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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72)화 (7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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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아진이 불현듯 날카로운 시선 하나를 눈치챈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들자 저만치 가장 상석에서 자신을,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과 제 주인을 번갈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황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강렬한 시선에 놀란 아진이 저도 모르게 화운의 어깨를 슬쩍 건드리자 그때까지도 계속 침울해 있던 화운이 아진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아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화운과 황제의 시선이 그대로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갑작스러운 마주침에 누구보다 당황한 건 당연히 이한이었다. 우선 이한은 자신이 ‘또’ 화운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채로 서로 속닥이는 화운과 아진을 보고 있었다.

이한은 저들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저리 친밀하게 나누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정말로 사소하고 쓸데없는 궁금증 따위를 계속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화운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마치 자신의 그 초라하고 이상한 생각들이 화운에게 그대로 전달될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황제가 되어서 마음에 들지도 않는 후궁 하나와 그의 궁녀가 나누는 대화 같은 걸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냔 말이다.

그래서 이한은 너무나도 당황하여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조차 판단하지 못하고 그저 눈만 깜빡거리며 화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조금 당황한 얼굴로 이한을 바라보던 화운이 이내 동그랗게 떴던 눈을 사르르 접으며 이한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귓가에 삐이- 하고 이명이 들렸다. 화운이 제게 건넨 아무 의미 없는 인사 하나에 이한은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와 풍경이 모두 지워지고 오로지 화운과 자신 두 사람만이 남은 듯한 감각에 빠져 숨도 쉬지 못하고 앉아 있다. 오로지 미소 하나에 말이다. 그렇게 연화운을 제외한 모든 세상의 불빛이 하나하나 꺼지고 있을 때.

“꺄아악!”

외마디 비명 하나가 사위를 뒤흔들었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갑자기 창경정으로 거대한 사냥매 한 마리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춤을 추던 무희들 사이로 사냥을 하듯 날아든 매의 발톱에 무희 한 명이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그것을 기점으로 연회장은 그야말로 난리통이 되어버렸다.

“폐하를 보호하라!”

이한이 곁에 있던 자란을 당겨와 자신의 뒤에 세움과 동시에 오 태감이 고함을 질렀고 창경정 위쪽으로 올라와 있던 몇 명의 호위군과 시위들이 황급히 달려와 황제와 황후를 둘러쌌다.

한 번 날아간 매는 바로 다시 눈에 보이진 않았으나 놀란 무희들과 궁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하자 혼란은 쉬이 잠재워지질 않았다.

“폐하!”

그때 비명처럼 황제를 부르며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화운은 시위들이 재빠르게 달려와 황제와 황후를 막아서는 것을 확인하곤 곧장 제 앞을 몸으로 막아서고 있는 아진의 팔을 당겨선 저의 뒤로 보내었다. 놀란 아진이 황급히 다시 화운의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마마! 제 뒤에 계세요!”

“잔말 말고 내 뒤에 가만히 있어!”

하지만 아진은 너무나도 단호한 목소리로 저에게 소리를 치며 팔로 자신의 몸을 막아서는 화운의 행동에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어째서인지 순간 화운의 목소리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진의 반응을 살필 새도 없이 화운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운이었을 때에 늘 검을 차고 다니던 곳을 손으로 짚었으나 당연히 검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입술을 가볍게 깨문 화운의 눈에 건너편에서 소리를 지르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정빈의 모습이 보였다.

그사이 먼 궤도로 한 바퀴 돈 매가 다시 창경정 쪽으로 돌진해와 무희와 궁녀들 사이를 헤집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궁녀 한 명이 목 뒤에 큰 상처를 입으며 바닥으로 우당탕 넘어졌다.

“정빈! 이리로 오세요!”

화운은 제 앞에 놓여 있던 식탁 앞으로 나아가 정빈, 송현을 향해 손을 내밀며 외쳤다. 주아를 끌어안고 덜덜 떨고 있던 송현은 제게 내밀어진 화운의 손끝을 보자 순간 그 위로 겹쳐지는, 자신의 가장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하고 소리쳤다.

“오라버니!”

송현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와 화운의 손을 잡았고 화운은 그 역시 저의 등 뒤에 두고 기둥 쪽으로 가 아진과 함께 기둥을 등지게 하고선 세워두고는 말했다.

“몸을 숙이고 여기 딱 붙어서 움직이지 말고 있으세요.”

