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86)화 (86/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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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에 닿아오던 조금은 뜨겁고 부드럽던 살결의 감각을 되새기려니 자꾸만 입꼬리가 제멋대로 날뛰려 들었다.

아랫배에서 묵직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도 같았다가, 등골이 오싹한 기분도 들었다가. 당장에라도 정안궁으로 달려가고 싶은 기분이 들어다가, 이대로 두 번 다시는 연화운을 보지 않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가.

1초에도 열두 번씩 날뛰는 이런 감정을 이한은 이미 밤이 다 새도록 겪고 또 겪었건만, 이제는 털어냈다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연화운의 이름을 듣자마자 다시 감정이 이리 날뛰고 있다. 도대체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감도 잡히지 않을 지경이다.

“폐하…?”

그대로 생각에 잠겨 더 말이 없는 이한의 상념을 일깨운 건 그런 이한을 바라보며 홀로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내린 황후였다. 그제야 화들짝 놀라 소년처럼 어리숙한 얼굴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에게 자란이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황후의 그 질문에 차마 연화운의 이름을 말할 수 없던 이한은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아저씨. 형아는 언제 와요?”

객잔의 주인아저씨에게 받은 만두 꾸러미를 품에 꼬옥 안은 어린 사내아이가 간절한 얼굴로 사내를 올려다보며 시무룩하게 물었다. 벌써 몇 명째, 객잔 앞으로 찾아온 아이들에게 만두를 포장해 준 객잔의 주인, 영사문은 그런 아이를 향해 무심하게 대답한다.

“황궁에서 예까지 뭐 옆집 놀러가듯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줄 아느냐?”

“그래두… 하운 형아 보고 싶은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너희 챙겨 준다고 황궁에 가서까지 돈을 보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고 잘 먹고 있어. 황궁 생활에 잘 적응하고 후에 휴가를 얻게 되면 놀러 오겠다고 하였으니 내게 그만 보채고.”

“네에…. 혹시라도 형아가 오면 꼬옥 저를 만나고 가야 한다고 전해 주셔야 해요. 아셨죠?”

“글쎄, 알았대두.”

아이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휘 젓는 사문이 영 못 미덥다는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저만치 저들이 생활하는 골목의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객잔 안으로 들어온 사문은 한참 사람이 밀려왔다가 이제야 조금 한산해진 객잔 안을 가만히 바라보며 저 아이들에게 줄 만두 값을 매달 전해오고 있는 하운에 대해 생각했다.

무술을 좀 한다 하면 으스대기부터 하는 보통의 사내들에 비해 조용하고 얌전한 것이 마음에 들어 먹이고 재우며 일을 시켰다. 때때로 객잔 안에서 다툼이 벌어지거나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이들이 있으면 나서서 제압을 하면서도 그는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거나 누군가를 향해 욕설을 하는 일이 없었다. 시키는 건 두말없이 무엇이든 열심히 했고, 또 무엇이든 잘해내기도 했던 하운은 객잔에서 일하는 이들 중 사문이 가장 아끼는 녀석이었다.

하운은 자신이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라 사람을 제대로 겪어 보질 못하여 성격이 무뚝뚝하고 재미도 없어 영 볼품없는 사람이라 스스로를 판단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문이 볼 때 그는 그 모든 고단한 삶을 견뎌왔던 것을 굳이 감안하지 않아도 참으로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렵게 자라온 탓인지 하운은 길에서 굶주린 사람들을 보면 좀처럼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객잔에서 일을 할 때 역시 딱히 말로 무언가를 표현하지 않아도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온화한 표정에, 손님들에게 건네는 짧은 인사 한 마디에 가진 성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하운은 그런 사람이었다.

게다가 생긴 것도 보통의 사내답지 않게 곱상하고 단정하여 검을 한번 쥐고 휘두르면 시장판의 객잔에서 일하는 이답지 않은 고아한 분위기가 돌았다. 객잔에 심심치 않게 하운에게 눈독을 들이는 여인이며 사내들이 드나들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누군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하운의 벽에 부딪혀 번번이 제대로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물러났던 일이 부지기수였지만.

사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로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객잔 일을 하며 자신과 상관없는 이들의 이야기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고 괜히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여기고 살아왔다. 타인을 향한 호의가 언제나 같은 호의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그는 때때로 저 역시 여유롭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굶주린 아이들을 매번 챙겨대는 하운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문은 객잔에서 일하는 이들과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특별히 그들을 살갑게 챙겨 주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으므로 평소 유달리 많은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하운이 시위가 되어 황궁으로 들어갈 때 사문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얼마간 돈을 보낼 테니 그 돈으로 자신이 평소에 늘 챙겨 주던 아이들이 너무 굶주리지 않게 챙겨 달라 부탁해왔을 때도 사문은 그가 정말로 쓸데없고 귀찮은 부탁을 해온다고만, 그렇게 생각했다.

