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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몸으로 가길 어딜 간다고.”
“하오나, 폐하.”
“이제야 겨우 피가 조금 멎었는데 상처를 죄다 벌려놓을 생각이냐.”
황제의 목소리는 조금 전 화운과 단둘이 있을 때보다는 단단해진 듯 보였으나 여전히 다 감추지 못한 염려를 담고 있었다. 몸을 들썩이느라 흐트러진 이불을 다시 화운의 몸 위로 덮어주며 이한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 하였을 때, 그보다 한 발자국 앞서 오 태감이 말했다.
“폐하. 바로 곁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두었나이다. 폐하의 침실과 그리 멀지 않으니 마마의 몸에도 그다지 무리가 가진 않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황제가 원치 않은 생각까지도 제멋대로 척척 짐작하여 바라지도 않던 말들을 잘도 해대던 오 태감이 오늘은 연신 이한의 바람과는 동떨어진 말만 해대고 있다. 이한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오 태감은 허리를 더욱 깊이 숙이며 말을 이었다.
“폐하. 폐하께서 이리 잠도 주무시지 않고 곁에 계시면 연빈마마께서 어찌 편하게 쉬어 정양하실 수가 있겠나이까.”
이한이 하려던 말이 턱, 하고 막혔다.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은 이한의 눈에 여전히 아진이 들고만 있는 탕약 그릇이 보였다. 지금의 연화운이 지난날 보여 주었던 행동들로 짐작하여 보면, 자신이 쉬지 않는 한 화운이 마음 편히 그 탕약을 마실 일은 요원해 보였다.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건 이한이었다. 당황하여 저를 따라 올라오는 화운의 시선을 마주하며 이한이 말했다.
“태의가 말하길 당분간은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니 너는 이만 쉬어라.”
그제야 이한의 의중이 무엇인지 깨달은 화운은 자신이 감히 폐하께서도 안 계시는 침전을 쓸 수는 없다고, 그리 말하려 했으나 그보다 더 빠르게 이한이 쉿, 하고 화운의 말을 단속했다.
“명이다.”
그리고 덧붙인 한 마디의 말에는 이한이 가진 황제로서의 위엄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으니. 결국 더 버티지 못한 화운은 앉은 채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더 화운을 보았다간 정말로 이 방을 나서기가 싫어질 것 같아서. 이한은 그리 말하는 화운에게서 서둘러 시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없이 느리고 무거운 것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미련인 건지. 차마 그것을 들여다볼 용기가 없는 황제는 한 번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저의 침실을 나섰다.
“언제는 내 앞에서 연빈을 두둔하지 못해 안달이더니.”
화운이 누워 있는 자신의 침전을 나서자마자 이한은 곁을 따르는 오 태감을 보고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마뜩찮음임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한은 굳이 안에서 저에게 쉬어야 하느니 무어니 괜한 말을 늘어놓아 이제 막 깨어난 화운을 더 살피지도 못하고 서둘러 나와야 했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오 태감은 하나 거리낄 것이 없는 얼굴로 그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저는 폐하의 종으로 언제나 폐하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무엇도 폐하의 안위보다 앞세울 수는 없는 일이지요.”
“말은 참으로 잘하는구나.”
“감히 말뿐이겠습니까.”
그 순간 이한은 오 태감에게 그러면 그간 시도 때도 없이 내 앞에서 연빈 얘기를 꺼내가며 그를 좋게 포장하였던 것 역시 전부 나를 위해 한 행동이란 말이냐,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질문에 대한 오 태감의 대답을 듣는 건 어딘지 모르게 껄끄러워 입을 다물고 만다.
대신 이한은 다시 고개를 돌려 뒤로 보이는 침전을 바라본다. 그리고 연화운과 자신이 최근에 나누고 있는 아주 미묘하고, 불편하며, 동시에 설레고, 기대되기도 하는 이상한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하였던. 그 누구에게서도 단 한 번 느껴 본 적이 없던 그러한 감정에 대해서.
허나 깊이 생각할수록 그것은 그저 늪처럼 원치 않는 감정의 우물로 이한을 끌어당기기만 하는 일이라. 이한은 서둘러 생각을 흐트러트리곤 오 태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연회에 갑자기 왜 그런 일이 생긴 건지 반드시 밝혀라. 난입한 매는 황궁에서 기르는 사냥매가 분명할 터, 어디에서부터 관리에 소홀함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밝혀내고 잘못한 이를 가려내도록.”
명을 내리는 목소리에는 퍼런 서슬이 어려 있다. 오 태감이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예, 폐하.’ 하고 대답했고 이한은 잠시 그대로 서서 화운이 있을 곳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돌아선 황제의 등 뒤로 미련을 닮은 그림자가 아주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정안궁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지….”
