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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운은 이제라도 아진을 빨리 불러 그 애를 안심시켜줘야겠다고 생각을 하였으나 그것은 말이 되어 흘러나오지 못했다. 이어진 이한의 말 때문이었다.
“나는 네가 걱정되어서 이 시간까지 잠도 자지 않고 네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이번에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쿵, 하고 심장이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주변의 풍경이 화운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금빛 휘장이 화려하게 둘러진 이곳은 정안궁이 아니다. 화운의 침소가 아니었다. 허면 이곳은 어디인가. 황제께서 밤을 지새우고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창경정에서 상처를 입고 정신을 잃기 전 폐하께서 자신을 손수 품에 안고 걸으셨던 것이 떠올랐다. 꿈과 현실이 혼망하여 그것조차 꿈인 양 여기고 있었는데 저를 기다렸다고 직접 말하는 이한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 순간이 꿈이 아니라 실제였음을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허면 설마 제가 누워 있던 이곳이 황제 폐하의 침실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화운이 이내 두 손으로 천천히 이한의 가슴을 짚어 밀어내며 몸을 떨어트리곤 이한을 마주 보았다. 말없이 허공에서 화운의 시선을 마주하는 이한은 어딘지 모르게 슬프고도 애달픈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폐하께서 고작해야 내가 다쳤다는 것 때문에 저런 얼굴을 하실 리가 없는데.
열이 났다. 숨이 더웠다. 그것이 상처 때문인지, 아니면 혼란한 저의 생각 때문인지.
혼란한 생각은 황제의 눈빛 때문인지 아니면 그 또한 상처 때문인지.
모든 것이 그저 엉켜든 실타래처럼 어려워 떨리는 눈동자를 하고 있는 화운을 향해 이한이 말을 이었다.
“네게는 이것들이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한다는 말이냐.”
“폐하… 저는….”
“그래서 자꾸만 네가 다친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행이라고. 그리 말하고 있는 것이냔 말이다.”
내 마음이 너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냐고. 마치 그리 묻고 있는 것 같은 이한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무겁고 애틋하여, 화운은 그저 숨이 막혀 어떤 말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비영은 운화궁으로 돌아와 가까스로 잠자리에 누웠으나 눈을 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그 순간이 악몽처럼 떠올라 황급히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저를 끌어안은 화운의 품과, 비명처럼 그를 부르던 목소리, 화운의 등에 부딪혀 자신에게까지 전해지던 엄청난 힘 같은 것들이 바로 지금 벌어지는 일처럼 여전히 생생하기만 했다.
태어나 한 번도 이런 난리를 겪어 본 적이 없는 비영이었으니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비영은 제가 지금 느끼는 감정들이 단순히 놀라고 충격을 받아 느끼는 감정이 아닌 것을 알았다. 등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저에게 괜찮으냐 묻던 화운의 얼굴이 떠오르자 당연한 수순처럼 심장이 욱신거렸다. 무어라 변명할 여지가 없는 죄책감이다.
마음 한편으로는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너무 놀라고 당황하고 무서워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고, 그런 변명을 필사적으로 되뇌었다. 그저 겁을 먹었을 뿐이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연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알량한 자존심과 괜한 의심 때문에 위험한 순간에 저를 위하던 이를 다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비영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비영은 이 일을 두고 고육책이라 다시 한 번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황제의 마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고 남을 구하는 척하였던 후궁의 이야기가 지난 역사에 얼마나 많았던가. 총애를,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때때로 어떤 이들은 총애를 위해 자기 자신은 물론 피붙이까지 위험하게 만드는 일을 서슴지 않곤 했다.
그러니 그깟 상처. 어질고 바른 황제 폐하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흉터를 얻고 그 누구도 받을 수 없었던 황제의 총애를 얻는다면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제 마음을 위로하려 들 때면 저를 끌어안은 연화운의 두 팔에서 느껴지던 절박함이 떠올랐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도 오로지 저의 안위만을 살폈던 연화운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지듯 하였다. 그러면 비영은 차마 그 모든 것이 꾸며진 일이라고는. 그렇게는 생각할 수가 없게 되어버려서.
조금만 더 일찍 그를 믿어 주었다면.
종국에는 그러한 후회를 떨쳐버릴 수가 없던 비영의 새벽이었다.
“저는….”