사문이 생각할 때 그것은 너무나도 바보 같은 일이었다. 아이들을 돕는 것이 좋은 일인지 무언지 하는 것을 떠나서 본인이 직접 나와 확인할 수도 없는데 사문이 그 돈을 어떻게 쓸 줄 알고 돈을 보낸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문이 직접적으로 그리 물었을 때 하운은 옅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자신이 그동안 지켜봐온 분이니 그 정도는 알 수 있다고 대답했지만, 사문은 그저 코웃음이나 치며 그러다가 발등 찍힌다고 투덜거렸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 저의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참으로 우습기가 그지없었다는 말이다. 하운의 부탁대로 그가 보내는 돈으로 꼬박꼬박 귀찮은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는 건 물론이요, 이따금 늙고 약한 이들이 다 죽어가는 몰골로 객잔 앞 시장바닥을 헤매고 있는 것을 보면 괜히 마음이 불편해 만두 하나라도 손에 쥐여 주게 되어버렸으니.

“순해빠진 놈이 황궁에서 잘 버티고나 있는지….”

쯧, 하고 혀를 한 번 찬 사문이 괜히 저의 옷자락을 툭툭 쳐대며 중얼거렸다. 돈과 함께 오는 짧은 편지엔 늘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는 말들이 적혀 있었으나 그놈 성격에 설령 무슨 일이 있다고 한들 구구절절 편지에 적어 보내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터다.

황궁으로 떠나며 태어나 처음으로 제가 원하는 일을 해본다고, 그리 해사하게 웃던 하운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늘상 바라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부유하듯 살던 녀석이 그렇게라도 저가 좋은 자리를 찾았다니 그것도 복이라면 복인 것이겠지. 오늘도 내 알 바가 아닌 남의 일이라며 하운에 대한 걱정을 접어버리는 사문이었다.


“멈춰라.”

청건전으로 향하던 어가가 황제의 명에 멈추어 섰다. 오 태감이 허리를 굽혔다.

“어찌 그러십니까, 폐하.”

허나 황제, 이한은 오 태감의 물음에도 대답이 없이 고개를 돌려 아무것도 없는 한쪽 길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 오 태감의 시선이 황제를 따라갔다. 황제의 시선이 머무는 길은 정안궁으로 향하는 곳이었다.

청건전에서 기다리고 있는 대신들이 있었다. 정무를 논하고자 황제가 부른 이들이다. 그런데도 이한은 그 길에 서서 화운을 생각했다. 간밤에 잠을 잘 잤는지. 통증은 좀 어떠한지. 어지럼증이 일거나 열이 나지는 않는지. 날이 점점 더워지는데 덧나지 않게 상처는 잘 돌보고 있는지 묻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라 당장이라도 정안궁으로 달려가고만 싶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도 아니고, 이제 잘 치료하고 놓아두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상처 하나가 내도록 마음에 걸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신경 쓰이고 궁금한 마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이토록 사람 하나 때문에 초조한 마음을 이한은 전에 겪어 본 적이 없다.

하염없이 길을 바라보고만 있는 이한의 모습을 보다 못한 오 태감이 입을 열었다.

“폐하.”

“응…?”

멍한 표정으로 대충 대답을 하는 황제의 표정은 일국의 천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무방비했다.

“일전에 서주국에서 선물로 들어온 차가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음?”

“정안궁에 보내 보시면 어떠십니까.”

이한의 시선이 길에서 벗어나 오 태감에게 향했다. 직접 정안궁으로 가고 싶으나 당장 그럴 수 없어 애가 타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보다 먼저 제가 보낸 차를 받고 좋아할 연화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화운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지기 전 어떻게든 그의 성질을 달래 보려 선물을 보냈을 때 이후로는 한 번도 정안궁에 직접 무언가를 보낸 적이 없었다.

이한은 생각에 잠겼고 오 태감이 말을 이었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마마께서 깊이 감동하실 것이옵니다.”

황제가 선물을 보내었단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뜰 것이다. 쉬이 믿질 못하고 정말 폐하께서 보낸 것이냐 여러 번 되묻기도 하겠지. 그러다가 가져온 이가 몇 번이고 그러하다 답을 하면 감개무량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고 감사를 올리다가 이윽고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차를 마실 때마다 보내 준 이를 떠올릴 테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한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먼저 태의에게 보여 연빈이 마셔도 문제가 없을지 살피고, 문제가 없다 하면 정안궁으로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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