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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73)화 (7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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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안일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매 한 마리일 뿐이지 않았나. 머잖아 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시위들도 올라올 테고 아무리 크고 사나운 사냥매라 할지라도 곧 잡히겠지, 이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부터 들끓어 오르는 불안함을 모른 척했다. 황제인 그 자신이 위험한 것도 아니고, 일국의 국모인 황후가 위험한 것도 아니니 매 한 마리 나타났다고 하여 초조해할 이유가 무어냔 말이다.

물론 이한은 저를 둘러싼 시위들에게 여긴 괜찮으니 나아가 비빈들을 보호하라 명했으나 이 순간 시위들이 지켜야 할 존재는 당연히 황제와 황후였으므로 그들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연빈마마!”

그때, 이한의 귓가에 누군가가 외친 비명소리가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와도 같이 거대하게 꽂혔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매의 앞에 정면으로 서 있던 숙비를 그대로 끌어안으며 제 몸으로 감싸는 화운이 이한의 눈동자에 박혀왔다. 금수의 발톱이 연화운의 어깨와 등을 찢고, 그 상처에서 피가 흩뿌려지듯 솟아오르는 일련의 장면들 하나하나가 화살의 촉처럼 날카롭게 이한의 눈동자를 찢고 그의 머릿속으로 새겨들었다.

심장의 어딘가가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이한은 확신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소리가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에게 아주 유효한 타격을 주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엄청난 고통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폐하! 먼저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오 태감이 아주 강경한 목소리로 소리치듯 말했으나 그 음성은 지금의 이한에게 가닿지 못했다. 제 등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숙비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연화운만이 오로지 이한의 모든 감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후회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자리에 연화운을 지키기 위해 뛰어들지 못했던 저의 행동은 어느 쪽으로 생각해 보아도 여지없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화가 나서. 안일하게 뒤로 물러나 연화운의 안위 같은 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그리 뒷짐을 지고 있던 조금 전의 자신에게 견딜 수 없이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서. 이를 으드득 갈며 걸음을 옮기는 황제를 누구도 감히 막아설 수가 없었다.


“숙비마마, 괜찮습니다! 일어나세요!”

숙비, 비영은 덜덜 떨며 그저 눈을 감고만 있었다. 연빈과 엉켜 넘어졌던 몸을 누군가가 부축했고 간신히 눈을 뜨자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저를 살피고 있는 연빈, 연화운의 얼굴이 보였다.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으로 지금의 상황이 조금씩 인식되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곧장 날아오던 매를 보고 얼어버린 자신을 끌어안아 감싸던 연화운의 모습이.

“피… 피가….”

그제야 비영은 자신의 뺨과 옷이 피로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비영의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여전히 비영의 앞에 서서 놀란 비영을 달래주고 있는 화운의 어깨와 등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피였다. 허나 화운은 고통 때문인지 식은땀이 맺힌 얼굴로도 비영을 안심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마마! 피가 너무 많이 나요!”

그런 화운의 뒤로 눈물을 쏟으며 화운을 부축하려 애쓰는 아진의 모습이 보였다. 비영은 제가 붙들고 있던 화운의 팔 역시 흘러내린 피로 이미 젖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보호하려다 대신 다쳐 피를 이렇게 철철 흘리고 있는 와중에도 끝까지 자신을 안심시키고 안전한 곳으로 피하게 만들려는 화운에게서 비영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비영은 지금껏 자신을 붙들고 있던 화운의 몸이 갑작스럽게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단순히 몸이 떨어진 것뿐만이 아니라 순식간에 누군가의 품에 안겨 몸이 들린 화운의 두 다리가 보였다.

“폐, 폐하…?!”

자신의 갑자기 안아 올린 이가 누군지 확인한 화운이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야차와도 같은 표정으로 화운을 안고서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황제, 이한이었다.

“폐하, 저는 괜찮습니….”

“매는 반드시 잡아라!”

화운이 저를 내려달라는 의미로 발을 살짝 바동거리며 입을 열었으나 가뿐히 그 말을 무시한 황제가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새 창경정 위로 전부 올라온 시위들이 목소리를 높여 황제의 명에 답했고 이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장… 당장 태의를 안정전으로 들라 하라.”

그 목소리는 바로 전의 명령보다는 크지 않았으나 그보다 더 무겁고 살벌한 기운이 어려 듣는 이들의 등골을 전부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운이 그대로 담겨 있는 눈동자로, 이한이 저의 품에 안겨 있는 화운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하다 못해 파리하게 보이는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화운은 당장 정신을 잃어도 하나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몸을 하고. 이런 상태가 되어서도 놀란 비영을 챙기던 화운의 모습이 다시금 눈앞에 떠올라 이한은 입술을 깨문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아주 어렵고도 무거운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것 같은 목소리로 이한이 화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감히 황제의 품에 이리 안겨 갈 수는 없어 다시 한 번 자신은 괜찮으니 내려달라 말을 하려 벌어졌던 화운의 입이 먼저 흘러나온 황제의 목소리에 다물어진다. 황제는 다시 말했다.

