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이한의 말에 화운이 무어라 대답을 하려 입을 열었으나 그 입에서 나올 대답이라고 해봐야 저는 이제 괜찮다는 소리일 게 뻔하여 급히 손을 들어 화운의 말을 막은 이한이 이내 곁에 선 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주인은 밤새 어떠했느냐.”
“폐하…!”
“조용히 해라. 네게 묻지 않았으니.”
당황한 화운이 서둘러 입을 열어 무어라 다시 말을 하려 했으나 이한은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화운의 말을 막고는 아진을 바라본다. 그제야 화운 역시 제 마음을 담은 간절한 표정으로 아진을 함께 바라보았으나 안 그래도 아침부터 제 주인 때문에 여간 속이 상한 게 아닌 아진은 그런 화운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냅다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은 아진이 거침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태의가 미리 이른 대로 마마께오서는 새벽에 더더욱 고통이 심해지고 열이 올라 잠을 거의 못 주무셨습니다. 그런데도 해가 뜨자마자 폐하께 인사를 드려야 한다며 무리를 하고 계시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폐하.”
“아진!”
평소라면 감히 황제의 앞에서 이리 쉽게 입을 뗄 수는 없겠으나 제 주인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황제 한 사람뿐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아진은 목소리 하나 떨지 않고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당돌한 말에 놀란 화운이 서둘러 아진의 말을 막으려 이름을 불렀으나 뒤이어 투덜거리기 시작한 건 이한이었다.
“내가 고하라 하여 고하고 있는 것인데 부르긴 왜 불러. 찔리긴 하나 보지?”
“그것이 아니옵고, 폐하….”
“탓할 것 없다. 지금 네 안색만 보아도 간밤이 어땠는지 전부 다 보이니.”
말끝을 흐리며 이한은 저도 모르게 쯧, 하고 혀를 찬다. 속이 상해서 그랬다. 유령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창백한 안색을 보니 속이 타 당장 태의를 불러 호통이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밤새 그리 고생한 화운의 곁에 제가 있어 주지 못했다는 것도 속이 상했고 이대로 그의 곁에 종일 붙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아쉽기 그지없었다.
잠시 말이 없이 화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한이 이내 조용해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내 마음 같아서는 다 나을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이곳에서 쉬라고 하고 싶으나, 여기에 있으면 너는 분명 단 한 순간도 편하게 쉴 수가 없겠지.”
“…….”
“이왕 일어난 김에 조심해서 정안궁으로 돌아가거라. 가서는 정말로 조금도 움직이지 말고 누워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네 몸만 돌봐야 한다. 알아들었느냐.”
“예, 폐하.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만 염려를 거두시지요….”
대답을 하는 화운의 말끝이 떨렸다. 불현듯 이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은 탓이다. 폐하께서 이토록 진심 어린 목소리로 저의 몸을 염려하고 계신다는 것이 들으면서도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제가 다쳤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폐하께서는 누구든 다친 이에겐 본래 이토록 다정하신 분이실 거라고 괜한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지난밤 황제의 품에 안겨 들었던 심장 박동이며 찰나에 나눈 시선 같은 것이 떠올라 주제도 모르고 자꾸만 헛된 마음이 들어 마음을 다잡는 게 쉽지가 않았다.
“아진은 들어라.”
“예, 폐하.”
그사이, 황제가 다소 근엄해진 목소리로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아진에게 명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정안궁은 무엇보다 연빈의 회복에 온 힘을 다하도록 한다. 관련한 일체의 책임을 네게 지우고 행여나 연빈이 무리를 하여 탈이 나게 되면 내 너를 엄히 문책할 것이니 그리 알라.”
“예, 폐하.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것은 얼핏 아진에게 과한 책임을 지우는 일인 것처럼 들렸으나 사실은 제 몸보다도 아진을 더 걱정할 게 뻔한 화운의 성정을 겨냥한 것임을 이미 눈치챈 아진은 망설이는 기색 하나 없이 명을 받든다. 가운데 있는 화운만 초조한 얼굴이 되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려니 그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을 터트린 이한이 다소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심해서 돌아가거라.”
시선을 마주하니 절로 마음이 애틋해졌다. 자꾸만 손을 뻗어 화운의 뺨을 감싸고 싶은 욕구를 내리누르려 누군가 연신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손끝이 따끔거렸다.
“…일을 마치고 보러 갈 터이니…….”
그 말을 할 때는 스스로의 음성이 어색하여 목 안쪽의 어딘가가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화운을 앞에 두고 하는 생각이, 말이, 모든 행동들이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하는 듯 낯설기만 했다. 황후나 비빈이 아파 걱정한 일이 전에 없었던 것도 아니건만 어째서 이토록 어색한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를 일이다.
