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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이만 쉬셔야지요.”
명주는 늦은 밤까지 창가에 앉아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는 저의 주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명주의 말에도 숙비, 비영은 대답도 없이 그저 창밖의 어딘가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비영의 옆얼굴은 명백하게 들떠 있는 표정은 아니라 명주 역시 덩달아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일은 숙비의 생일이니 사실 지금 이 궁에서 누구보다 들떠 있을 사람은 제 주인이어야 옳은 일인데, 어떻게 보아도 비영의 지금 모습은 들뜨거나 설레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가요, 마마….”
대답이 없는 비영이 걱정되어 명주가 다시 묻자 그제야 고개를 돌린 비영은 낮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심은 무슨….”
“생각이 많아 보이십니다. …폐하께서 오시지 않아 그러십니까?”
“아니다. 그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명주가 다시 한 번 더없이 조심스럽게 물었던 질문에도 비영은 그저 조금 더 깊어진 눈을 하였을 뿐 마찬가지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황제가 누구의 시침도 받지 않고 안정전에서만 머문 지도 벌써 꽤 시일이 흘렀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의 황제는 어느 때에는 황후는 물론이요, 비빈들 모두를 고루 살펴 주다가도 또 어느 때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이도 한참 동안 그 누구의 밤도 취하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다.
본래 황제가 여인을 취하는 일은 그 자신의 색욕을 충족시키는 일과 후사를 보기 위해서의 두 가지 이유가 있을 터인데 이한은 두 가지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다 못해 경계하기까지 했으니 이한을 모시는 비빈들에게는 이런 밤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평범하여 속을 앓을 필요도 없었다.
다시 말해 폐하께서 걸음을 하지 않는 건 후궁들 사이에서도 이미 익숙한 일이고, 그것이 꼭 운화궁에만 벌어지고 있는 일도 아니며, 사실상 지금의 비빈들은 이전의 연화운을 제외한다면 서로 사이가 좋아 딱히 황제의 밤으로 총애를 다투며 서로를 경계해야 할 일조차 없는 관계이니 비영의 말대로 달리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해하거나 우울해할 일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밤, 비영이 이리 쉽게 자리에 들지 못하고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건 어떠한 연유에서인가.
“허면 왜….”
“…….”
“아직 정안궁을 신경 쓰십니까.”
결국 명주가 아까부터 줄곧 묻고 싶었던 이름을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리 좋은 날을 앞두고 저의 주인이 심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로 정안궁의 연빈 말고 다른 이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명주의 짐작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비영이 고개를 돌려 명주를 바라보았다. 비영은 오늘도 폐하께서 잠시였지만 정안궁에 걸음 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다.
후궁으로 입궁하는 모든 비빈들이 그러하듯, 비영에게도 그의 입지와 가문의 위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후궁의 아비가 조정에서 힘을 얻으면 내명부 안에서의 후궁의 입지 역시 강해지고, 안에서 후궁이 총애를 얻으면 그로 인한 폐하의 성은이 조정의 아비에게까지 이르는 일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만큼 당연했다.
비영은 연빈과 마찬가지로 공신 가문의 딸로 간택을 받아 입궁하였으나 그의 아비는 연빈의 아비인 연주원과 비교하자면 당연히 뒤쳐져 있었다. 하지만 내명부 안에서의 위치라고 한다면 감히 연빈이 숙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기에 비영은 그동안 저와 저의 가문이 적절히 서로를 돕고 이끌어 주며 잘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요즘의 비영은 불현듯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에 이 균형이 무너지면 어찌 될 것인가.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은 절대로 없으리라 생각을 하면서도 연빈이 덜컥 폐하의 총애라도 받게 되어 후궁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넘어서게 되어버린다면 비영 그 자신과 그의 가문에 과연 어떤 일이 닥치게 될 것인가, 하는 그런 생각을.
물론 비영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의 황제는 어느 후궁의 치마폭에 놀아날 분이 아니시고, 그들의 황후는 총애를 받는 한 후궁이 다른 이를 핍박하도록 놓아둘 분도 아니셨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황제 폐하는 좀처럼 어느 후궁을 마음에 품어 익애하실 분이 아니시니 이 모든 것은 다만 부질없는 걱정이요, 고민일 뿐임을 비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문득 이전에는 단 한 번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던 소식을 듣고 나면.
황제가 정안궁에 발걸음을 하시고, 연빈과 나란히 수화원을 거니시며, 내무부에서는 총관이 직접 정안궁에 발걸음을 하고, 요즘은 어딜 가나 온 황궁이 연빈의 이야기로 떠들썩하다는 이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이 모든 것이 결국 자신의 목에 칼이 들이닥치게 될 훗날의 전조는 아닌가 싶어서. 연빈과 서로 부딪히고 다투었던 날들의 대가가 그런 식으로 저의 목을 졸라오지는 않을까 그런 불안함을 아예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되었다. 이만 쉬자꾸나.”