무어라 말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연신 같은 말을 더듬거리고 있는 화운을 이한은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는 마치 화운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몇 번을 곱씹어 생각해 보아도 화운은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운은 애초에 창경정에서 다친 자신을 왜 폐하께서 품에 안으셨는지 그것부터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가진 성정이 다정하신 분이라고 하여도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손수 자신을 품에 안고 걸어오실 필요도, 황제의 침실로 데리고 올 필요도, 이 늦은 시간까지 잠도 자지 않은 채 자신이 깨어나길 기다릴 필요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폐하께서 가지고 계신 다정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 된 화운은 말을 잊은 사람처럼 그저 입을 벙긋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 소리도 없이 움직인 이한의 손이 흘러내린 화운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더니 이내 천천히 화운의 뺨을 감쌌다. 화운은 꼭 목에 칼끝이 닿은 사람처럼 완전히 얼어버려서 숨조차도 내쉬지 못하고 떨리는 눈동자로 이한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러운 엄지손가락 끝이 아주 느린 속도로 화운의 뺨을 쓸었고, 이한은 입을 열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그러지 마라. 이한이 뱉은 말의 끝은 꼭 명령과도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그것은 명령이 아니었다.
“다시는 네 몸을 그리 던지지 말거라.”
그것은 차라리 부탁이었다. 애원이었다. 일국의 황제가 한낱 후궁에게 할 만한, 그런 목소리가 결코 아니었다. 화운은 어쩌면 자신이 상처가 깊어 황제의 목소리를, 그 안에 깃든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폐하….”
하지만 황제의 손은 여전히 화운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고, 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화운의 눈동자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대로 천천히 다가오는 황제의 얼굴은 화운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애틋하고도 절박하여서. 그래서 화운이 저도 모르게 숨을 참은 채로 연약하게 황제의 옷자락만을 두 손으로 꼭 쥐었을 때.
“폐하, 아진입니다.”
갑자기 문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에 서서히 감기던 눈을 번쩍 뜬 이한이 황급히 화운에게서 멀어졌다. 역시 화들짝 놀라 이한에게로 기울었던 몸을 바로 세우던 화운이 또다시 윽,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당황한 이한이 화운의 어깨를 다시 조심스럽게 감싸 베개 한쪽에 기대게 하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라.”
그리 말을 하는 황제의 귓불이며 목덜미가 보란 듯이 붉어져 있었으나,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마찬가지로 놀라고 당황한 화운은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터라 그런 이한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제가 무엇을 어쨌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아진이 탕약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다가 깨어나 앉은 화운을 보곤 눈시울을 붉히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마마…. 마마께서 깨어나셨다고 하여 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진이 만약 평소와 같은 상태였다면 자신이 들어왔을 때 황제와 제 주인 사이를 두르고 있는 미묘하고도 어색한 공기를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진 역시 너무 놀랐고 화운에 대한 걱정에 정신을 온통 빼앗겨 방 안의 분위기 같은 건 살필 생각조차 못 했다.
속절없이 떨리는 아진의 목소리를 들은 화운은 그제야 시선을 들어 천천히 다가오는 아진을 바라보았다. 짓무른 눈가며 발개진 두 뺨이 누가 보아도 엉엉 울다가 온 얼굴이라 또다시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안 그래도 제 건강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를 또다시 괴롭게 만든 것 같아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진이 막 화운의 곁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을 즈음, 이한의 명으로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오 태감이 따라 들어와 이한에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폐하. 연빈마마께서도 이제 정신이 드셨으니 폐하께오선 이만 침수에 드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그 말에 이한이 순간 눈을 뾰족하게 뜨고 오 태감을 노려보았고, 화운은 크게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연회가 이미 해가 저문 후에 열렸고 자신이 적어도 몇 시간은 정신을 잃었을 테니 지금은 상당히 늦은 시각임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황제께서 쉬지 못하고 자신의 곁을 지키고 계셨다니. 진작 이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화운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오 태감의 말이 옳습니다, 폐하. 저는 이제 괜찮으니 이만 물러가 치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애초에 이만한 일로 존귀하신 폐하의 침소에 자신이 누워 있었다는 것 자체로도 화운은 너무나도 큰 불경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물론 연화운은 황제의 후궁으로 폐하께서 허락한다면 그분의 침실에서 충분히 잠을 청할 수가 있겠으나 본래의 연화운과는 다른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화운은 생각했다.
그리하여 약도 먹지 않은 채 서둘러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는 화운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 다시 앉힌 건 짐짓 불쾌한 얼굴을 한 이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