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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모르게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였다. 이한이었다. 꿈에서도 화운이 그토록 간절히 찾아 헤매던 이는. 그 길고 두렵던 어둠에서 화운에게 빛이 되어 주고 곁에 서 주었던 단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눈앞의 폐하이시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저로서는 과분하기 그지없는 온기에 화운은 눈물을 아니 흘릴 수가 없었다.
“많이… 많이 아프냐. 태의를 불러 주마, 조금만 참아라.”
깨어나자마자 눈물부터 쏟는 화운의 모습에 당황한 이한은 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들썩였다. 그런 이한의 소맷자락을 가만히 붙든 화운은 파리한 입가에 이한이 상상도 하지 못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허나…!”
“폐하를 만날 수가 있어서… 폐하께서 계셔 주셔서….”
오랫동안 고단했던 삶의 끝에 이한을 만나서. 죽음을 문턱을 넘어서도 이한이 곁에 있어 주어서.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서 화운은, 정말로 괜찮았다.
자란은 새벽이 깊어지도록 오늘 자신이 보았던 화운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비단 그가 비영을 끌어안아 대신 다친 그 순간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자란은 그 찰나의 순간보다도 더 넓은 풍경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 매가 나타나 창경정이 엉망이 되었을 때 자란은 누구보다 빠르게 황제가 있는 곳을 살피던 화운의 모습을 보았다. 저마다 자신의 몸 하나 지키지 못해 난리가 벌어질 때도 자란은 시위들의 보호를 받으며 저만치에서 황제와 황후의 안위를 살피듯 시시각각 자신들을 바라보는 화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란은 그때에 확신했다. 만약 폐하께서 위험에 처하신다면. 결코 벌어져서는 안 되는 그런 상황이 만에 하나라도 벌어진다면. 저 사내는 황제 폐하를 위해 제 한 몸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던질 것이라고.
자란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비단 목숨을 바치는 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목숨조차도 아낌없이 바칠 정도로 황제를 생각하고 있으니, 그 어떤 상황에서도 황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그를 위해 무엇이든 다 할 이라는 점이었다.
황제가 가진 가장 연약한 부분을 틀어쥐고서도 그를 아프게 하지 않을 사람을. 그 약한 부분을 오히려 더 귀하게 생각하고 지켜 줄 그런 사람을. 하여 자신의 영위를 위해 황제를 이용하지 않을 사람을 자란은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폐하를 따라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분의 이 말도 안 되는 호의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고 기필코, 그 어떤 치욕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다만 모든 것이 무사하다면. 이대로 무사히 폐하의 곁에 남게 된다면. 그때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행복을 위해서 그 무엇이라도 할 것이다.’
자란은 오래전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다짐하던 저의 밤을 떠올렸다. 지나가지 않을 것처럼 길었던 그 밤도 종내에는 지나갔고, 결코 오지 않을 것 같던 사람도 서서히 그 형체를 드러내는 것만 같았으니.
밤의 소란과는 상관없이 자란의 새벽이 깊어가고 있었다.
“폐하. 정말로 무사하신 게 맞으시지요.”
마치 그것이 아니면 세상천지 궁금한 것이 없는 사람처럼 화운은 이한에게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묻고 또 물었다. 지금 저의 안색이 얼마나 창백한지는 알지도 못하는 이가 연신 하는 질문이 내도록 그런 것이라 아까부터 마음이 계속 불편한 이한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깟 새 한 마리가 어찌 나를 상하게 할 수 있었겠느냐. 나는 물론이요, 황후도, 숙비도. 무희 몇을 제외하고는 궁녀 하나하나까지도 무사하다.”
“더 다친 사람이 없었다니 정말로 다행입니다.”
진심으로 안도하는 듯 눈을 내리감는 화운의 모습에 이한은 속에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참지 못한 이한이 다시 말했다.
“네가 다친 것은 다친 것도 아니냐?”
“…예?”
“네 등이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데도 다행이라는 말이 입 밖에 나와?”
화운은 이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눈만 깜빡였다. 왜냐하면 화운은 정말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상처를 입은 건 사실이었다. 그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화운은, 제가 다친 일에 폐하께서 어찌 이리 화가 난 목소리를 하시는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자신이 다치긴 하였으나 덕분에 숙비는 무사했다. 화운이 부상을 감수하지 않았다면 숙비는 등이 아니라 얼굴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을 테고, 지금 화운이 견디고 있는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화운은 진심으로 저의 등에 상처 조금 난 것으로 마무리가 된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무사하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허나 대신 숙비마마께서 무사하셨지 않습니까.”
