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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 굳이 사부님께서 정안궁까지 오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아무리 폐하께서 요즘 연빈마마를 자주 찾는다고는 하시지만 시침을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무부로 돌아가는 길, 정 총관의 어린 제자 내관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없이 돌아가던 정 총관은 그리 묻는 자신의 제자를 힐끔 한 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사부가 고작 연빈마마께 아부나 떨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아느냐.”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까? 허면….”
“쯧쯧… 잘 듣거라. 무엇이든 듣는 것은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만 못하는 법이니라. 특히나 황궁에서 천 길 낭떠러지 위를 걷는 듯한 우리네 같은 이들은 무언가를 판단할 때 절대로 남들의 입을 통해서만 정보를 얻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야.”
그리 말을 하며 정 총관은 조금 전 제가 보았던 연빈의 모습을 가만히 떠올렸다. 연빈이 변했다는 소리야 이미 귀에 박힐 듯 많이 들었던 말이지만 막상 오늘 마주 대한 연빈은 단순히 변했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황궁에서 비빈을 판단할 때 황제의 총애 여부만큼이나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바로 그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질이다. 아무리 집안이 특출하고 총애를 받는다고 하여도 본디 그 사람 자체가 가진 성품이 유약하고 소심하면 그는 가진 힘을 제대로 다 사용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반대로, 당장엔 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사람이 영악하고 야망이 크며 판을 읽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언제라도 크게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니 당장에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하여 멸시하고 홀대하였다가는 나중에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음이었다.
그러니 정안궁과 그다지 원만한 관계는 아니었던 내무부로서는 연빈이 변했다는 말을 덮어놓고 무시할 수도, 무작정 믿을 수도 없었다는 말이다. 하물며 황제마저 지금의 연빈을 점점 다르게 대하고 계시는 게 명백해졌으니 정 총관은 제 눈으로 연빈을 직접 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제자의 배움이 미천하였습니다. 허면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오늘 연빈마마를 어찌 보셨는지요?”
어린 내관의 물음에 정 총관의 눈빛이 다시 한 번 깊어졌다. 머릿속에는 오늘 정안궁에 발을 들이는 그 순간부터 꼼꼼하게 살펴보았던 모든 일들이 차곡차곡 정리가 되고 있다.
이전에는 밖에서도 온통 주눅이 들어 어딜 가든 정안궁 사람인 것이 티가 날 정도로 위축되어있던 궁인들은 정안궁 안에서도 당당하게 돌아다니며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연빈의 측근 궁녀인 아진은 제가 무슨 꿍꿍이로 여기까지 직접 발걸음을 하였는지 알아내려는 듯 연신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살폈고 이는 정안궁의 궁인들은 이미 연빈의 변화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돌아섰음을 보여 주는 일일 테다.
내무부에서 사람이 갈 때마다 아무리 힘 하나 없는 내관들이라 하여도 도무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으며 악담을 퍼붓던 연빈은 오늘 더없이 정중한 태도로 자신을 맞이했고 말 한 마디, 시선 하나 이전의 연빈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단정하여 단순히 연기를 하는 거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 총관이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주 큰 바람이 불 것이다.”
“예?”
“당분간 정안궁에 관한 일은 모두 내게 고하고, 절대로 모자람이 있도록 처리하면 안 될 것이다. 알겠느냐.”
어린 내관은 여전히 정안궁을 그렇게까지 신경 써야 할까 의문이었지만 사부가 하는 일에 감히 토를 달수는 없는 법. 허리를 굽히며 대답을 하는 내관의 얼굴에만 의문이 가득하였던 날이었다.
서북 지역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읽는데 불현듯 어느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에 당황한 이한이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번쩍 들자 곁에 서 있던 오 태감이 의아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어찌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허나 차마 제가 방금 전 눈앞에 떠올린 이가 누구인지 말하기 싫었던 이한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시선을 내린다. 제가 펼치고 있던 보고서의 내용은 지난해부터 꾸준히 중앙에서 관심을 가지고 대처를 하였던 바, 올해 서북 지방에서는 춘곤기가 시작되어도 아직까지 민심이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한은 다시 보고서의 내용에 집중했다. 백성들이 어찌 지내고 있는지. 이 계절을 어찌 준비하고 있는지. 가뭄의 조짐이 보이는 지역의 현재 상황이 어떠한지 황제가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상황을 알 수 있도록 자세하게 적은 내용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갑자기 누군가가 번뜩 떠오른다. 이번에는 다만 얼굴 하나가 떠오른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의 백성을 굽어 살펴 달라 말하던 몸짓이 바로 눈앞에 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한은 너무 어이가 없어 들고 있던 서간을 잠시 내려놓고 손을 들어 미간을 한 번 문질렀다.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폐하.”
