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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79)화 (79/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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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화운은 또다시 한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이토록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 이 모든 일의 근원이나 다름없던 황제를.

그러자 불현듯 조금 전 아진이 약을 들고 들어오기 전 마주했던 황제가 떠올랐다.

‘다시는 네 몸을 그리 던지지 말거라.’

황제의 그 목소리에는 무어라 한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그중 지난날 보았던 부정적인 감정들은 단 하나도 느껴지지가 않아 순식간에 마음속에 열기가 올랐다.

저의 뺨을 어르던 황제의 손이. 제게 닿아오던 황제의 시선이. 찰나에 제 가슴으로 파고 들어오던 낯설고도 두려운, 그러나 싫지는 않던 그 감정들이 심장의 어느 지점으로부터 피어나 천천히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상처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 주는 아진의 손길을 느끼며 화운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모든 열기는 아마도 몸을 다쳤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폐하를 떠올리며 느끼는 이 낯선 열기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픔이 심해지면 꼭 말씀해 주세요, 마마.”

태의가 이르길 밤 동안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질 거라고 하였다. 그 생각에 아진은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여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온통 가득 채운 황제에 대한 생각을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어 고통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던 화운은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침대에 앉아 이한은 제가 그 순간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연화운의 뺨을 제 손으로 감쌌을 때.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을 때. 화운의 궁녀가 들어와 순간에 어린 감정을 깨우기 바로 직전에. 그때.

그대로 두었다면. 아진이 들어와 방해를 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에 대해 이한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부정하기엔 너무나도 명백한 순간이었다. 당황하고 긴장하여 파르르 떨리던 연화운의 속눈썹을 아름답다고 여겼다. 한없이 연약하게 저의 옷자락만을 붙들어오던 몸짓이 사랑스럽다고도 생각했다. 그대로 연화운이 눈을 감아 주길 원했다.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입술이 저와 마주 닿도록 턱을 들게 만들고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일련의 행위가 무엇을 위해서였는지는 아무리 모른 척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을 만큼 선명했다.

입을 맞추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은. 파리하게 질린 그 입술에 저의 온기를 전하고 싶었다. 다물린 입술 사이를 열어 안으로 부드럽게 침범하여 혀끝으로 그의 여린 속살을 남김없이 느끼고 싶었다. 정말 그랬다.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제가 후궁의 입술을 취하는 일은 차라리 지극히 당연하고 처음도 아니었으니 특별하다고 여겨 곱씹을 만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한은 이미 늦은 시간을 태우며 자꾸만 그 찰나를 몇 번이나 되돌려 보고 있다.

말마따나 연화운이 변하였고, 연화운을 대하는 이한의 감정도 변하였으며, 이한은 이미 화운을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대하기로 했으니 후궁인 그를 취하는 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당연한 일인데. 어째서 그때가 자꾸만 이리 따끔하게 눈앞에 어려 방해받은 것이 아쉽다가도, 차라리 다행이었다고 안도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오진성.”

“예, 폐하.”

오 태감을 부르는 이한의 목소리는 비에 젖은 옷자락처럼 묵직했다. 황제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애써 외면하고 싶은 오 태감이 대답하자 이한은 또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애꿎은 바닥만을 노려보고 있다.

어려운 국사 앞에서도 언제나 거침없이 길을 내딛던 황제의 발걸음이 어째서 한 사람에게는 이토록 무겁고도 망설여져 한 발자국 나서는 일도 저어하시는지.

그 마음이 마찬가지로 무겁고 두려워진 오 태감이 숨만 죽이고 있으려니 한참 만에 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

“어쩌면 내가….”

행여나 입 밖으로 내뱉으면 정말로 그 일이 벌어질까.

입 밖으로 뱉지 않으면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없던 일처럼 되지는 않을까.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는 이한의 침묵이 이어졌고 끝끝내 더해지지 못한 황제의 뒷말을 오 태감은 짐작하지 않았다. 감히, 짐작할 수가 없음이었다.


이한은 꿈에서 그날을 보았다. 연빈에게 이유 없이 궁인들에게 매질을 하지 말라 성을 내고 돌아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빈의 간청에 다시 정안궁을 찾은 자신의 앞에서 보란 듯이 어린 궁녀의 등에 회초리질을 하고 있던 연빈을 마주했던 그날을 말이다.

