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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65)화 (6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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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깊어진 새벽, 그때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화운은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정안궁의 뜰로 조용히 걸어 나왔다. 문 앞에 당직을 서는 어린 궁녀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이미 벽에 기댄 채 곤한 잠에 빠져들어 있어 화운은 숨과 발걸음을 모두 죽이며 달빛 하나만이 드리워진 그네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 위에 걸터앉았다.

이리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몸에 좋지 않을 것도 알고, 아진이 안다면 크게 걱정하여 잔소리를 할 일인 것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정말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수화원에서부터 스스로 어찌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쿵, 쿵 뛰어대던 심장이 깊은 밤까지도 여전히 진정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이제 그와는 다른 사람이니,’

그네에 앉아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려니 황제의 그 말 한마디가 바람처럼 또다시 화운의 귓가에 맴돌았다. 이미 수백 번도 더 머릿속으로 되새긴 말이었건만 그 목소리를 떠올리자 다시 또 심장이 바닥으로 꺼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이 자신에게는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와 같았다는 것을 폐하께서는 알까. 폭풍처럼, 우레처럼, 그렇게 화운의 세계를 온통 허물고 다시 짓는 그러한 말이었다는 걸 폐하는 짐작이나 하실까.

그 말 한마디로 당신이 화운의 마음에 또 얼마나 깊고 깊게 남게 되었을지를. 폐하께서는 아주 조금이라도 예상하실 수가 있을까.

황제의 모든 것이 화운의 삶에는 늘 이런 식이었다. 처음 어가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백성을 살피셨을 때도. 연화운이 된 하운의 앞에서 너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삶이 있노라고 하운의 죽음을 일러 주었을 때도. 너는 거기에 그대로 있으라 아픈 화운을 달래주셨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황제는 그저 제가 가진 어진 성품을 드러내었을 뿐인데 그의 모든 말과 행동들은 매번 화운에게 하나의 욕심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고, 빛이 되었으며, 온기가 되었다.

그러니 폐하께는 결코 그 자신이 중요한 의미가 되진 못하겠으나 화운에게는 그분이 어찌 단 하나의 의미가, 운명이 되지 못하겠느냔 말이다.

연심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애정을 갈구하고 총애를 원하는 그러한 감정이 아니었다. 화운에게 황제는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광활한 의미였다. 인간이 봄의 햇살을 따스하게 여기듯, 여름의 태양을 찬란하게 여기듯, 가을의 바람을 청량하게 여기고 겨울의 백설을 아름답게 여기듯. 화운에게 황제는 마음에 품어 아끼고 찬양해 마지않는 세계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자신은 저의 세계로부터 새로운 삶을 허락 받았으니.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화운은 눈을 감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화운으로 깨어나고 나서는 늘 긴장하며 압박감을 느끼고 있어 한 번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던 청량한 밤의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워왔다.

하운이 연화운으로 깨어난 것은 이미 한참 전의 일이나, 진정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은 바로 지금이었으니.

감은 눈 아래로 떨어지는 한 줄기 눈물은 아마도 그러한 기쁨일 터였다.


아진은 여전히 반쯤은 멍한 얼굴로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인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진이 그리 시선을 주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고 연빈에게 구구절절 제가 가지고 온 것들이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쓴 것이고, 귀한 것으로 만든 것이며, 하여간에 얼마나 손이 많이 간 물건인지를 떠들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내무부 총관 정원중이었다.

“마마께서 푸른색 계열을 즐기신다고 하시기에 고른 원단이온데, 여기에 놓은 자수를 보시면….”

아침 댓바람부터 정안궁에 내무부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연빈의 새 의복과 장신구를 챙겨 들고 온 정 총관은 사실 의복 같은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연빈의 앞에서 아까부터 이것저것 설명하기 바쁘다.

내무부에서 물건을 보내오는 것이야 일상적인 일이니 놀랄 것이 하나 없지만 지금 아진이 이렇게 얼을 놓고 있는 것은 정 총관이 직접, 마마의 물건을 가지고, 정안궁까지 와서 설명을 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었다. 이는 연빈이 막 입궁하여 정안궁의 주인이 되었던 초기에 인사를 왔던 것을 제외하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무부는 본디 황궁 내명부의 권력 관계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내명부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었거나, 황제의 독보적인 총애를 받고 있을 땐 간이고 쓸개고 전부 꺼내줄 것처럼 굴다가도 힘을 잃고 황제의 총애를 잃어버리는 날이 되면 가차 없이 돌아서 고문과도 다를 바가 없는 천대를 하기도 했다.