“폐하, 이만 조회에 드셔야 합니다.”
황제가 연신 일어나질 못하고 미적거리고 있으니 결국 오 태감이 나서 황제를 채근했다. 이한의 마음이 더더욱 초조해졌다. 일어나야 하는 것을 아는데. 굳이 오 태감의 말을 듣지 않아도 이제 그만 자리를 떠야 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이리 몸을 일으켜 화운과 멀어지기가 어려운지.
하여 결국 애끓는 마음을 견디지 못한 황제의 손이 천천히 화운의 뺨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도 차마 감싸지는 못해서. 지난밤처럼 애틋하게 감싸 끌어당기는 일은 차마 민망하고 부끄러워 할 수가 없어서. 이한은 살짝 굽힌 두 번째 손가락으로 화운의 눈가를 슬쩍 문지르며 말했다.
“가서 푹 쉬고 있어.”
“…예, 폐하.”
그 사소한 손길에서 화르륵 두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화운의 모습은 또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이한은 제가 방금 떠올린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부분을 깊이 곱씹지 않으려 애쓰며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을 나섰다.
“황제 폐하를 배웅하옵니다.”
등 뒤에서 화운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고개를 돌려 그를 다시 마주 보고 싶었으나 그리하면 또다시 이 방을 벗어나고 싶지 않아질 것만 같아, 이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침실을 나섰다. 하루가 길 것만 같은 날이었다.
서천은 아침을 대충 먹고 관사의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밤새 당직을 섰기 때문에 빨리 눈을 붙여야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서천은 허무하게 흘러가 버린 지난밤에 대해 떠올리는 중이었다.
서천은 정안궁에서 처음 보초를 섰던 지난밤 내내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 연회가 끝나 연빈이 정안궁으로 돌아오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서천과 연빈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이였고 연빈은 서천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천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하운이 남아 있는 관계로, 그는 내도록 연빈과의 마주침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를 마주하게 되면 차오르게 될 감정이 무엇일지를 가늠해 보며 말이다.
화가 날까. 아니면 슬플까. 하운의 죽음을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할 그 사람이 보이는 따스함에 가증스러움을 느낄까. 서천은 정안문 앞에 서서 점점 더 깊어지는 어둠을 바라보며 내도록 그런 궁금증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 밤 서천은 저의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연회에서 벌어진 사고로 인해 연빈이 정안궁으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빈마마가 크게 다쳐 안정전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정안궁으로 전해졌다. 밤 안에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말에 서천은 미묘한 허탈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
침대에 누운 채로 서천은 손목에 두르고 있던 하운의 손수건을 습관처럼 매만졌다. 연빈을 만난다고 당장 제가 무슨 일을 할 것도 아닌데 간밤에 느꼈던 긴장감은 다 무엇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서천은 여전히 자신이 왜 굳이 정안궁에 있기를 원했는지, 연빈을 만나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저 연빈을 만나면 어느 쪽이든 내가 원하는 길이 보이진 않을까. 이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을 어찌하면 해소할 수 있을지 길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무엇이든 정리를 하면, 그러면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붙들고 되돌리지 못할 미련을 떨고 있는 일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을 뿐.
여전히 엉클어진 깜깜한 길을 그저 가늠하며 서천은 눈을 감았다. 몸과 마음은 지치고 고단한 지가 한참인데, 오늘도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늘어만 가고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숙비마마. 저희 마마께오서 밤새 고통에 잠을 이루지 못하시다가 정안궁에 돌아오셔서 이제야 겨우 잠드신지라….”
숙비, 비영은 전혀 송구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제 앞에 고하는 아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진뿐만이 아니다. 아진의 뒤로 보이는 궁인들 중 그 누구도 비영이 서 있는 곳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물론 비영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정안궁의 사람들이 보기에 자신은 그들의 주인을 다치게 만든 이나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비영은 그들의 비호의적인 시선에도 물러나지 않고 저만치 연빈이 잠들어 있을 전각을 가만히 건너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빈의 상태는 어떠하냐.”
“태의의 말이 상처가 심각한 것은 아니나 연빈마마의 몸이 워낙에 약하신지라 한동안은 각별히 조심하며 정양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숙비마마가 오신 것을 고할 수 없는 저의 처지를 이해해 주시옵소서.”
아진은 그리 말하며 숙비마마 때문에 저희 마마께오선 평생 등에 흉터가 남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아진의 입장에서야 화가 나 모든 것을 숙비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으나 굳이 마마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말을 제 입으로 떠벌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숙비가 연빈을 믿지 못했던 것처럼, 아진은 여전히 다른 후궁들을 모두 다 믿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