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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63)화 (6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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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남들은 모두 몇 안 되는 황제의 후궁 자리를 차지한 송현을 부러워하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홀로 황궁 생활을 시작한 송현은 사실 할 수만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애초에 송현이 원하여 온 자리도 아니다. 송현은 황제의 총애도, 권력도, 무엇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어린 송현이 바란 것은 그저 가족들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뿐이었다. 가문의 위신을 위해, 그리고 아버지의 입신을 위해 그의 부모가 등을 떠밀지 않았다면 송현은 절대 후궁으로 황궁에 들어오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송현은 제가 집을 떠나오는 날 울음을 삼키며 저의 손을 말없이 잡아 주던 오라버니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서. 오라비가 되어 동생 하나를 뜻대로 지켜 주지 못하였구나, 그리 죄책감을 토해내던 오라버니가 너무나도 그리워져서.

그래서 송현은 연빈을 보기 위해 당장에 정안궁으로 달려갔다가 그곳에서 연빈이 수화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또 한달음에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나는 그냥… 산책을 하려고….”

하지만 황제 폐하를 모시는 오 태감에게 그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할 수가 없던 송현이 그리 대답을 하자 오 태감이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송현에게 말했다.

“정빈마마. 지금 수화원에는 폐하와 연빈마마가 함께 계실 터이니 다음에 다시 오시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

오 태감의 말은 부드러운 권유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송현은 그것이 제가 가볍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난번에도 폐하가 갑자기 찾아오시는 바람에 연빈과 원하는 만큼 시간을 보내지 못하였던 송현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어 저만치 오 태감 너머로 수화원 안쪽을 들여다보려니 슬쩍 그 시선을 가로막은 태감이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입술을 쭈욱 내밀고 시무룩해진 송현이 입을 열었다.

“알겠소….”

어째서 폐하는 저와 연빈이 가까워지는 일을 자꾸만 방해하시는 걸까. 누군가 들었다면 정말로 경악을 하였을 만한 생각을 하며 돌아서는 송현의 발걸음이 늘어지는 날이었다.


황제가 물러가라 하니 일개 궁녀는 당연히 버틸 수가 없어 물러나긴 하였는데, 아진은 자신까지 물려놓고 도대체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정쩡하게 떨어져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가 이내 저만치에 머물러 대기하고 있던 오 태감을 발견한 아진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물었다.

“오 공공. 폐하께서 혹시 화가 나셔서 예까지 찾아오신 건 아니죠?”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친 것이라면 그저 물러가라고 하시면 될 것을 굳이 자신만 돌아가라고 한 것이 아무래도 영 마음에 걸려 불안했다.

허나 질문을 받은 오 태감이 대답도 아니 하고 참으로 답답하단 시선을 한 채 저를 바라보기만 하자 속이 탄 아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수화원에 와도 좋다고 허락하신 건 폐하이시니 괜찮을 테고… 혹시 지난번에 저희 마마께서 구휼소의 일을 청하신 것 때문에 폐하의 눈 밖에 나신 건 아닌지….”

아진이 지금 이 상황을 유독 불안해하는 건 바로 그 일 때문이다. 비록 그날 폐하께서는 제 주인을 한 마디도 탓하지 않으셨으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아진은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손발이 떨리고 이후에라도 혹시 그 일을 두고 제 주인이 벌을 받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오 태감이 혀를 끌끌 차며 입을 연 건 그 순간이었다.

“네 주인이나 너나 아주 똑같구나.”

“…예?”

“연빈마마께서도 꼭 너처럼 눈치가 없으시니 폐하께서 답답하실 수밖에.”

그때까지도 온통 걱정만 하고 있던 아진의 눈썹이 오 태감의 대답에 삐죽하게 올라간다. 높아진 목소리로 아진이 대꾸했다.

“공공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저희 마마께오서 무얼 어찌하셨다구요?!”

아진은 정말로 오 태감의 말이 너무나도 기가 막혔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예전이라면 모를까 스스로 반성하고 변하셔서 누구보다 바르게 행동하고 있는 사람에게 매번 찾아와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며 괴롭히던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그분이 황제 폐하가 아니었다면 아진은 벌써 열두 번이고 욕을 뱉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 오 태감이 마마의 눈치가 무어니, 폐하께서 답답하시니 그런 소리를 하니 아진으로서도 은근히 부아가 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되었다. 내가 말을 해 무엇 하겠느냐.”