비영은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이어지는 저의 마음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일이 되면 연회 자리에서 연빈을 마주하게 될 거라 생각하니 일 년에 한 번 있는 생일조차도 쉽게 반겨지지가 않는, 비영의 밤이었다.
서천은 정안문이라고 쓰여 있는 정안궁 초입 문의 현판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 밤부터 서천은 정식으로 정안궁에서 보초를 서도록 배정을 받았다. 결국 끝까지 마음을 돌리지 않는 서천에게 도명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며 볼 때마다 따져 물었지만 서천은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서천 역시 제가 무슨 생각으로 정안궁에 오려 한 건지 스스로의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막연히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연빈을 살펴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아마도 그 이면엔 하운의 목숨을 대신 바치고 살아난 사람이 이제 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것이 불쾌하고 억울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제가 연빈의 가면을 벗겨내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 하여도 하운은 이미 죽어 돌아올 길이 없고, 연빈의 민낯을 밝힌다고 한들 그것이 하운의 이름을 드높여 주는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안 들어가고 뭐 해?”
서천과 함께 온 동료가 멍하니 문만 바라보고 선 서천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서천은 그저 힘 빠진 얼굴로 한 번 웃어 보이곤 그와 함께 천천히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언가 행동하려 했다면 하운을 잃기 전에 해야 했는데. 그게 무엇이든 하운이 곁에 있을 때 했어야 했는데.
서천은 뒤늦게 만나 삶에 몇 안 되는 서로의 벗이 된 하운이 그저 신기하고 좋았다. 앞으로 자신들에게 수없이 많은 날들이 있을 줄로만 알았다. 친우로서 더 많은 낮과 밤을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더 깊이 의지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이 황궁 생활을 함께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찰나와도 같았고 서천은 어떻게 더 손을 써 볼 새도 없이 하운을 잃어버렸으니.
소용이 없는 걸 알면서도 서천은 길을 잃은 미련을 향해 걸었다. 숙비의 생일이라 종일 황궁 안이 떠들썩했어도 그것은 서천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숙비의 생일 연회는 창경정에서 열렸다. 창경정은 수화원 내에 있는 규모가 가장 큰 정자로 높은 지대에 돌과 흙으로 다시 지반을 쌓아 그 위에 정자를 올려, 위에 오르면 주안성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밤이 되면 달이 가깝게 떠오르기도 하여 그 정취가 더없이 아름다웠으니 연회를 열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비영과 함께 나란히 정자에 오른 송현은 저만치 가장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연빈, 연화운을 발견하곤 저도 모르게 비영을 두고 쪼르르 화운의 앞으로 달려가 입을 열었다.
“연빈! 일찍 와 있었네요?!”
“네. 어서 오세요, 정빈.”
“지난번에 보내주신 계화떡 너무 맛있게 먹었어요. 그래서 감사 인사를 하러 갔었는데 정안궁에 안 계셔서….”
“그러셨습니까. 입맛에 맞았다니 다행입니다.”
갑자기 그날 이곳 수화원까지 왔다가 폐하 때문에 헛걸음을 해야만 했던 일이 떠오른 송현이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중얼거리자 그런 송현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화운이 웃었다. 그 순간 화운의 곁에 서 있던 아진은 연회 자리를 준비하느라 돌아다니고 있는 궁녀들이 저마다 멈칫, 하며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걸 보았다. 화운이 창경정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연신 심상치 않은 시선들을 느끼고 있었던 게 아진의 기분 탓은 아닌 모양이었다.
서서와 함께 오늘 마마께서 새로운 의복을 입고 연회에 가시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시선이 또 따라붙을지를 잔뜩 기대하였던 아진으로서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화운과 다시 마주한 송현의 마냥 즐거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화운의 시선이 송현으로부터 살짝 빗겨난 건 어이가 없는 얼굴로 송현의 뒤통수를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며 이제야 근처에 다다른 숙비, 비영 때문이었다. 이내 화운이 다가온 비영에게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숙비마마를 뵈옵니다.”
“예를 거두시게.”
그제야 제가 뒤에 내버려두고 달려온 비영이 생각난 송현이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이내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비영을 돌아본다. 비영은 여전히 황당한 표정으로 송현을 흘깃 보자 괜히 딴청을 피우며 눈동자를 한 번 데구루루 굴린 송현이 화운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 비영의 옆에 붙어 섰다. 화운이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