그리 콧대가 높을 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이들이 황제의 총애 따위는 영영 바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 연빈을 대우해 줄 일은 결코 없었으니 총관씩이나 되는 인물이 굳이 정안궁까지 직접 걸음을 할 이유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연빈에게는 총애는 없었어도 아비의 이름이 있어 내무부가 제멋대로 정안궁을 방치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럴 때조차도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볼 것 없는 정안궁에 크나큰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굴었다.

연빈 역시 그런 내무부의 태도에 분노하여 여러 번 악을 쓰고 난리를 피웠으나 기나긴 역사 동안 별의별 후궁들을 다 보고 감당하였던 내무부 역시 만만한 이들은 아니라 하여간에 정안궁과 내무부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대하기 바빴다. 정말 그랬다.

헌데 그 내무부의 정 총관이. 어디서든 정안궁의 궁인들을 마주치면 혀를 끌끌 차며 시선을 돌리기 바쁘던 바로 그 양반이 직접 정안궁으로 걸음을 하였다니.

황궁에서 연빈마마의 입지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가장 피부로 느끼고 있던 아진에게도 이것은 과히 놀라운 일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연빈마마.”

그사이 한참 동안 이어진 설명을 끝마친 정 총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에 지으며 연빈, 화운에게 물었다. 사실 자수가 어떻고, 옷감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들의 절반 이상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화운은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정중하고 공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게는 지나칠 정도로 과분한 정성이니 어찌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있겠소. 고맙소, 정 총관.”

“지나치다니요. 이 황궁에서 이 옷이 어울리실 분은 오로지 연빈마마 한 분뿐이십니다. 아, 그리고….”

그동안 내무부와 정안궁의 사이가 어떠했는지 가장 잘 알다 못해 사이가 그리 되도록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이가 바로 저이면서도, 마치 그간의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의미도 없는 일이라는 듯 안면을 싹 바꾸어 연빈을 대하는 정 총관의 두터운 낯짝에 아진이 속으로 연신 감탄을 터트리고 있는 사이.

불현듯 무언가가 생각난 듯 정 총관이 저만치 문가에 떨어져 있던 내관 하나에게 눈짓을 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린 내관 하나가 기다란 상자 하나를 조심스럽게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께서 부탁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특별히 준비한 것인데….”

그리 말하며 정 총관이 직접 열어 보인 상자에는 얼마 전 화운이 아진을 통해 부탁했던 목검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아…!”

지금까지는 그저 예의를 차리며 정 총관의 설명을 듣고 있던 화운의 얼굴에 단번에 화색이 돌았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화운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옅은 색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반짝거리며 안에 든 목검을 살폈고 화운의 반응이 단번에 달라지자 마찬가지로 조금 더 신난 얼굴이 된 정 총관이 연빈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내무부 창고에 쌓여 있는 훈련용 목검이야 차고도 넘치지만 마마께 어디 그런 아무 검을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하여 특별히 재료를 고르고 골라 연빈마마만을 위한 검을 새로 만들었지요. 한번 쥐어 보시겠습니까?”

총관의 말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이미 옷자락만 연신 쥐었다 폈다 하며 조바심을 내고 있던 화운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뻗어 앞에 있는 목검을 쥐었다. 한 손에 착 붙게 들어오는 손잡이며 가벼운 무게가 제대로 휘둘러 보지 않아도 신경 써 만든 티가 났다.

“그저 아무렇게나 쓸 목검 한 자루면 충분했는데 이리 신경 써 주시니 뭐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정말 고맙소, 정 공공.”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연빈마마. 다만… 후에 제가 약소하게나마 이리 노력했다는 점을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 총관은 그리 말하며 허리를 굽히면서도 슬쩍 시선을 올려 연빈의 표정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아진은 이제 와 갑자기 저자세로 나오는 정 총관의 태도가 의심스러워 연신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으나 사실 내무부가 정안궁에 무관심할 때는 아진 역시 제 주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었던 때이니 딱히 무어라 할 위치는 아니었다.

“물론이오, 공공. 이리 고마운 일을 어찌 잊겠소.”

그사이 목검을 섬세하게 한 번 살핀 화운은 진심으로 기쁜 듯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 총관은 그런 화운의 얼굴을 아주 잠시 예리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허리를 굽혔다. 황제 폐하가 정안궁을 찾았던 일보다 더 예측할 수 없던 그날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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