이번에는 조금 더 심각한 얼굴이 된 오 태감이 다시 물었다. 그 질문에 이한은 속으로 ‘불편해. 아주 불편해 미치겠다.’ 그리 대답을 하면서도 입은 다문 채로 허공을 노려보기만 했다.
또 연화운이다. 또다. 시도 때도 없이 자꾸만 제 눈앞에 아른거려 자신을 성가시게 하고 있는 건 바로 그 문제의 연화운이었다.
이제는 마음에 걸리던 일들은 다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이한은 더 이상 연화운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려 애쓰지도 않았고, 믿지 않으려 발버둥 치지도 않았고, 연화운이 달라진 것을 완전히 인정하고 그것을 당사자에게 공표하기까지 하였는데. 그런데도 어째서 자꾸만 연화운을 떠올리는 일을 멈출 수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한이 입을 열었다. 하도 답답하니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은데 도대체 이 마음을 무엇이라고 칭하며 물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거슬린다. 성가시다. 신경이 쓰인다. 불편하다. 그런 말들은 전부 이한의 마음을 엇비슷하게 표현할 뿐 딱 맞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아직도 그가….”
그러니까 그것들보다는 조금 더 유한 무언가. 불편하고 거슬리는 것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어떠한 감정. 조금 더 살갑고, 조금은 애틋한 것도 같으며, 조금 더 친밀한. 그러한 감정.
마치, 그리운 것처럼.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심장이 쿵쿵 뛰어대고 손바닥에 땀이 찼다. 제가 연화운이라는 이름과 그립다는 단어를 같은 선상에 세웠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더 기가 막힌 건 그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마치 어긋나 있던 조각이 달칵, 하고 끼워 맞춰진 것처럼 만족스러워진 감각이었다.
그립다니. 연화운이 보고 싶다니. 제가 지금 이토록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내도록 정신이 산만하였던 게 고작해야 연화운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니. 말도 안 된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이한은 지금껏 살면서 누군가를 그리워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야.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폐하…?”
오 태감은 갑자기 혼자 심각해졌다가, 혼자 혼란스러워 보였다가, 혼자 얼굴을 붉히더니 이제 또 혼잣말을 하는 황제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으나 그런 오 태감의 시선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이한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었다.
착각한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일이란 전에 없던 일이니 아무래도 다른 감정을 그것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연화운을 그리워한다니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막말로, 이한은 당장이라도 원하면 연화운을 제 앞까지 대령시킬 수가 있는데 그런 이를 보고 싶어 할 연유가 무엇이냔 말이다.
이한은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리며 다시 놓았던 서간을 손에 쥐고 글자에 집중하려 애썼다. 지금 자신이 봐야 할 건 백성들이 어찌 살고 있는지에 관한 일이었지 사랑스러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던 연화운 같은 건 절대로 아니었다, 고 생각하다가 이한은 다시 생각을 정정한다.
사랑스럽다는 부분은 빼고. 아무튼 그냥 연화운 같은 건 하나도 보고 싶지 않았다.
“와….”
서서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벌린 채 탄성을 흘렸다. 옆에 있는 아진은 서서처럼 입을 벌리고 있진 않았지만 그 역시 감격스러운 시선으로 두 손을 꼬옥 마주 쥐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참지 못한 서서가 별빛처럼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마마, 정말 너무 잘 어울리셔요!”
“…그런 말은 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서서의 칭찬에 화운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살짝 내리며 대답을 하자 그 표정 때문에 더더욱 애간장이 녹아버린 서서는 오히려 더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이요! 진짜루요! 너무너무 아름답고 막막 빛이 나요, 마마!”
서서의 말에 화운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무부에서 새로 보내 준 의복이 문제였다. 화운은 그것들을 그저 받아두라고만 했을 뿐인데 척 보기에도 빛깔이며 형태가 보통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의복을 들고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서서가 받으신 김에 잘 맞는지 한번 입어 보시면 안 되냐고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라면 서서에게 또 버릇없게 군다며 그를 탓하였을 아진까지도 함께 서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공격을 해대니 차마 외면할 수 없던 화운이 새로 받은 옷을 입고 두 아이들 앞에 선 참이었다.
은은한 하늘색 고운 천으로 드리워진 겉옷이 바지를 적당히 가리고 그 위로 윤기가 흐르는 흰 실로 수를 놓자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반사된 실이 반짝였다. 모양은 더없이 단정하나 움직일 때마다 화려한 자수가 눈에 띄니 아진과 서서는 그야말로 저들의 주인에게 안성맞춤인 옷을 보고 마음이 들뜨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