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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내일 숙비마마의 생일 연회에 이 옷을 입고 가시면 되겠어요!”
급기야는 손뼉까지 치며 호들갑을 떨던 서서가 소리치자 옆에 있던 아진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바라본 화운은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내일 연회의 주인은 숙비마마신데 내가 눈치도 없이 화려하게 꾸미고 가면 되겠어? 이것은 잘 넣어두고, 미리 얘기하지만 내일은 최대한 단정하게 하고 갈 것이야.”
“하지만 마마! 원래 연회는 다들 최대한 아름답게 꾸미고 가는 법인걸요!”
“맞아요. 이것도 사실 다른 마마들에 비하면 그리 화려한 것도 아닌데….”
화운의 대답에 똑같은 얼굴로 시무룩해진 서서와 아진이 번갈아가며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진과 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안궁의 궁인들은 요즘 매우 마음이 들떠 있었다. 더 이상 연빈마마가 전처럼 자신들을 괴롭히지 않기 때문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들어 정안궁 밖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에는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다들 정안궁 궁인들을 무시하거나, 불쌍해하거나, 비웃거나 하여간에 좋게 보는 이들이 아무도 없어 안 그래도 고된 마음에 더더욱 서러움이 쌓였다. 그런데 연빈마마께서 달라지시고 난 뒤,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문과 함께 마마께서 매일 아침 황후궁에서 정안궁까지 걸어 다니기 시작한 뒤 정안궁 궁인들은 저들을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부러움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처음엔 연빈이 정말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그 또한 연빈의 수작이나 뜬소문은 아닌지 그것을 가늠하려 가늘어지던 그들의 눈빛은 화운의 다정함을 코앞에서 경험한 궁인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전혀 다른 빛깔로 변하기 시작했다.
화운이 평소 입고 다니던 의복의 형태를 바꾼 후부터는 대놓고 연빈을 미공자 같다 칭송하며 수군거리는 입들이 많아졌고 화운이 한 번 누군가를 향해 웃어 주고 상냥하게 말을 걸어 줄 때마다 그 얼굴과 분위기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오죽하면 연빈마마의 모습을 한 번 보기 위해 그가 문후를 마치고 돌아가는 시간이 되면 그 길을 기웃거리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니 늘 조롱과 동정의 대상이기만 하였던 정안궁의 사람들은 이제 와 조금씩 저들을 부러워하는 타인의 시선을 경험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언제나 주눅 들어 눈치만 보고 다녔던 정안궁 궁인들이 얼마나 기세가 등등하여 어깨를 활짝 펴고 온 궁을 누비고 다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같은 이유로 이번에도 모두의 앞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저들의 주인을 뽐낼 생각에 들떠 있던 아진과 서서가 종종걸음으로 화운에게 다가와 눈꼬리를 추욱 늘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마마, 그러지 말고 이거 입고 가세요. 네? 정 총관이 직접 정안궁까지 온 정성도 생각을 해 주셔야죠오… 네?”
“맞아요, 맞아요. 이렇게 정성을 들인 옷을 연회에 입지 않고 썩혀두면 손끝이 다 닳도록 수를 놓았을 수방 아이들은 또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네에?”
아진과 서서는 서로 짠 것도 아닌데 아주 죽이 맞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말을 이어갔다. 저들의 주인을 설득하는 데에는 다른 무엇보다 아랫것들의 정성과 고생을 들먹이는 게 가장 잘 먹힌다는 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둘 다 파악이 끝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 총관의 정성과 수방 아이들의 고생을 입에 담자마자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화운이 무어라 말도 못하고 있자 아진과 서서가 냉큼 화운에게 다가가 양팔을 잡고 흔들며 애교를 피워댔다.
“마마, 그러니까 내일 이거 입으셔야 해요, 아셨죠? 마마께서 이 옷을 입고 연회 자리에 서시면 정성을 다하여 이 옷을 만든 수방 아이들이 정말로 뿌듯하고 기뻐할 거예요.”
“자신들이 만든 옷이 폐하께서도 계시는 곳에서 드러나면 아이들에게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어요.”
하여 결국 두 아이들의 성화를 이기지 못한 화운이 한숨을 한 번 푸욱 내쉬고 그러마, 하고 대답을 뱉으려 했을 때. 그들의 뒤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내가 있는 곳에서 무엇이 드러난다는 것이냐?”
