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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85)화 (8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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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에도 황제의 걸음은 화운의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분명 자신을 보고 웃어 주셨는데. 연빈, 하고 자신을 불러 주시기까지 하였는데. 그런데도 황제는 조금 전 아진이 그랬던 것처럼 그대로 화운을 지나치며 찰나의 시선도 그에게 두질 않았다.

‘이게 무… 무슨…!’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한 얼굴로 저를 지나치는 황제를 따라 다시 한 번 몸을 돌린 화운의 입에서 경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은체도 없이 저를 지나친 아진과 황제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 연화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운이 아닌, 본래의 연빈 연화운이.

그 연화운이 어여쁜 얼굴로 웃었다. 누가 보아도 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아리따운 얼굴이었다. 그러자 아진이 얼굴 가득 해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마마, 정말 보고 싶었어요!’ 하고 그 연화운의 손을 잡아 주물러 주고 옷깃을 매만지며 정리를 해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 연화운의 앞에 다다른 황제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 주었다. ‘네가 이제야 돌아왔구나.’ 그리 말하는 황제의 얼굴은 다정하기 그지없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화운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가슴께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아팠다. 사실은 그 자리가 그 연화운의 것임을 알면서도 꼭 내 것을 빼앗긴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본래 아진의 주인은 그이고, 황제의 후궁 역시 그였으니 세심하게 저를 챙겨 주는 아진의 손길도, 따사롭게 자신을 얼러 주던 황제의 손길도, 전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음을 모르지도 않는데 자꾸만 서러운 감정이 밀려와 울음처럼 숨을 헐떡이게 되었다.

연화운의 몸을 뒤집어쓰지 않았다면 애초에 꿈조차 꾸지 못했을 일임을 알면서도. 그걸 알면서도 이제는 그들 모두가 지금의 화운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들이 되어서. 너무나도 큰 의미가 되어서.

‘……?’

그때, 함께 모여 있던 그들이 갑자기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동시에 조금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서로를 바라보며 지었던 온화한 표정과는 너무나도 다른, 서늘한 경멸이 어려 있는 표정에 괜히 마음이 뜨끔해진 화운이 긴장한 채로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 덩달아 시선을 둔다.

아주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것 같은 무성한 수풀 사이로, 흙과 오물로 온통 더러워진 누군가의 맨발이 보였다.

이유도 없이 숨이 찼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도 강렬한 불안감이 화운을 거대하게 압박하여 당장에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화운은 도망치는 대신 천천히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었다. 마치 어떤 강력한 힘이 등을 떠밀듯 절로 두 발이 그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싫었다. 다가가고 싶지 않았고 맨발로 더러운 바닥에 누워 있는 이가 누군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화운은 누구라도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 아진과 황제를 바라보았으나 그들은 여전히 경멸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엉클어진 수풀 앞으로 다가선 화운의 눈에 보인 것은.

‘아, 안 돼…. 아니야…….’

그것은. 온몸이 전부 더러워져 마치 쓰레기처럼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하운 그 자신의 원래 몸이었다.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적나라한 자신의 죽음이 너무나도 큰 공포가 되어 화운을 덮쳐왔다. 덜덜 떨리는 두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뒷걸음질을 치다가, 화운은 불현듯 고개를 숙여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흉터가 보였다. 연화운의 손에는 결코 없던, 오로지 하운에게만 익숙한 흉터들이 어느새 손에 새겨져 있었다. 떨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들자 조금 전까지 바닥의 시체를 보고 있던 아진과 황제, 그리고 본래의 연화운이 이번에는 화운을, 아니 하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게 너였어야 해.’

‘너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저곳이었어!’

‘네가 감히 우리 모두를 능멸하려 들다니.’

눈으로 보이는 그들은 입을 열지 않고 그저 하운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하운의 귓가에는 자신을 질타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벌어진 입에서는 새된 숨소리만 흘러나올 뿐 정작 하고 싶은 변명은 단 한 마디도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그러자 바닥에 버려져 있던 몸에서 검은 진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뜻대로 뒷걸음질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선 하운의 발밑이 흘러나온 진물로 젖어들기 시작했을 때, 이윽고 세상이 아득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헉…!”

화운은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아직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것처럼 애매한 감각을 서서히 되돌리자 조금 전 꿈에서 겪었던 일이 마치 현실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화운은 낮게 한숨을 한 번 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악몽은 딱히 화운에게 있어 특별하다고 할 만한 형태도 아닌지라 처음 꿈에서 본래의 연화운을 보았을 때처럼 격렬하게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속에 언제나 가지고 있던 죄책감에 또 하나의 무게가 더해졌을 뿐.

