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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64)화 (6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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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이한은 지금 자신이 화운에게 얼마나 이기적이고 유치하게 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렇게 싫다고, 거슬린다고 그를 밀어낸 건 저이면서 이제 와 왜 그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지 그것조차 그를 탓하고 있었다니. 정말로 제가 이토록 연화운에게 이기적으로 굴고 있었다니. 깨닫고 나자 저의 언행이 너무나도 부끄러워 얼굴이 다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말을 해 준 적이 없으면서. 그의 변화에 대해 단 한 번도 제대로 그를 인정해 준 적도 없으면서. 그런 주제에 그가 제 마음을 알아서 헤아려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 스스로가 너무나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있던 이한이 이내 화운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젠가 네가 내게 그런 말을 하였지. 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라면… 그러면 너를 어찌 여기겠느냐고.”

갑자기 이한의 입에서 흘러나온, 생각지도 못한 날의 기억에 화운이 놀란 얼굴을 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연화운의 꿈을 꾸고 더없이 혼란스러웠던 날 감정에 취해 제가 멋대로 떠들었던 말에 더없이 자애롭고도 다정하게 건네주셨던 황제의 대답은 지금까지도 화운의 밤을 악몽으로부터 지켜 주고 있었다.

그날 황제께서 제게 보여 주셨던 얼굴과, 제게 들려주었던 목소리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순간 울컥해버린 화운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저 황제를 바라보고만 있자 마찬가지로 어려운 얼굴로 몇 번이나 속으로 말을 고르고 고른 이한이 마치 첫 걸음을 걷는 아이처럼 말을 이었다.

“내가… 내가 지금껏 경멸하고, 꺼렸으며, 마주치기 불쾌해하였던 이는 과거의 연화운이다.”

순간 화운은 할 수만 있다면 황제의 말을 막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에 무너진다고 해도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싶기도 하였다. 이어질 말을 제가 감히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으면서도 기꺼이 그 말의 무게에 질식되어 죽고 싶기도 하였다. 앞이 핑핑 돌듯 어지러워 무어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화운을 향해 황제가 말을 이었다.

“허나 지금의 너는… 너는 이제 그와는 다른 사람이니….”

너는 그와는 다른 사람이니. 그 말이 연화운에게 과연 어떠한 의미가 되어 가닿을지는 이 순간 말을 하고 있는 이한조차도 절대로 짐작조차 할 수 없을 터.

“나는 이제… 네가 하지 않은 일로 너를 탓하고, 모욕하지 않을 것이다.”

“폐하….”

“그러니 너도 더 이상은… 내 앞에서 죄인처럼 굴지 말거라.”

설령 그것이 화운의 이기적인 착각이라고 할지라도 눈앞의 황제가 지금 이 순간 보고 있는 것이 과거의 연화운이 아니라 꼭 지금의 자신인 것만 같아서. 화운은 염치없는 일인 것을 알면서도 차마 이한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한의 어머니는 평생을 다른 여인들을 경계하며 살았다. 그는 왕부 시절 적복진으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황후가 되었으나 단 한 순간도 황제의 총애를 가져 본 적은 없던 여인이었기에 측실로 왕부에 들어와 귀비의 자리까지 단숨에 차고 오른, 이른바 황제의 총애를 독식한 여인의 앞에서 황후로서 당당함을 앞세울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귀비는 천성이 경박하고 으스대기를 좋아하는 성미였다. 황제는 보통의 규수와는 다른 귀비의 교태를 무척이나 어여삐 여겼으나, 그것이 웃어넘길 수 있는 애교가 되었던 건 오로지 황제의 앞에서 뿐이었다. 내명부를 통솔하는 권한까지도 손에 쥐게 된 귀비가 황후의 앞에서 얼마나 오만하고 방자하였는지는 이제 와 말로 다 표현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다행히 황후가 된 후 적장자인 이한을 낳긴 하였으나 머지않아 황제가 총애하는 여인 역시 황자를 낳았으니 이한의 어미는 매일 밤마다 귀비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아들이 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악몽에 비명을 지르며 깨기 일쑤였다.

결과적으로 귀비와 그의 2황자가 이한을 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역모를 꾸민 일이 생겼으니 황후의 불안이 마냥 헛된 망상이었던 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태후의 강력한 비호가 아니었다면 이한은 아마 그때까지 자리를 보전하지도 못하였을 터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어린 이한은 자라는 내내 제 어미의 불안을 마주하여야만 했다. 질투와 분노, 불안으로 내몰린 황후는 어린 아들의 앞에서도 쉽게 무너져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다. 이한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 왕부에서는 지금의 황후인 자란 이외에 다른 여인을 들이지 않았던 건 첩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 탓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한이 황제가 되고, 그 자신이 태후의 자리에 오른 후가 되어서야 후궁이라면 치를 떨었던 마음도 아주 조금씩 사그라져 황제가 되어서도 후궁 하나 없던 이한을 위해 간택령을 내리긴 하였으나 그 와중에도 여인을 가리는 태후의 눈은 언제나 날카로웠다.