“괜찮다고, 그런 말을 한 마디라도 꺼낸다면 너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네 수족들부터 전부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 입 다물고 있어.”

사실 정말로 경을 치고 싶은 건 그의 수족이 아니라 이한 그 자신이었음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화운의 등을 감싸 안은 이한의 손이 화운이 흘린 피로 젖었고 이한은 그대로 여전히 혼란스러운 연회장을 벗어나 안정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한이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손수 품에 안은 채 황궁의 길을 걷는 순간이었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어지러운 시선으로, 화운은 이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화운은 그냥 저를 정안궁으로 보내 치료만 받게 하면 될 텐데 어찌 폐하께서 이리 고생을 하고 계실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팔이 아프실 텐데. 아무리 황궁의 밤길을 밝혀놓았어도 밤의 길은 어두울 텐데. 존귀하신 천자께서 어찌 하찮은 천민을 손수 품에 안고 이리 걸어가고 계시는 걸까.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문득 눈앞에 햇살이 찬란하였던 어느 거리가 펼쳐졌다. 어느 미천한 삶이 바뀌었던 그날의 그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무언가를 욕심내게 되었던 그날. 평생 절대로 가질 수 없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마음에 품었던 바로 그날이 지금 깜빡이는 화운의 눈앞에 어린다.

그러다 또 눈을 감았다 뜨면 황제의 눈동자에 어린 연화운의 얼굴이 있다. 제가 아니었으나 이제는 제가 되어버린 그 모습으로 화운은 황제가 내민 손을 잡고, 그분에게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갈구했다.

어지러웠다.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인지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아주 오래 꿈을 꾸었나. 너무나도 간절히 바라서. 그 분의 곁에 있기를 너무나도 절박하게 바라고 또 바라서. 그래서 그토록 터무니없는 긴 꿈을 꾼 것인가 싶었다.

“폐하….”

“조금만 참아라. 곧… 곧 치료를 받게 해 주마.”

이명처럼 아득하게 들리는 황제의 목소리는 꼭 환상처럼 너울거렸다.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가 아프게 들려와 화운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폐하께서 어찌 이리 불안한 목소리를 하고 계시는 걸까. 언제나 당당하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들만 겪으셔야 할 폐하께서 무엇 때문에 이리도 속상한 목소리로 말을 하시는 걸까.

우리 폐하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이신데…. 늘 행복하셔야만 하는데….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어 괜히 화운의 마음이 서러워졌다.

“폐하…….”

그래서 화운은 힘 하나 없는 몸으로도 목소리를 냈다. 꿈이든 환상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화운은 지금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 하나를 묻지 못하면 꿈을 깨고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대답 없는 황제를 향해 화운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거늘.”

“폐하… 괜찮으시지요…?”

이한의 걸음이 덜컥 멈추어 선 것은 그 순간이었다. 한시가 급한데. 피를 이미 많이 흘렸으니 빨리 가서 치료를 받게 해야 하는데. 그런데 문득 저를 향해 흘러나온 화운의 말 한 마디에 온몸이 얼어붙은 듯 굳어 쉬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송구한 심정으로 급하게 황제의 뒤로 따라붙었던 이들이 전부 걸음을 멈추었으나 이한은 세상의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제 품에 있는 연약한 사내의 숨과, 그의 목소리만이 사위를 전부 가득 채우고 있다.

화운이 말했다.

“목소리가… 목소리가 좋지 않으십니다, 폐하….”

“…….”

“어디 아프신 건 아니시지요…?”

화운이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건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있는 얼굴만 보아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한 이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을 큰 상처를 입었으니 그 충격이 오죽이나 클까. 지금 화운이 겪고 있는 출혈과 고통은 무인에게도 쉬운 정도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연화운은. 제 몸이 이리 만신창이가 된 와중에도 그는 황제를 걱정하고 있다. 자신이 위험에 처한 걸 보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비정한 황제를.

이를 꽈득 깨문 채로 이한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후궁들이 전부 놀라고 경악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순간에도 이한은 마치 황제의 안위를 살피기라도 하듯 계속 그가 있는 곳을 확인하던 화운과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그것을 무시했던 순간들이 이제 와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이한이 걷는 길 위에 솟아 황제의 한 걸음, 한 걸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나 이한은 그것을 마땅한 고통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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