하지만 그런 아진의 반응에도 오 태감은 사과는커녕 오히려 제 속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아진 역시 마찬가지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입술을 궁싯거렸으나 그렇다고 폐하를 모시는 오 태감에게 계속 말대꾸를 할 수는 없는 법이라 그저 입을 꾹 다문 채로 다시 고개를 쭈욱 빼고 수화원 안쪽만 기웃거린다.

부디 폐하께서 더 이상 마마를 아프게 하시지는 말아 주셨으면서. 총애를 달라 그리 원하진 않을 테니 그저 마마께 상처만이라도 주지 말아 주셨으면. 지금 아진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지난번에는….”

말없이 걷기를 얼마간, 먼저 입을 연 것은 화운이었다. 처음에는 갑자기 폐하께서 자신에게 그저 걷자고 하시니 그것이 놀라고 낯설어 긴장만 하고 있었는데 고요한 수화원의 정취를 느끼며 잠시 나란히 길을 걸으니 쉬이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것은 사실 이한과 화운 사이의 미묘한 기억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다. 이한은 화운이 변한 이후로도 제가 차갑고 사납게 대했던 일들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화운은 줄곧 제게 무르고 다정하게 대해 주시던 황제의 기억만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운이 입을 열자 저도 모르게 흠칫 긴장한 이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운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의 방자함을 관대하게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폐하.”

“아….”

“몇 번을 감사하다 인사를 올려도 모자랄 일이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이한은 순간 저도 모르게 속으로 조금 투덜거렸는데, 그리 잘 아는 이가 직접 찾아오지도 않고 간식만 보내왔다는 것이 다시금 떠오른 탓이었다. 지금도 자신이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다면 이런 말은 아마 듣지도 못하였을 테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한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추어 섰다. 하고 싶은 말이 떠올라 순간 긴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걸음을 멈추자 자연히 함께 걸음을 멈춘 화운이 다소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자 낮게 숨을 한 번 내쉰 이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두려우냐.”

물론 염치없는 물음인 것을 이한도 알았다. 그동안 그렇게 화운을 몰아가고 다그치기를 반복하였으니 그가 쉽게 자신을 찾아오지 못하는 것도 사실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제가 그를 밀어내고 매번 물리쳤음을 아는데도 자꾸만 서운해지는 마음이란 도대체 무슨 연유에서인지.

생각지도 못한 황제의 말에 화운이 놀란 얼굴로 잠시 황제를 바라보고만 있으려니 이한이 말을 이었다.

“내가 매번 너를 그리… 그리 차갑게 대해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이 겁이 나느냐.”

화운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을 묻고 있는데도 그가 정말로 그렇다고 대답할까 봐 두려웠다. 아니라고 대답한다고 한들 그것은 화운이 후궁이니 감히 황제 폐하와 함께 있는 것이 겁난다 대답할 수는 없기에 거짓을 고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한은 그가 아니라고, 그리 대답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모순이었다.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바로 그 모순적인 일은 지금 이 순간 이한의 마음 안에서 너무나도 선명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이윽고, 천하의 황제를 이토록 두렵게 만든 화운이 입을 열었다.

“지엄하신 천자를 감히 경외하지 않을 수 있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

“하여도 그것은 폐하를 너무나도 존경하여 어려워함이지 폐하를 두려워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존경하고 어려워하나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이한은 거기에 서서 화운의 대답을 자꾸만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예전이라면 저를 은애하고 연모한다고 울부짖었을지언정 존경이니 무어니 하는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을 화운이었다.

허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그때에는 연화운이 뱉는 연정의 단어들이 그리도 듣기가 싫었건만. 끔찍했건만. 어찌하여 지금의 연화운에게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이리도 허전한 것인지.

“저는 폐하를 겁내지 않습니다.”

“허면 어째서 나를 찾아오지 않는 것이지?”

절반쯤은 괜한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심정으로 이한이 말했다. 뻔뻔한 말인 것을 알면서도 이한은 저의 말이 제 생각을 벗어나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한의 질문에 화운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금 흔들리는 시선으로 이한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대답했다.

“저는… 저는….”

“…….”

“폐하께서 저를 보기를 꺼리시는 것 같기에….”

또다시 이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괜히 제가 감사를 전한다고 폐하의 앞에 나타나면 혹여라도 폐하의 마음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까 하여서…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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