숨을 크게 내쉬어 호흡을 가다듬으며 화운은 저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고 자그마한 손은 여전히 연화운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주 잠시나마 꿈에서 느꼈던 서러움을 털어내려는 듯 화운은 눈을 감았다.

‘제가 언제나 마마의 곁에 있어드릴게요.’

화운의 외로운 어느 밤을 밝혀주었던 아진의 목소리가,

‘네가 지금의 너인 이상 어떤 모습인들 보기 싫다고 하였을까.’

저의 노력을 마침내 알아주시고 믿어 주셨던 황제 폐하의 다정한 목소리가 꿈속에서 들었던 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를 밀어내며 화운을 감싸 안는다. 이미 과분한 것을 받고 있으니 괜한 자기 연민에 빠져 분에 넘치는 투정을 부리지 말자고 하였던 다짐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겼다. 아마도 지난밤 폐하께서 상상도 하지 못할 방식으로 친밀하게 다가와 주신 것 때문에 지나치게 감정이 요동친 모양이라고, 화운은 불안한 마음을 다잡았다.

“마마, 일어나셨어요?”

그때, 이토록 조용한 기척을 또 어찌 알아챈 건지 조심스럽게 들어온 아진이 일어나 앉아 있는 화운을 향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화운을 향한 애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 아진은 재빠르게 화운의 안색을 살폈고 화운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덕분에 나는 잘 잤는데… 너야말로 나 때문에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겠구나.”

혹여나 새벽녘 화운이 고통에 잠 못 이루지는 않을까 초조해하며 시간마다 침실을 기웃거렸을 아진의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마마. 저도 잘 잤어요. 밤새 아프진 않으셨어요?”

“응. 아프지도, 깨지도 않고 아주 잘 잤어.”

“다행이에요.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붕대를 새로 봐드릴게요.”

안색이 창백한 것이 아무래도 정말 말씀하신 것처럼 푹 주무시진 못한 것 같으니 태의원에 약을 새로 지어 달라 해야겠단 생각을 하며 아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잠시, 화운은 마치 침실의 한구석에 진물이 흐르는 맨발이 보이는 듯한 착각에 빠졌으나 서둘러 그 기분을 떨쳐버리며 말했다.

“아진.”

“네, 마마.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아니. 그냥… 고마워서. 고마워, 아진.”

“…마마도 차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 제게 그런 말씀 하지 마시래두요….”

그리 대답을 하면서도 아진의 얼굴은 화운의 고맙다는 말 한 마디에 환하게 빛이 나서, 죄책감을 지고서도 화운은 또 하루를 나아가기로 하였다.


“제 모친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그 꼬장꼬장한 이가 한 마디도 못하고 바로 수긍을 하더군.”

황제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기분 좋은 얼굴로 황후를 향해 말했다. 황제는 오랜만에 황후궁에서 오찬을 드는 중이었다. 황제의 말에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황후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했습니까.”

“황후의 계책으로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풀었소.”

“과찬이십니다, 폐하.”

나라의 일도 결국엔 전부 사람이 하는 일이라, 아주 명백하고 명확한 일을 두고도 사람의 감정이 얽혀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법도대로 무조건 밀고 나가자니 품고 가야 할 대신들의 입장을 아예 무시하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그들의 사정을 일일이 헤아려 국사에 반영할 수도 없으니 사소하게 난감한 일들이 적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럴 때마다 황후는 황제의 어려움을 함께 듣고 두 마리의 토끼를 전부 잡을 수 있는 방도를 내어 주거나, 새로운 방향을 떠올릴 수 있게 황제의 생각을 돕거나, 또 어느 때는 지금처럼 황후의 영향 아래에 들어있는 집안사람들을 적절히 구슬려 상황을 유리하게 반전시키는 일이 적지 않았다.

예로부터 황궁에서는 황후나 후궁들이 나랏일에 간섭하는 일을 엄격히 금하여 다스리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와 황후는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어려운 시절을 함께 지나온 사이였으니 때때로 황제는 황후를 가장 믿을 수 있는 벗을 대하듯 편안하게 그를 대하곤 했다.

“그나저나… 연빈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폐하.”

편안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다소 얼어붙은 건 황후가 연빈에 대해 물었을 때였다. 잔을 들다 말고 황제의 움직임이 덜컹, 소리라도 날 것처럼 어색하게 멈췄다.

“그… 여전히 통증은 심한 모양이지만 잘 견디고 있는 것 같았소….”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무던하게 대답하는 황후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황제, 이한은 지난밤을 떠올렸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연화운의 이마에 저의 입술이 닿았던 그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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