벌써 눈물범벅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는 송현을 두고 화운은 다시 고개를 돌려 여전히 난장판인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매는 지금 몹시 흥분해 있는 상태인 것 같아 다시 되돌아와 공격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여러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인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웬만한 여인의 몸통만 한 사냥매는 힘은 말할 것도 없고 속도 역시 쉬이 따라잡아 공격할 수 없을 만큼 빨라서 단번에 제압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본래 이런 상황에서는 흥분한 이들이 이리저리 날뛰다가 입지 않아도 될 상해를 입는 경우가 흔하였으니 화운은 엉망진창인 연회장을 향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매는 한 마리뿐이니 다들 흥분하지 말고 진정하세요! 차분하게 탁자 밑으로 들어가 몸을 피하고 아래에 있는 시위들을 어서 불러와 폐하와 황후마마를 보호해야 합니다!”

화운의 목소리가 비록 모두에게 닿은 것은 아니었으나 개중 그나마 침착한 몇몇은 요행히 그 음성을 들었고 다치거나 흥분한 이들을 이끌어 탁자나 기둥을 두고 몸을 피했다. 차분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그 모습들을 바라보던 화운의 눈에 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잔뜩 얼은 채로 서 있는 숙비, 비영의 모습이 보였다.

비영이 서 있는 곳은 앞뒤로 기둥이 없어 매가 가로질러 지나치기에 너무나도 좋은 위치였다. 그것을 파악하자마자 화운은 송현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비영을 향해 손을 내밀며 외쳤다.

“숙비마마! 그곳은 위험하니 이리로 오십시오!”

하지만 비영은 송현이 그랬던 것처럼 단번에 화운이 있는 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비영은 겁을 먹었고, 두려웠으며, 어쩌면 이 사태가 제 생일을 노리고 누군가가 일부러 벌인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이라도.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고 한다면. 누군가 자신의 생일 연회를 망치려고 작정하기라도 했다면.

이 황궁에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이 연화운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하여 화운이 내민 손을 보고도 비영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멀리서 매가 날아들었다. 화운의 얼굴에 곧장 낭패감이 어렸다. 매가 날아오는 방향이 정확히 비영이 서 있는 바로 그 선이었기 때문이다.

“숙비마마!”

다급해진 화운이 다시 한 번 비영을 불렀으나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정면에서 저를 향해 곧장 날아오는 거대한 새를 마주한 비영은 그야말로 전신이 얼어붙어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곁에 있던 명주는 다급하게 도망가려 우왕좌왕하던 궁녀 하나와 얽혀 바닥에 넘어진 채였다.

화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로 두면 매의 발톱은 틀림없이 비영의 정면으로 날아들게 뻔해 보였고 화운의 손엔 무기로 쓸 만한 그 어떤 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화운의 시선이 아주 짧게 저만치에 있는 이한을 바라보았다. 이한은 흡사 화운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오 태감이 그의 앞을 가로막아 황제가 위험한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는 듯했다.

어떠한 결심을 하는 순간, 세상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그 모든 광경이 화운의 눈에 아주 느리게 들어왔다. 폐하께서는 여전히 무사히 계시는구나. 찰나에도 그러한 안도를 하며 화운은 망설임 없이 앞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영은 저를 향해 날아드는 새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니, 비영의 눈에 그것은 새가 아니라 집채만 한 괴물이었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고 숨조차도 쉴 수 없었다. 주변의 소란도 그저 아득하여 물속에 잠긴 듯 귀가 멍멍했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너무나도 강렬한 죽음의 공포가 순식간에 차올라 비영을 머리끝까지 씹어 삼켰다. 눈 한 번 깜짝한 사이에 코앞까지 다가온 매의 압박감에 비영이 그저 눈을 꽉 감아버렸을 때.

“연빈마마!”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제가 아닌 연빈을 부르는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비영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이한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 앞으로 뛰어나가고 싶었다. 몇 번이나 발걸음을 떼었다. 갑자기 날아든 매가 사람들을 공격하고 연회장 바닥에 누군가의 피가 흩뿌려진 그 순간부터. 그 난장판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연화운을 본 그 순간부터 이한은 당장에라도 뛰어가 연화운의 앞을 막아서고 싶었다.

하지만 이한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단순히 오 태감과 시위들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막았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순간에도 황제인 자신이 가장 중요하며 일국을 위해 자신의 안위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는 그런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도 아니었다.

이한이 달려가 화운의 앞을 지키지 못한 것은. 자꾸만 튀어나가려는 걸음을 스스로의 의지로 몇 번이나 참고 또 참았던 이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연화운 때문에 자신이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고작해야 연화운이라서. 이한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말아야만 하는 사람이라서. 일국의 황제가 후궁 하나 때문에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황제란 그 어떤 후궁에게도 정도를 넘어서는 감정을 가지면 안 되는 존재여서. 그래서 이한은 화운이 다른 이들을 저의 등 뒤에 숨기는 걸 보면서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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