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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비마마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연빈. 내가 살다 살다 연빈의 축하를 다 받아 보는군.”
“언니이….”
이전에야 서로의 생일이면 덕담이 아닌 악담만을 주고받는 사이였으니, 비영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기색까지는 없었으나 그 내용에는 분명히 가시가 있었다. 곁에서 움찔한 송현이 비영의 팔을 슬쩍 잡아당겼으나 비영은 오히려 더 예리한 시선으로 화운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허나 화운은 비영의 도발에도 오히려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은 제가 지금 어찌 갚을 수 없겠으나 앞으로는 매해 오늘처럼 축하를 드릴 것입니다.”
비영은 화운의 대답에도 무슨 말을 하지 않고 화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히려 연빈의 뒤에 서 있는 그의 측근 궁녀는 표정을 제대로 다 갈무리하지 못하여 마음이 상한 것이 보이건만 아무리 날카로운 시선으로 눈매의 끝이며 입매를 샅샅이 살펴보아도 화운의 표정에서는 달리 불쾌한 티를 찾을 수가 없다.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겠네.”
그리고 비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런 말을 내뱉었을 때, 그들의 등 뒤에서 황후가 들었음을 크게 고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던 이들이 그와 동시에 몸을 돌리자 오로지 황후만이 입을 수 있는 화려한 금색 의복을 입은 황후, 자란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자네들이 먼저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었군. 일어나게.”
나란히 인사를 올린 후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후궁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던 자란의 시선이 밤의 달빛 아래 청아한 푸른색을 두르고 있는 연빈에게서 멈추었다. 연빈의 옷은 황후나 다른 후궁들에 비하면 지나치게 수수하다고 할 법한 모양새였으나 그 단정한 옷차림이 연화운이라는 사람을 만나 더없이 아름답게 빛났다. 이쯤 되면 옷이 날개가 아니라 사람이 옷의 날개가 되었다고 하여도 무방할 정도였다.
또한 자란이 보기에야 그의 옷이 여인들의 옷에 비하여 수수하다고 느꼈을 뿐이지 연빈이 변하고 난 뒤에 입었던 옷들을 떠올려 보면 제법 화려한 축에 속해 오늘 이 모습을 볼 황제 폐하의 반응이 어떠할지 내심 기대가 되기까지 하였다.
불경하게도 황제의 반응을 홀로 상상해 보며 입꼬리를 잠시 올렸다 내린 자란은 바로 비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숙비. 생일 축하하네.”
“올해도 이리 제게는 과분한 연회를 허락하여 주시니 황후마마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이것이 어디 나의 뜻으로만 되는 일이겠나. 자네를 아끼는 폐하의 마음이신 게지.”
“망극하옵니다, 황후마마.”
그때 비영은 밤새 불안하게 요동치기만 하였던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사소한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가진 위엄을 드러내는 황후를 마주하니 일전에 황후가 저를 지켜 주겠다 하시었던 약속이 다시금 떠오른 까닭이었다.
여전히 비영은 연빈을 다 믿을 수 없었으나 지금껏 자신이 보아온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의 마음을 믿고 있었다. 간밤, 밤이 다 새도록 비영을 괴롭혔던 그러한 최악의 상황 같은 것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거였다.
그리고 비영이 그리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시 다잡고 있을 때.
“황제 폐하 납시오!”
멀리에서 사위를 흔드는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황제였다.
그게 뭐라고. 후궁의 생일 연회에 자리하는 것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한은 창경정으로 향하는 내내 몇 번이나 손바닥에 나는 땀을 저의 용포 자락에 문대어 닦기를 반복했다.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그저 늘 그래왔듯 황후와, 비빈들과 앉아 음식을 즐기고, 숙비의 생일을 축하하며 미리 준비하여둔 선물을 내리면 그만인 일이다. 하나 마음 쓸 것도, 신경 쓸 것도 없는 그런 지극히 평범한 일과였다.
그러다가 이한은 또 시선을 내려 제 허리춤에 달려 있는 패옥을 바라보았다. 평소 이한은 장식이니 무어니 하는 것들엔 도통 관심이 없어 누가 무엇을 매어 주면 그저 매어 주는 대로 신경 쓰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오 태감이 달아 주는 족족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나 패옥을 바꾸어 달았는지 모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한이 퇴짜를 놓은 옥 장식들은 하나같이 안국의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거나, 타국에서 최고급으로 고르고 골라 보내온 것들이었다. 헌데 그것들이 오늘따라 이한의 눈에는 그것들이 죄다 어찌 그리 못나 보이던지.
