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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81)화 (8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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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은 제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돌아설 생각을 하지 않는 숙비를 보며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고한 그대로 밤새 상처의 고통 때문에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한 제 주인은 정안궁에 돌아와 독한 약과 수면향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든 상태였다. 숙비마마가 아니라 황후마마가 오신다고 해도 아진은 지금 제 주인을 깨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혹시라도 숙비가 자존심과 규율을 내세워 억지로 마마께 고하게 한다면 황제 폐하의 명을 들먹여서라도 막아야지, 아진이 그런 생각을 막 하였을 때. 작게 한숨을 한 번 쉬어 본 비영이 입을 열었다.

“연빈이 깨어나면… 내가 다녀갔다고 전해 주어라.”

“…….”

숨기지 못한 죄책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에 아진이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비영을 바라보았다. 눈을 내리깐 채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비영의 얼굴엔 짙은 피로가 묻어나고 있었다. 꼭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비영이 말을 이었다.

“몸이 나아지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리고….”

비영은 입술을 한 번 옅게 깨물었다 놓았다.

“그리고… 무사히 회복하기를 내가 바라고 있다고. 그리 전해다오.”

“…예, 숙비마마.”

마마께서 누구 때문에 이리 다치셨는데 이제 와 회복을 바라시느냐고, 그리 따져 묻고 싶은 마음마저 힘없이 사라지게 만들 정도로 무거운 숙비의 목소리에, 아진도 결국은 더 날을 세우기를 멈추고 고개를 숙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화운의 상황을 다시 살피고 싶었던 이한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정안궁으로 찾아올 수 있었다. 혹시나 화운이 잠들기라도 하였을까 봐 소리도 없이 들어선 황제를 침전 앞에서 맞이한 아진이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리자 이한은 다급한 손짓만으로 아진을 일으키곤 입을 열었다.

“연빈의 상태는?”

“정안궁에 오셔서 약 기운을 빌어 내내 잠드셨다가 조금 전에 간신히 일어나셔서 식사 후 저녁 약을 드신 상태입니다.”

“식사는 제대로 하였고?”

“…죽만 몇 숟갈 뜨신 게 전부입니다.”

대답하는 아진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화운은 달리 어디가 아프다거나 힘든 티를 내지 않고 있었으나 수시로 이마에 맺히는 식은땀이나 약에 취해 잠이 들었을 때조차 끊이지 않는 미미한 신음소리 같은 것만 보아도 화운이 느끼고 있는 고통이 여전함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누군가 곁에 있을 때는 이제 다 괜찮아진 척을 하니 아진의 속만 타들어가는 중이었다.

그것을 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아진의 얼굴에서 이미 미루어 짐작한 이한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화운이 있을 침실 쪽을 한 번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한은 제 마음속의 번뇌를 아직 다 털어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자신이 지금 화운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황제인 성이한에게 과연 마땅한 감정인지 여전히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이한이라면 아마도 그 감정에 제대로 된 정의를 내리기 전까지 화운을 멀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한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차피 목숨이 위험한 상황도 아니고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알아서 회복할 걸 알면서도 그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오늘 하루 종일 이한은 정무를 보면서도 내도록 화운의 상태를 염려했다. 잠은 잤는지. 여전히 아프지는 않은지. 약은 먹었는지 아닌지 그런 것 따위를 계속해서 신경 썼다. 과도한 염려인 것을 알면서도 이한은 좀처럼 저의 온 신경을 잡아먹고 있는 화운을 제 마음 안에서 밀어내질 못했다.

그가 다쳤으니까. 많이 아프니까.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진 일은 마땅히 칭송 받아야 할 일이니까. 그러니까 완쾌할 때까지만이라도 황제로서 그를 마땅히 신경 쓰고 챙겨 주는 것이 옳다고. 이한은 그렇게 자신에게 터무니없는 핑계를 대가며 지금 다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들어가 보아도 되겠느냐.”

황제가 물었다. 아진은 황제의 그 질문에 너무 놀라 잠시 입을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일국의 황제가, 일개 후궁의 침전에 드는 일을 두고, 한낱 시녀에 불과한 자신의 의견을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께서 들어가시고자 한다면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을 곳에서 황제는 혹여나 저의 걸음이 화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 그것을 저어하고 계신 것이다.

이 상황이 믿어지지가 않아 얼이 빠져 있는 아진에게 황제가 되물었다.

“아니 되느냐?”

“아, 아니옵니다, 폐하! 마침 마마께서도 깨어 계시니 폐하를 뵈면 몹시 반가워하실 것입니다. 다만 통증 때문에 워낙에 독한 약을 썼던지라 마마께서 다소… 다소 정신이 혼미하실 수도 있어서….”

