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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어울리는구나.”
그리하여 더없이 새롭고도 낯선, 그러나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기도 한 화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이한이 불쑥 그런 말을 뱉어버린 건 결코 무리인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말을 뱉은 순간 이한은 그것이 제가 할 만한 말이 아님을 깨달았으나 이미 주워 담기엔 늦었고 솔직히 이한은 그 말을 굳이 주워 담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이한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내일 연회에 입고 나와도… 무리는 없을 것이야.”
화운이 그 옷을 입고 화려한 밤 연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싶다는 말을 그리 하여도 무리는 없을 것이란 말로 대체하면서도 이한은 그 연화운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모두가 모이는 자리에 저 옷을 입을 때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화려하게 꾸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회에는 본디 연회에 어울리는 예절로서의 화려함도 있기 마련이니까. 아니, 굳이 더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밤을 밝히기 위해 달아놓은 등불이 햇살을 대신하여 화운을 비춰 줄 것이고, 달빛 아래의 화운이 얼마나 빛나는지는 이한 역시 이미 몇 번이나 실감하여 잘 알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니 말이다.
또다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이한은 달빛 아래에 같은 옷을 입고 선 화운의 모습을 상상하느라 주먹을 쥐었고, 화운은 잘 어울린다는, 폐하의 입장에서는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자신을 배려해 주시느라 한 말씀이 분명한 그 말을 두고도 홀로 심장이 쿵, 하고 뛰어서 숨을 참았다.
그런 두 사람의 적막을 깨준 건 마침 차와 과일을 가지고 들어온 아진이었다. 들어오자마자 느껴지는 숨이 막힐 듯한 적막에 살짝 당황했으나 폐하의 표정도, 제 주인의 표정도 싸늘하거나 차갑다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수줍어 보였다. 혼자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인 아진은 들고 들어온 것들만 황급히 둘의 사이에 놓아두고 서둘러 뒷걸음질을 쳐 그곳을 빠져나갔다.
적어도 아진이 곁에 있어 줄 거라 생각했던 화운은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나가버리자 괜히 더 어색해져 눈동자를 한 번 굴려 보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한참 전에 물었어야 할 질문을 겨우 입에 올렸다.
“헌데 폐하, 정안궁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한의 표정이 샐쭉해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운의 질문을 받는 순간 갑자기 기분이 몹시도 불쾌해져서 조금 전까지 민망해하던 것도 잊고 이한이 입술을 궁싯거리며 말했다.
“너는 그 질문 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
“예?”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을 온 것도 아니고, 황제가 후궁의 처소에 오는데 꼭 이유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매번 이유를 물어보니….”
“아….”
“아니면… 내가 오는 것이 싫은 것이냐…?”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 혼자 조금 주눅이 든 목소리로 묻는다. 말마따나 황제가 후궁의 처소를 찾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후궁의 입장에서는 기쁘기 그지없는 일인데, 매번 올 때마다 왜 온 것이냐 그리 이유를 물어대기 바쁘니 이한은 이제 화운이 아예 저를 불편하게 여기어 정안궁에 드나드는 것도 마땅치 않아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번 이렇게 칼 같은 태도로 왜 왔느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화운은 단 한 번도 ‘따져 묻는’ 태도로 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이미 이한에게는 화운의 그 목소리가 썩 냉정하게만 느껴지고 있는 참이다.
“내가… 그러니까 내가 너를 자꾸만….”
내가 너를 자꾸만 무시하고 모질게 대해서. 그래서 이제는 아예 내가 오는 것조차도 싫은 것이냐고. 이한이 저도 모르게 그리 묻고 싶어서 더듬거리며 말을 꺼내고 있을 때 그보다 조금 더 빨리, 화운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폐하.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십니까….”
당황한 것은 화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후궁의 처소를 찾는 일이야 보통은 물론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 굳이 연유를 물을 일이 아니지만 연화운은. 그러니까 연화운은 연화운이지 않았나.
화운의 입장에서는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정안궁을 찾을 일이 없는 폐하께서 오셨으니 당연히 무슨 할 말이 있으시겠거니 생각하여 그리 물었던 것인데 이한이 갑자기 이리 나오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화운이 말을 이었다.