그것은 기어코 읽던 서간을 내려놓고 정안궁으로 걸음을 한 황제의 목소리였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이한은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는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일어나라.’ 하고 대답을 한 후 시선을 돌려 괜히 딴청을 피웠다. 별다른 일도 없이 ‘또’ 정안궁으로 걸음을 한 자신이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민망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운이 몸을 일으킨 후에도 다른 곳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마침내 다시 시선을 돌려 제 눈앞에 선 화운을 마주 본 순간. 이한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마터면 아, 하고 탄성을 터트릴 뻔하였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한의 시선이 짧은 시간에 화운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가 오르기를 반복했다.
굳이 따지자면 이렇게 놀랄 만큼 화려한 복식은 아니었다. 은은한 하늘색도 후궁의 옷차림으론 과히 옅은 색이었고 관처럼 올린 머리에 둘러 비녀를 꽃은 머리장식에 놓인 꽃모양 장식이 그나마 화려하다면 화려한 부분이었으나 그것조차도 보통 비빈들의 머리장식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찰나였지만 이한은 저의 앞에 선 화운을 보고 눈이 부시다고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옅은 하늘과도 같은 색은 희고 투명한 그의 피부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고 볕이 드리워질 때마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흰 자수는 호수에 어린 햇살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문으로 다소 놀란 얼굴에 미미한 반가움을 머금고 있는 그, 연화운의 얼굴은 이한이 막연히 떠올리기만 하던 기억 속의 얼굴보다도 더, 더 곱고 아름다워서.
“소인이 차를 내오겠습니다…!”
한참을 말이 없이 화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아진이 얼굴 가득 피어오르는 미소를 간신히 숨겼다. 서둘러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올리고 서서를 끌고선 처소 밖으로 나가자 졸지에 이한과 화운만 단둘이 남아버린 내실에 잠시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화운이었다.
“앉으시지요, 폐하.”
그제야 이한은 제가 멍하니 선 채로 하염없이 화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걸 깨닫고 흠흠, 헛기침을 괜히 한 번 하고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느냐.”
그리 제 입으로 말을 꺼내면서도 이한은 이 상황을 몹시도 어색하게 느꼈는데 예고도 없이 정안궁까지 와서 처음 묻는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사소한 물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연화운과 제가 언제부터 이토록 별것 아닌 질문을 나누는 사이였다고. 언제부터 이리 갑자기 찾아와 평범하게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사이였다고.
그것이 어색하면서도 동시에 묘한 설렘을 불러일으켜 이한이 괜히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는 사이, 이한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자신의 옷을 한 번 내려다본 화운이 민망한 듯 살짝 뺨을 붉히곤 대답했다.
“그것이… 내무부에서 새 옷을 가져왔는데 몸에 맞는지 잠시 입어 보았던 참입니다.”
“헌데 어째서 내 이름이 나왔던 것이지?”
연이은 황제의 물음에 화운이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이한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인다. 폐하께서 물으시니 대답을 아니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아이들이 구구절절 늘어놓았던 말을 그대로 할 수는 없어 입술만 괜히 물었다 놓기를 반복하다가 이내 화운이 입을 열었다.
“내일 숙비마마의 생일 연회 때 폐하께서도 오시니… 아이들이 이 옷을 입으면 어떻겠냐고 하여서….”
“아….”
그 말이 무어라도 자꾸만 얼굴이 붉어지고 민망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새 옷이 왔고, 어린 궁녀들이 새 옷에 괜히 들떠 연회에 이 옷을 입으시면 어떠하냐 말했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말을 옮기는 동안 애꿎은 소맷자락만 손에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아마도 아진과 서서가 괜히 저를 앞에 두고 잘 어울리느니 아름다우니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엔 자신의 외형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는 화운인데, 그 둘이 방금 전까지 그런 이야기들을 잔뜩 하고 가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모습이 폐하께 어찌 보일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화운의 이야기가 이상하게 민망하고 어색한 건 이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옷 이야기를 꺼내자 이한은 다시 한 번 눈앞의 화운의 모습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겨우 생각을 떨쳤던 것이 무색하게 그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하고 있는 머리 장식이, 사실은 그런 옷 따위가 아니라 그저 그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화운의 얼굴이라고 칭하기에도 무언가 맞지가 않았다. 연화운의 아름다운 얼굴이야 그간에도 질리도록 오래 보아왔으나 최근의 화운은 단순히 곱고 어여쁜 그 얼굴 때문에 아름다워 보인다고 하기에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것을 무어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사실 이한은 꽤 여러 번 그것을 표현할 단어를 찾기 위해 고심하였으나 아직까지도 무어라 자신이 느끼는 그 감각을 딱 알맞게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그나마 가장 근접한 단어를 찾자면 분위기일까. 다만 생김새가 아니라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그가 어느 날부터인가 갖추기 시작한,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감각들이.
이제 와 이한으로 하여금 연화운을 아름답다고 여기게 만들어버린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