번뜩 정신을 차린 아진은 혹여나 지금 제 주인의 상태 때문에 폐하의 오해를 사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서둘러 말을 덧붙였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이한은 천천히 아진을 지나쳐 화운이 있는 침실로 걸었다.

“걱정 말거라.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스쳐 지나가듯 들려온 황제의 목소리가 마치 봄날처럼 따스해서, 아진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았다.


오랫동안 해왔던 고민을 무색하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 단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해왔던 수많은 번뇌를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무언가가 때때로 사람들의 삶에는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 당장이라도 바스라질 것만 같은 연약한 모습을 하고서도 문가에 서 있는 저를 발견하자 얼굴 가득 어여쁜 미소를 짓는 연화운이 이한에게는 바로 그런 순간이고, 그런 존재였다.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이것이 과연 내가 가져도 되는, 마땅한 감정인가. 혹여나 이것이 황제로서의 내 눈을 가리고, 내 귀를 막고, 내 입을 틀어막아 세상에 혼란을 드리우게 만들, 그런 삿된 감정은 아닐까. 애써 외면하고 싶어도 쉬이 외면할 수 없었던 고민들이 이 순간. 연화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전부 아득하게 흐려지고 이한은 그저, 그저 연화운을 지금처럼 계속 웃게 만들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아파하거나 외로워하지 않게. 제 앞에서 주눅 들거나 몸을 웅크리는 일이 없게. 그렇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 감정이 낯설고도 두려워서.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그러한 마음이라서. 이한은 한참 동안 그저 화운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 발자국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 수화원을, 자란은 걷고 있었다. 해가 저물자 점점 높아지는 밤의 풀벌레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니 종일 황후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던 만 가지의 일들이 잠시나마 물러나는 것 같아 절로 깊은숨이 나왔다.

황제가 가는 길만큼이야 하겠냐만 황제를 보필하고, 내명부를 통솔하며, 황궁 내부의 크고 작은 일들을 신경 써야 하는 황후의 자리는 결코 만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비록 황후나 후궁들이 국사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법도가 존재하긴 하였으나 자란은 왕부 시절부터 이한이 가진 수많은 고뇌들을 함께 나누고 고민하며 답을 찾았던 이였다.

황후가 되어서도 이한은 쉬이 결단을 내리기 힘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현명하기 그지없는 황후와 생각을 나누는 걸 망설이지 않았으니, 이 황궁에서 황후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말이다.

“잠시 앉았다 가자.”

자란은 평소 자신이 자주 찾는 정자에 익숙하게 앉아서는 푸르른 나무가 우거진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황후의 자리에 앉아 참 많은 날들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란은 그들의 부모님이 아주 어렵게 얻은 딸이었다. 몸이 약한 어머니가 위로 두 명의 아이를 뱃속에서 잃고 나서야 겨우 얻은 딸이었으니 그 귀함을 어찌 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자란을 낳은 이후로는 어머니의 몸도 기적처럼 나아져 두 명의 동생이 더 생기긴 하였으나 그들 중 누구도 자란만큼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자란이 불러온 복 때문에 어머니의 몸이 낫고 가문이 더더욱 풍성해지게 되었다며, 동생들이 태어날수록 자란은 더더욱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러니 제 아무리 지엄한 황후의 자리가 예정되어 있다고 한들, 그의 부모가 자란을 황실에 시집보내고 싶었을 리가 있었겠는가.

물론 황후라는 자리는 보통의 이들은 감히 꿈꿀 수 없는 자리이고, 많은 이들이 탐내어 바라는 자리일 것이며,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 그보다 더 높이 오를 수는 없는 자리였다. 가문으로서는 더없는 영광을 얻게 되는 자리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자란의 부모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먹고사는 일은 이미 풍족했고 명예도 얻을 만큼 얻어 더 욕심나는 것도 없었다. 그들은 자란이 그저 남은 삶을 평온하고 행복하게, 좋은 지아비를 만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간다면 더 바랄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쉽게 드나들지 못하는 깊고 깊은 황궁에서, 너무나도 커다란 짐을 떠안고선, 갖가지 예법과 규율에 얽매여 황제의 수없이 많을 후궁들과 총애를 다투게 될 황후의 자리를 자란의 부모는 조금도 탐내지 않았다.

“숙비는 어찌하고 있다더냐.”

“예, 마마. 오늘 낮에 정안궁에 갔다가 연빈을 만나지 못해 그냥 운화궁으로 되돌아가서는 침전에만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제 탓이 아니래도 그러는구나.”

“어쨌든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충격이 크시겠지요.”

선의 대답에 자란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하기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였던 자신과 코앞에서 그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가 되어버린 비영의 심경은 다를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하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황궁에는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아비가 알아서 다 해 주마. 그렇게 말리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왕부로 들어가길 선택한 건 자란, 그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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