“저는 다만… 아무 일이 없다면 폐하께서 정안궁에 오실 일이 없다고 생각을 하였기에 그러한 것인데….”
잔뜩 불만 많은 어린아이처럼 굴던 이한의 행동이 일순 멈췄다. 그제야 이한은 자신이 또다시 화운에게 얼마나 뻔뻔한 질문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화운으로 하여금 황제가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지만 정안궁으로 오실 거라 믿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본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그러하다. 한번 어느 방향으로 고정이 되고 나면 뒤늦게 그 방향을 트는 것은 매우 어려운 법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때때로 지나온 시간보다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을 더 들여야만 하며, 설령 그런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만큼 관계가 완벽하게 변할 거라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한은 살면서 그런 고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황제였기 때문이다. 황제에게는 그 방향이 얼마나 틀어져 있든, 얼마나 진행이 되어 있든 상관없이 한 순간에, 말 한 마디로 그것을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힘이 있었다.
설령 수십 년 동안 황제의 오해를 받으며 억울한 고초를 당했다고 한들 내가 오해하였으니 지금이라도 그대와 나 사이를 돌이켰으면 한다는 황제의 말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냔 말이다.
속으로야 불만을 가질 수 있을지언정 감히 천자의 앞에서 나는 아직 당신을 용서할 수 없고, 당신이 원하는 만큼 친밀한 관계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 같은 건 절대로 할 수가 없는 일이다. 하여 이한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제가 맺고 끊은 관계에 대해 후회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연화운이라면? 이한은 솔직히 화운이 그동안 해왔던 행동에 비해 처벌이 지나치게 약했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가 연화운과의 관계에서 지금까지 후회할 만하다고 여기는 일은 애초에 그를 후궁으로 입궁시키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한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화운이 그런 말을 하는 순간. 저를 탓하러 오는 일이 아니라면 황제가 정안궁을 찾을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사소하게 한담을 나누고 싶다거나,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어서라거나, 그러니까 보고 싶어서, 같은 그런 이유로는 절대로 정안궁까지 올 일이 없을 거라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화운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욱신거리고 숨이 막혀왔다.
물론 연화운이 정확히 ‘저를 탓하러 오는 일’이라는 말을 쓴 건 아니었지만 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틀림없이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운을 띄워놓고도 이한은 말을 잇는 것을 망설였다.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지 스스로도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다.
후회하는가? 아니다. 이한은 지난날 연화운을 처벌했던 그 모든 행동들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때의 연화운은 악독하기 그지없었고 처벌받아 마땅했다.
연화운이 변했다고 했을 때 쉽게 믿어 주지 않았던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전에 수없이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매번 이한의 기대를 고스란히 배신한 채 언제나 가장 나쁜 선택지를 골랐던 건 연화운이었다. 그랬던 이가 갑자기 자신이 변했다고 하는 말을 단번에 믿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니 이제 와 왜 그때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것 역시 마땅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걸 전부 알고 있는데도.
왜 이한은, 마찬가지로 그 모든 것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묵묵히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는 화운의 얼굴을 마주하면 이리 어려운 마음이 드는 건지. 그래도 변하겠다는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지는 말걸.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왜 자꾸만 그런 생각이 불쑥불쑥 들어오는 건지.
“내 말은… 이제 내가 너를 달리 보겠다 하지 않았느냐.”
말을 고르고 고르던 이한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너와 나도… 그러니까 평범한….”
하지만 이한은 곧바로 무언가 자신이 말을 잘못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범한 황제와 후궁처럼….”
뒤이어 뱉은 말은 더 가관이었다.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고, 어떻게든 끝을 맺기는 해야 하는데 좀처럼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평범한 황제와 후궁처럼, 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기본적으로 황제와 후궁의 사이는 평범한 관계도 아닐 뿐더러 황제와 후궁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해보았자 이따금 식사를 하거나, 기껏해야 차를 마시거나 하는 부수적인 것을 다 빼놓고 보면 가장 중요한 일은 시침을 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