그렇게 몇 번이나 바꾸어 달았어도 결국 마음에 쏙 드는 것을 찾지 못해 결국 아무 거나 차고 나왔는데 내내 그것이 거슬려 이한은 자꾸만 패옥을 쥐었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했다. 또다시 당연한 말이지만, 정말로 ‘아무 거나’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수화원으로 가는 길에 이한이 몇 번이나 돌아가 이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달고 올까, 하는 고민을 했다는 걸 안다면 천하의 오 태감도 결코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여 그렇게 수화원에 다다라 창경정의 앞에 섰을 때. 괜히 손바닥을 한 번 더 옷자락에 문지르고, 마음에 들지 않는 패옥을 또 괜히 한 번 쥐었다가 놓아버리고, 그렇게 창경정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그리 인사를 올리는 이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그 어떤 노력을 할 필요도 없이. 애초에 그러고자 하였던 의도조차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단번에 연화운을 찾아내 그를 눈에 담았을 때.
그때 이한은 깨달았다.
아, 내가 그토록 초조하고 긴장을 하였던 것은. 오늘따라 매번 크게 달라질 일이 없이 있는 용포도, 생전 신경 쓴 일이 없는 패옥도 자꾸만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그것은.
전부 다 저 사람 때문이었던 모양이라고. 연화운. 이제는 더 새로울 것도 없는 그 이름을 이제 와 자꾸만 새롭게 마음에 걸리고 또 걸리게 만든 저 사람 때문이었노라고.
그 마음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이한은 그렇게 한참, 화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한은 정말로 애썼다. 정말로 진지하게 애를 쓰고 있었다. 앞에 앉아 있는 이들 중에서 연화운에게만은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고 정말 무던히도 눈에 힘을 주고 또 주었다.
그가 오늘 입은 옷은 이한은 이미 어제 정안궁에서 본 옷이었지만 정안궁의 어린 궁녀들이 유난을 떤 건지 갖가지 장식이 덧대어져 있었다.
이한은 어제 이미 밤에 보는 화운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창경정에 어린 달빛 아래, 그 너머로 밤의 기운에 잠겨 있는 주안성의 풍경을 두고 선 화운의 모습은 평범한 세상의 것이 아닌 듯 가히 황홀하다 할 정도였다. 오 태감이 곁에서 은근히 눈치를 줄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화운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던 이한은, 이후에는 절대로 화운을 쳐다보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눈앞에서 연회의 흥을 돋우며 춤을 추는 무희들이 나부끼는 옷자락 사이로 그가 한 번 보일 때마다. 아주 잠시만 긴장을 풀어 시선을 돌릴 때마다. 그럴 때마다.
이한은 자꾸만 눈치도 없이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화운 때문에 정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물론 화운이 정말로 저의 시선에 들기 위해 무엇을 한 건 아니었지만 하여간에 이한은 자신의 눈이 자꾸만 화운에게 향하고 또 그에게서 멈추는 것이 전적으로 그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화운은 황제 쪽은 아예 바라보지도 않고 조용히 앉아 공연을 바라보다가, 자그마하게 음식을 입에 넣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으나 이한이 생각할 때 이 모든 것은 아무튼 간에 전부 다 화운의 탓이다.
정작 그때의 화운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진.”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 사이로 조용히 저를 부르는 화운의 목소리에 아진이 허리를 숙여 귀를 화운에게 가까이 가져다 대자 화운이 주위의 눈치를 슬며시 한 번 보더니 속삭였다.
“여기서 네게 음식을 권하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진은 놀라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저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화운 스스로도 자신의 질문이 좀 과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는지 살짝 어깨를 움츠리며 커다란 눈을 깜빡이고 있다.
사실 연화운이 된 이후 화운은 제가 이전의 삶에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산해진미를 경험하며 매일을 놀라움의 연속으로 지내긴 했으나, 오늘 처음으로 맛본 궁중 연회의 음식들은 그중에서도 단연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드시게 될 음식이니 각별히 신경 써 준비했을 것이 당연한 음식들은 입에 넣는 즉시 화운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어, 문득 화운은 자신의 옆을 지키고 서 있는 아진에게도 이 맛을 보여 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마마, 그건 당연히 안 될 말씀이죠.”
“그렇지…? 나도 그럴 것 같긴 했어….”
그게 뭐 대단하게 아쉬울 일이나 된다고. 애초에 아진 같은 사람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고 아진 역시 먹어 보고 싶다 욕심내지도 않고 있는데 그저 종에 불과한 이에게 이 음식 하나 내어 주지 못하는 게 뭐가 그리 서러운 일이라고.
꼭 제일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막힌 어린아이처럼 침울하게 눈꼬리가 처진 화운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진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퍼지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서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제 주인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마구 쪼물거리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속에서 마구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