 가까스로 적당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비록 조건부이기는 하였으나 절대로 안 된다는 대답에서는 벗어난 것이 만족스러워진 화운은 시무룩하던 표정을 조금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괜히 우울한 생각에도 잠겨들지 말고 잘 자고 잘 일어나야지, 그런 다짐을 하면서.
“마마,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런 화운의 어깨를 불쑥 긴장하게 만든 건 설레는 표정으로 들어선 서서였다. 순식간에 다소 긴장한 얼굴이 된 화운의 눈동자에 서서의 뒤로 따라 들어오는 내관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화운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연빈마마를 뵈옵니다.”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는 내관의 두 손엔 척 보기에도 매우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일어나라는 화운의 허락이 떨어지자 몸을 일으킨 내관이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상자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서주국에서 들어온 수량차입니다. 자기 전에 마시면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폐하께서 친히 정안궁으로 보내라 하셨습니다.”
내관이 들고 온 것이 차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좀처럼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어 화운이 눈만 깜빡이고 있자니 아진이 내관에게 다가가 그가 들고 온 상자를 받아 들었다. 내관은 말을 이었다.
“이미 태의에게도 보인 것이라 걱정 마시고 드셔도 됩니다. 또한 폐하께서 전하시길….”
“…….”
“오늘 밤에 들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사이 화운의 곁으로 다시 다가온 아진이 상자를 열고 그 안에 담긴 화려한 차 보관함을 열어 화운의 앞에 보여 주었다. 금세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향이 코끝을 스치자 온몸에 따스한 열기가 번져나가는 것 같았다. 화운은 차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이것이 얼마나 좋은 차이고, 고급스러운 차인지 그런 건 아무것도 몰랐으나 폐하께서 저를 생각하시어 정안궁으로 선물을 보내셨다니 그 사실이 차마 믿기지 않아 마음이 들떴다.
“폐하께 감사하다고 전해드려라. 그리고….”
몇 번이나 숨을 들이켜 차향을 들이마시고 또 마셔 보던 화운이 겨우 입을 열어 내관에게 말했다. 무슨 말을 덧붙이려는지 그리고, 그리고, 몇 번이나 망설이는 말을 가만히 기다리던 내관의 귓가에 이윽고 화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가… 기다리겠다고… 그리 말씀을 드려다오.”
기다림을 몰랐던 날들이 있었다. 폐하께서 정안궁을 찾으실 일은 영영 없을 테니 폐하께서 오시는 일도, 이리 선물을 보내시는 일도, 그분과 다정한 담소 한 마디를 나누는 일조차도 화운은 무엇 하나 기다리지 않았다. 하운이었을 때는 물을 것도 없다. 하운은 그저 폐하와 한 황궁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과분한 일이라 여겨 오다가다 스치듯 마주치길 바란 날조차 흔하지 않았다.
허나 오늘 화운은 폐하를 기다릴 것이다. 제게 어떤 잘못을 물으러 오시는 걸까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은 채, 폐하께서 친히 하사해 주신 차의 향을 음미하며, 화운은 저를 만나러 올 황제를 기다릴 터다. 몇 번이나 거듭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선물을 전하였던 내관이 돌아가고, 화운은 아진에게서 차를 받아 들고선 다시 한 번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청아하고 깊은 향이 곧바로 폐부를 가득 채워왔다. 아픈 몸으로 방에 있느라 답답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나아졌다.
해는 언제 지려나. 밤이 오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하려나. 중천에서 타오르는 태양이 못내 아쉽고 야속하여 화운은 내내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정안궁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식에 숙비, 비영은 법도도 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선 채로 정안궁의 궁녀를 맞이했다. 궁녀가 채 무릎을 다 꿇기도 전에 서둘러 그를 일어나게 한 비영이 초조한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빈은… 연빈은 어떠하냐. 이제 내가 정안궁으로 찾아가도 되는 것이냐?”
