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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69)화 (69/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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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 말은….”

시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상황은 더더욱 심각해졌다. 아니, 내 말은 너의 시침을 받겠다는 게 아니고…! 하는 말을 간신히 꿀떡 참아 넘긴 다음에는 더더욱 머릿속에 꼬여서 이한은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정도였다.

게다가 시침이라니. 그 단어는 도대체 왜 지금 이 순간 떠올린 건지. 이제는 이한의 머릿속에선 화운이 제 아래에 곱게 누워 있는 모습까지 떠오르기 시작해 절로 등골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때, 방금 전까지 자신도 조금 놀란 얼굴로 이한을 바라보고 있던 화운이 어느새 차분해진 목소리로 당황한 황제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이 황궁 안에 폐하께서 머물지 못하실 곳이 어디 있고, 폐하를 반기지 않을 곳이 또한 어디에 있겠습니까.”

“…….”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당연히 정안궁 또한 언제든 폐하를 반길 것이옵니다.”

그러나 정석과도 같은 화운의 대답에 이한은 자신의 마음이 순식간에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화운의 대답은 이한이 궁금했던 것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황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에 대해 물은 것이다.”

“예…?”

“나는 황제이니 내가 온다고 하면 정안궁은 당연히 반겨야 하겠지. 그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아.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다.”

한번 마음이 가라앉자 그다음에는 애써 모른 척하였던 욕망이 조금 더 선명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한이 궁금했던 건 자신이 정안궁에 자유롭게 오고 가도 된다는 그러한 대답 따위가 아니다. 고작 그런 말을 들으려고 체통도 내다버리고 시무룩해지고 말을 더듬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게 아니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내가 여기에 오는 것이 너를, 불편하게 만드는지.”

이한은 연화운의 감정을 알고 싶었다.

“내가 오는 것이 너에게, 싫고 어려운 일인지.”

화운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황제가 오니 당연히 반겨야 하는 그런 거 말고. 법도 따위를 논하는 게 아니고.”

“폐하….”

“내가 오는 것을 ‘네가’ 반가워하는지, 그것을 알고 싶은 것이야.”

이제 와 정말 처음으로 이한은, 연화운이 궁금했다.

폭풍 같은 이한의 질문을 눈앞에서 마주한 화운은 황제 폐하께서 하문하셨는데도 감히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이한이 그랬듯이 이번에는 화운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연화운의 마음을 묻고 있었지만 화운은 그때, 하운으로서의 자신의 감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의 연화운이야 어떤 이유에서든 황제의 방문을 반겼을 것이다. 그게 화가 나서든, 화운을 탓하기 위해서든 이유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황제가 다른 후궁의 처소가 아닌 자신의 처소로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황제가 화를 낼 게 뻔한 일들도 서슴없이 저지르곤 했을 터였다.

그러니 ‘연화운’의 생각을 묻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그는 어떤 이유에서든 폐하께서 오시기만 하면 그저 좋을 거라고, 반가워할 것이라고. 그렇게 대답하는 게 옳았다.

그렇다면 하운은 어떨까. 연화운이 아닌, 그러나 이제는 연화운으로 살고 있는 하운의 마음은 어떠한가. 화운의 몸으로 깨어나 황제의 후궁이 되자마자 그로부터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아야만 했던 하운은 황제를 대하기 껄끄러운가. 그를 만나는 것이 저어되는가. 그분이 또다시 저를 탓하고 돌아서실까 봐 무서워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나.

“폐하.”

거기까지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한 화운이 입을 열었다. 쉬이 감정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담담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긴장한 이한이 힘을 주어 입술을 꾹 다물었고 화운은 말을 이었다.

“…저는 오로지 폐하 한 분을 보고 입궁을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연화운의 시작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하운의 시작이기도 한 이야기였다. 그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아무도 의미를 두지 않는 그런 하찮은, 어느 천한 이의 주제 넘는 욕심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그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 누군가의 마음이다.

“비록 제가 이전의 많은 날들에 대한 기억을 전부 잃었지만.”

하운은 연화운이 아니었지만. 비록 이리 거짓으로 황제의 앞에 서 있는 대역무도한 자였지만.

“기억을 잃은 후에 겪은 일만으로도 제게 폐하는 더없이 다정하고 자애로우셨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제게 건네어 준 단 하나의 허락으로. 비록 그분이 뜻하신 바는 아니었겠으나 오로지 황제가 내어 준 그 작은 숨 쉴 틈으로 삶을 버텨내고 있는 화운이었으니,

“헌데 어찌 제가 폐하를 저어하겠습니까. 그게 언제든, 무슨 일로 오시든, 폐하의 용안을 뵐 수만 있다면 저는 이유를 막론하고 그저 기쁠 것입니다.”