자그마한 등이 온통 새빨간 피로 뒤덮였다. 얇디얇은 옷은 죄다 찢어져 이미 그 구실을 하지 못하였고 드러난 살갗에는 회초리로 인해 패이고 갈라진 상처가 즐비하여 차마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네가 이깟 궁녀들을 챙기면 챙길수록 나는 더더욱 악독하게 굴 것이라 황제에게 엄포라도 늘어놓는 것처럼, 손에는 피에 젖은 회초리를 쥐고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던 악귀 같은 연빈의 얼굴을 이한은 아주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그건 이한으로 하여금 연화운이라는 존재에게 완전히 정을 떼도록 만든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거의 아침이 다 되어서야 잠시 눈을 붙였던 이한은 갑자기 그때의 꿈을 꾸고 일어나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 채 누워 있었다. 왜 하필 이때에, 왜 하필 이런 꿈을 꾸었을까. 아주 공교로운 일이었다. 지난 새벽 연화운과 그리 미묘한 순간을 겪은 뒤 왜 새삼스러운,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날의 꿈을 꾼 걸까.

꼭 경고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화운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은 것이냐고. 마치 무의식 속의 누군가가 이한에게 호통을 치는 것 같았다. 평생 후궁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는 걸 경계해왔던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연화운을 자꾸만 이리 보고 있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말이다.

“청건전으로 바로 가시겠습니까.”

준비를 하는 내내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이 없는 이한을 향해 오 태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한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방자한 아랫것들을 다스리는 건 윗전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잘못입니까, 폐하?’

꿈속에서 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하던 연화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니, 그건 꿈이 아니라 기억이다. 실제로 연화운이 했던 말이고 황제가 직접 들었던 말이다. 감히 주인을 업신여기고 배신하였으니 이년은 죽어 마땅하고 죽더라도 결코 편히 죽어서는 안 된다고, 연빈은 이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리 악을 썼다.

귓가에 선명하게 맴도는 목소리를 곱씹으며 이한이 이번에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 문을 나서면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연화운, 그가 있다. 이한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사람이. 아랫사람들에게 한없이 다정하고 윗사람들에게 더없이 깍듯한. 과거의 그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는 모습으로 현재에 존재하는 연화운이.

그러자 거짓말처럼 아침까지도 꿈의 기억 때문에 심란하였던 이한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표독스럽게 저를 바라보던 연화운의 얼굴 위로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오로지 저의 안위만을 살피던 화운의 희게 질린 얼굴이 떠올랐다. 어지러운 순간에도 자신의 안전을 끊임없이 살피고, 앙숙이라고 할 수 있는 숙비를 위해 자신이 다치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던 화운의 모습이 지난날의 모든 기억을 빠르게 지우며 이한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리하여 독을 토해내듯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쉰 이한은 이윽고 대답을 기다리는 오 태감을 향해 말했다.

“연빈에게 먼저 들르자.”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꿈을 꾸고서도 이한은 화운이 그리웠다. 그를 보고 싶었다. 다친 곳은 괜찮은지 염려가 되었다. 꿈 하나로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많은 길을 걸어온 이한의 마음이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침대에 앉아 머리를 빗는 아진의 손길에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화운은 갑자기 들려온 황제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오 태감이 고하는 목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눈앞으로 마뜩찮은 표정의 황제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환자 주제에 예를 지켜야 하니 무어니 하며 이 시간부터 부산을 떨어대고 있을 줄을 내가 알았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

“어허, 가만히! 가만히 있어라!”

화가 났다기보단 투덜거리는 모양새로 말을 꺼내며 다가오는 황제를 보던 화운이 황급히 인사를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그보다 더 놀란 얼굴을 한 황제가 급하게 다가왔다. 화운의 몸을 부드럽게 감싼 이한은 조심스럽게 그를 다시 침대에 앉혔다.

화운이 어찌할 바를 몰라 눈만 깜빡깜빡 뜨고 있으려니 한숨처럼 이한이 말을 잇는다.

“누가 인사를 오라 하지도 않았는데 환자면 환자답게 누워 요양이나 할 것이지. 뭐 하러 이렇게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냐.”

화운을 바라보는 이한의 표정에는 못마땅해 죽겠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침실로 건너오면서도 분명히 그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감히 황제의 침실에 머물게 하여 주신 폐하의 성은에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하네 마네 하면서 준비하고 있을 거라 예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안색을 하고서는 벌써 옷까지 다 챙겨 입은 모습을 보자니 절로 속이 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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