“마마, 태의가 이르길 아직까지는 무리하지 말고 최대한 움직임을 줄여 정양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저희 마마께서는 숙비마마께서 불편하게 여기실까 당장이라도 뵙고 싶어 하셨지만, 폐하의 명으로 마마의 회복에만 전념을 다하고 있는 정안궁은 그런 연빈마마의 뜻을 말릴 수밖에 없었던 점 부디 헤아려 주시길 부탁드리옵니다.”
“…그래. 몸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당연히 이해한다.”
“오늘 소인이 이리 찾아온 이유는 당장 숙비마마를 만나지 못하는 것을 마음에 걸려하시는 연빈마마께서 짧게나마 안부를 전하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연빈마마께서는 큰 문제없이 몸을 회복하고 있고, 외출이 허락되는 대로 숙비마마를 찾아뵙겠다고 하였습니다.”
궁녀의 전언에 비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본래 법도대로라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 연빈이 회복하였다고 운화궁에 사람을 보내 숙비가 정안궁으로 걸음하도록 유도하는 건 분명히 옳지 않았고, 따지자면 연빈이 회복 후 운화궁으로 찾아오겠다 하는 말은 도리에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연빈은 숙비를 대신하여 다쳤다. 그것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운 숙비를 감싸다가. 아무리 황궁 안의 법도가 지엄하다고는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움직여 운화궁을 찾겠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비영이 더더욱 침잠하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을 때, 궁녀가 말을 이었다.
“또한 연빈마마께서 이 말씀을 꼭 전하라 하셨습니다.”
“무슨….”
“저는 정말로 괜찮고, 이 일에 숙비마마의 잘못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으니 부디 괜한 걱정으로 밤을 어렵게 하지 마시라고.”
“…….”
“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지난밤 비영은 악몽을 꾸었다. 잠이 들면 거대한 새가 비영을 향해 날아왔고 연빈은 그런 비영을 감싸 안으며 대신 피를 흘렸다. 그럼 비영은 놀라 잠에서 깼고 다시 잠들면 비영의 두 손은 연빈이 흘린 피로 젖어 있었다.
“밤을 어렵게 하지 말라….”
비영은 거기에 가만히 서서 연빈이 전하였다는 그 말을 다시 한 번 읊조렸다가 이내 궁녀를 향해 말했다.
“연빈의 뜻은 내 잘 알았다. 하여도 다친 이를 오라 가라 할 순 없으니 몸이 나아지면 그저 운화궁으로 기별만 해 달라 전해 주어라. 그리하면 내가 정안궁으로 갈 터이니.”
“…….”
“지금 너희가 연빈을 위해 그의 걸음을 막고 있듯, 그때에도 반드시 그리해 주어야 할 것이다.”
“예, 숙비마마. 감사합니다.”
궁녀는 행여나 숙비가 정안궁에 다녀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주인이 바로 운화궁으로 오질 않은 것을 두고 혹시라도 숙비가 방자하다 탓을 할까 걱정을 하였던 모양인지 인사를 올리고 돌아가는 얼굴이 한결 가벼웠다. 그리고 궁녀가 돌아나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비영은 생각했다.
비영이 겪고 있는 밤을 염려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과연 꾸며낸다고 꾸며질 수가 있는 것일까. 단 한 번도 다정을 흉내조차 내본 적이 없는 이가 이토록 섬세하게 타인에게 마음을 쓰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비영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진이 빠진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령 그 마음이 전부 다 진심이 아니라고 한들 비영이 연빈, 연화운에게 큰 빚을 진 건 부정할 수가 없는 일이니 비영은 더 이상 연빈의 마음을 멋대로 가늠하여 의심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하였다.
다만, 다시 연빈을 마주하면 과연 어떠한 말들로 제가 느낀 감정을, 미안함을 표현해야 할까.
그것을 고민하는 비영의 얼굴이 또다시 깊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