“…….”
“저는 고작해야 등을 조금 다친 것뿐이니 다행이 아닐는지요….”
“너는 정말…!”
입을 여는 족족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만 해대는 화운의 대답에 결국 참지 못한 이한이 순간 목소리를 높였다가 이내 눈앞의 이가 환자라는 사실을 되뇌며 자신을 다스렸다. 이한은 정말 화운의 대답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다 거슬렸는데, 그 무엇보다 이한의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건 그의 말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화운의 말대로 그가 나서지 않았으면 숙비는 얼굴을 크게 다쳤을 것이다. 눈과 같은 더없이 중요한 부분을 다칠 수도 있었던 것도 그렇거니와 얼굴에 흉터가 남는 것은 다른 곳에 남는 흉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사자의 마음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어떤 방식으로 생각을 해보아도 화운이 이리 대신 다친 것은 그래, 다행인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이한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화운을 바라보았다. 상처를 치료하느라 입히지 못한 겉옷을 붕대를 감은 몸 위에 덮어만 두었는데 화운이 일어나며 그 옷이 흘러내려 마른 몸이 그대로 이한의 눈에 들어왔다. 쇄골이며 어깨며 어디 하나 뼈가 도드라지지 않은 곳이 없는 화운의 몸은 어딜 쥐든 이한이 힘을 주면 그대로 으스러질 것처럼 연약하기만 하다.
저런 몸으로 어찌 될 줄을 알고. 그 날카로운 금수의 발톱이 어디를 어떻게 할퀼 줄 알고. 행여나 정말로 발톱이 깊이 박혀 위험해지기라도 하였으면 어찌 하였으려고.
그런 생각을 하자 또다시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화운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은 마치 다른 이의 것처럼 머리로 이해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꾸만 화가 났다. 제가 다쳐 다행이지 않냐 말하는 연화운의 말은 이 황궁에서 숙비가 자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전제로 하고 있음이 뻔해 이한은 더더욱 속이 상했다.
허면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가. 숙비가 연화운보다 중요하지는 않다고. 네가 다칠 바에야 그가 다치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거라고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다.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숙비 대신 화운이 다치는 게 옳았다는 말도 이한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돌고 돌아 이한이 탓하고 싶은 사람은 오로지 그 자신뿐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까지 그저 뒤에 서서 보호를 받고 있기만 하였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그 자리에서 앞으로 나서지 않던 자신이 계속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던 숱한 핑계들이 이명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말없이, 이한이 그대로 화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화운이 다소 놀라 어깨를 움츠리자 이한은 제멋대로 흘러내린 옷자락을 정리하여 화운의 몸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그제야 자신이 망측한 꼴로 황제를 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몸을 웅크렸다. 그와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끔찍한 고통이 크게 밀려왔다.
“으읏….”
“움직이지 말라 하였더니…! 많이 아프냐….”
그러자 놀라 순식간에 사색이 된 이한이 화운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품으로 당기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리… 내게 기대거라.”
“저는 괜찮습…….”
“한 번만 더 괜찮다는 말을 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리 알고.”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이한의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완 달리 너무나도 섬세하고 부드러워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이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황제의 품에 감히 고개를 기댄 화운의 귓가에 쿵, 쿵, 거대한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화운은 그것이 저의 것인지, 아니면 황제의 것인지 분간도 가지 않을 지경이라 그저 폐하께서 이 소리를 듣지 못하시기만을 바라며 애꿎은 이불을 손안에 구겨 쥐었다.
행여나 상처를 건드릴까 어깨 한 번 쓸어주지 못하는 손을 저도 모르게 아쉬워하며, 이한이 말했다.
“네가 다쳐서 너의 궁녀는 지금도 눈물을 찍어내며 네 약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이다.”
“아…….”
그제야 화운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제가 제대로 마음을 쓰지 못하였던 일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진은 마음이 약한 아이인데. 저를 그토록 괴롭혔던 자신에게 이다지도 쉽게 마음을 주었던 그런 아이인데 눈앞에서 제가 다치는 것을 보았을 테니 얼마나 겁을 먹고 놀랐을까. 그 생각을 하니 심장이 다 철렁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