화운은 그 어떤 핑계로도 감히 자신의 마음을 꾸며낼 수가 없음이었다.


“폐하.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이한은 조금 전까지 깍듯한 태도로 보고를 올리던 군기대신 무헌이 정식 보고가 끝나자 물러나기 전에 제게 슬쩍 묻는 질문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기분 좋은 일이라니…?”

평소 황제와 종종 검을 나누기도 한 덕분에 대신들 중에는 황제와 제법 스스럼없이 지내는 편인 무헌은 황제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보고를 받으시는 내내 미소를 짓고 계시기에….”

“내가?”

“예. 폐하께서 그러셨습니다.”

하지만 무헌의 거듭된 말에도 이한은 자신이 웃고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다는 듯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한은 자신이 그저 진중하게 무헌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무헌은 황제가 자신이 웃고 있었다는 걸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 놀라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이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입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미소를 지었다니. 무헌의 보고는 딱히 크게 골치가 아픈 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웃으며 들을 만큼 좋은 일도 아니었다. 이한은 서둘러 자신이 무헌의 보고를 듣기 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한의 등골이 서늘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폐하…?”

“…아니. 아니다. 좋은 일은 무슨. 이만 물러가 보도록.”

무헌은 홀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당황한 듯 굳어지는 황제의 얼굴을 보며 의아해하였으나 더 말이 없이 물러나라 하는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곤 그 앞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미친 게지….”

그리고 무헌이 돌아간 자리에 홀로 남은 이한은 두 손으로 저의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입술 새로 절로 그런 말들이 흘러나왔다. 왜냐하면. 그러니까 왜 그러하냐면.

무헌의 보고를 받기 전 이한이 생각하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연화운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한은 폐하의 용안을 뵐 수만 있다면 이유를 막론하고 그저 기쁠 거라는 연화운의 대답을 몇 번이나 곱씹고 있었다.

그러자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 아래에서 입술이 또 반사적으로 꿈틀거렸다. 그 감각을 깨닫자마자 놀란 이한이 황급히 손을 떼고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본다. 정말로, 연화운이 한 말을 생각하자마자 이한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지. 왜 미소를 지은 거지.

이한은 정말로 진지하게, 아주 심각하게 고민에 빠졌다. 연화운 때문인 것은 둘째 치고 사실 이한에게는 정무를 보는 중에 이렇게 미소 지은 것 자체가 너무나도 낯선 일이었다. 물론 오랫동안 골치를 앓았던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어 웃거나 했던 적은 있었지만 일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생각 때문에 미소를 짓는다는 건 이한에겐 너무나도 낯선 경험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한은 사적으로 후궁들을 떠올리는 일 자체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이한은 황후를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했고 연화운을 제외한 다른 후궁들에게 역시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만큼의 애정은 전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생각하며 이유도 없이 미소를 짓는 일은커녕 사실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 사적으로 그들을 떠올린 적도 거의 없었다.

일부러 그러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전혀 필요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생각하여야 하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고, 고민하여 올바르게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일이 매일같이 쌓이고 있는데 굳이 정무를 보는 시간에 후궁을 떠올려 생각할 일이 뭐가 있겠느냔 말이다.

그랬는데. 그랬던 자신이. 이토록 대책 없이 생각의 틈을 다른 누구도 아닌 연화운에게 내어 주고 있었다니.

이한은 다시 한 번 한쪽 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저의 입가를 가만가만 매만져 본다. 분명 저의 얼굴이고 저의 입술인데도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폐하께서 오신다면 언제든지 기뻐할 거란 화운의 말이 다시 한 번 떠오름과 동시에, 그가 자신의 방문에 지금까지처럼 놀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반가워 환하게 웃으며 저를 반기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상상하였다.

그러자 또다시 마치 습관이라도 된 것처럼 얼굴 가득 떠오르는 미소를 이번에는 알면서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도대체 이게 뭐, 뭐지…?”

이한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연신 제 입가를 매만졌다가,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가, 다시 또 연화운을 상상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생경하여 두렵고 낯선 만큼, 동시에 이상한 기대와 설렘으로 심장을 쿵쿵 울리게 하는.

하여간에 아주 신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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