눈에 야망이 보이지는 않는지, 황제의 앞에서 눈짓 하나라도 교태를 떨지는 않는지, 성격이 드세거나 지나치게 미색이 돋보이지는 않는지. 태후는 그러한 것들을 섬세하게 살펴 가장 유약하고 얌전해 보이는 이들을 수년에 걸쳐 겨우 몇 골랐을 뿐이었다.

태후가 공신의 딸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후계자의 자리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아들을 낳을 수도 있는 여인을 경계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황제가 청을 하였다고 한들 연씨 가문의 여인 대신 아이를 낳을 수도 없는 사내가 입궁하는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이한이 황후를 존중하고 위하며, 비빈들을 골고루 살피어 챙기지만 그 누구도 마음 깊이 총애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황제에게 연심이 얼마나 불필요한지. 그것이 황제의 눈을 얼마나 멀게 하는지. 나아가서는 종묘사직을 얼마나 위험에 빠트리며 자식들 사이에 피바람이 불도록 만드는지 사는 내내 지켜보고 겪어내었던 이한으로서는 그들 중 그 누구도 사적으로 제 마음 안에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했으며, 실제로 지금까지 제 뜻대로 그렇게 잘 지내오고 있었다.

“…….”

하지만 이토록 늦은 밤, 결국 오늘도 어느 후궁의 처소도 찾지 않고 홀로 잠자리에 누워 과거를 돌아보던 이한의 생각 끝에 떠오르는 얼굴은 다름 아닌 연화운이라는 후궁이었으니.

황후도 아니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던 다른 후궁들도 아니고, 살면서 다시 가깝게 여길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 여겼던 남후궁, 연화운을. 이한은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너를 탓하지도, 모욕하지도 않을 테니. 너를 지난날과는 완전히 다른 이로 여길 터이니. 너 역시 더 이상은 내 앞에서 죄인처럼 굴지 말라 이한이 그리 말하였을 때 연화운이 지었던 표정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것은 단지 황제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격했다는 말 같은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정말로 새 삶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그런 표정을 지을까. 삶을 통째로 잃었던 이가 그것을 되찾는다면 과연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화운은 표정은 단지 황제에게 지난 과오를 용서 받았다는 이유만으로는 나올 수 없는, 그런 폭풍 같은 감정들로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이한은 그가 당장에 허물어져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제 품에 안겨 차마 참지 못한 울음을 토해냈던 것처럼 오열을 쏟아낼 것만 같은 얼굴을 연화운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운은 울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그토록 어지러운 얼굴을 하고서도 꿋꿋하게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숨을 한 번 참고, 가까스로 제게 휘몰아치는 감정을 정리하듯 눈을 깊이 감았다 뜨고는 흔들림 없는 움직임으로 무릎을 꿇고는 이한에게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제가 연화운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오늘 폐하께서 내려 주신 성은을 마음에 깊이 품어 결단코,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연화운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동안이라….”

그 말을 들을 때에도 그러했으나 다시 되새겨 떠올려 보아도 참으로 기묘한 어감의 문장이었다. 그냥 살아간다는 말이 아니고. 제가 살아가는 동안에, 라고 하는 그런 평범한 말이 아니고.

“마치 남의 이름을 빌려 살아가는 사람 같지 않은가….”

짧아진 촛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이한은 화운이 한 그 의미를 알기 힘든 말을 가만히 되뇌어 보다가 문득 제가 여전히 어느 후궁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한의 어느 밤에도. 어느 낮에도. 이토록 깊이 황제의 마음을 섬세하게 어지럽혀 거듭 곱씹어 생각하게 만들었던 이는 결코 없었다.

지금 이한이 화운에게 느끼는 감정은 믿고 의지하거나, 다정하게 챙겨 주거나, 화를 내거나, 꼴 보기 싫다 여기던 그 어떤 감정들과도 같지 않았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여겼던 생소한 감정들이다.

하여 그것이 행여나 부정한 것은 아닐까 겁이 나서. 제가 절대로 느껴서는 아니 된다 그리 평생을 경계하였던 그 감정과 혹시라도 닮았을까 두려워서.

이한은 자꾸만 눈앞에 떠오르는 화운의 얼굴을 애써 지우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황제의 연정이란 모두에게 독과 같다며 눈물을 보이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이한은 결국 그 밤 역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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