탕약 한 그릇 마시는 것이 무어 그리 힘든 일인지, 차오른 숨을 힘겹게 고른 화운이 다소 무거워진 얼굴로 중얼거리자 아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몸으로 가시긴 어딜 가신다고 그러세요! 절대 안 돼요! 태의가 말하길 움직이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단 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폐하의 침실에서 홀로 잠자리에 든다는 게….”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인데 누가 뭐래요? 설마 마마, 황명을 거역하실 생각이신 건 아니죠?”
화운의 생각으로는 어차피 상처가 전부 아물 때까지 여기 머물 수도 없는 일이니 차라리 빨리 정안궁으로 돌아가 요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으나 주인의 상처 말고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는 아진의 표정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아진이 황명까지 들먹이자 화운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명을 거역하다니 무슨 말을 그리하니….”
“폐하께서 친히 마마께 여기 머무시라 명하셨는데 마음대로 돌아가 버린다면 그게 황명을 거역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그러니 마마, 괜히 다른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은 상처를 돌보는 일에만 신경 쓰세요. 제가… 마마께서 갑자기 이리 다치셔서 제가 얼마나…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는지 아세요?”
“그… 내가 미안해. 울지 마, 응?”
말을 하던 아진이 이번에는 울먹이기 시작하자 표정이 더더욱 애처롭게 변해가던 화운이 급기야는 눈꼬리를 한껏 늘어트리며 사과를 하고 만다. 하기야 화운이야 자신이 다친 거니 다른 이가 다친 것보단 그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입장을 바꿔 만약 아진이 다른 이를 구하다가 대신 다쳤다고 하면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고 속이 탔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평소라면 한낱 종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시면 안 된다고 말하였을 아진도 이번만큼은 화운의 사과를 물리지 않고는 작게 훌쩍거리며 말을 잇는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푹 쉬실 거죠?”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니 더 이상 고집을 부리기도 어려워진 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다 나을 때까지 태의 말도 잘 들으시구… 약도 잘 드시구… 무리하지도 않으실 거죠?”
“그래그래. 그럴 테니까 울지 말고.”
마침내 제가 원하는 것을 전부 얻은 아진이 그제야 그렁그렁했던 눈물을 손등으로 쓱쓱 닦고는 화운에게 다가와 그의 몸을 안아 조심스럽게 엎드려 눕게 도우며 말했다.
“굳이 숙비마마를 위해 왜 이렇게까지 하셨냐고 묻지는 않을게요. 마마께서는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서도 기꺼이 몸을 던지실 분이라는 걸 이제는 아니까요.”
“…….”
“그래도 마마. 저에게는 세상 그 누구보다 마마의 몸이, 안위가 가장 중요해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마마께서도 스스로 역시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생각해 주세요.”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아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화운은 마음 한쪽을 콱 틀어막는 어떠한 감정을 느꼈다.
화운은.
그러니까, 하운은.
아주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잃어 자라는 내내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지 못한 채로 자랐다. 하운은 자신을 잠시 거둬 준 이웃집에서는 눈칫밥을 먹는 어린 노비였고 그마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여 쫓겨난 뒤로는 동냥질을 하며 길거리를 전전하며 살았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어야 할 어린 시절부터 음식 같지도 않은 음식으로 주린 배를 겨우 채워 살아남아야 했으니 하운의 세상은 내도록 차갑고 비정한 풍경이기만 하였다.
운이 좋아 만나게 된 스승님은 속으로야 하운을 어여삐 여겼겠으나 투박한 무인으로 달리 표현을 하는 성미는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하운 역시 은인이자 하늘같은 스승님을 어려워하여 둘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아니면 사사롭게 대화를 나누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렇게 부모에게도, 스승에게도 특별하게 표현되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하운은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을 만한 그런 사람은 아닌 모양이라고. 때때로 동정을 얻고 연민을 받을 수는 있겠으나 누군가 진정으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그런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나라는 존재는 아마도 그렇게 정해진 운명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많이 아프시죠….”
그런데 지금 여기에 아진이 있었다. 마치 제가 다치기라도 한 것처럼 서러운 목소리로 붕대를 감은 화운의 상처 위에 호오- 하고 닿지도 않을 입 바람까지 불어가며 전전긍긍하는 아진은 심지어 이전엔 연화운이라는 인물에게 학대를 당하기까지 했던 이였다. 그런 이가 지금 자신에게 보여 주는, 이렇게도 선명한 애정은 가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신기하고도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