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62)화 (6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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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운에게, 아니 하운에게 검은 사실 그의 삶에 가장 오래된 벗이나 다름없었다. 어릴 적 천운으로 스승님을 만나 검을 배운 이후, 검은 줄곧 하운에게 살 길을 열어 주었고 하운이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도와주었으며, 결국에는 하운이 욕심내었던 황궁에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왔던 존재였다.

게다가 하운은 마음이 심란하여 도무지 다잡아지지 않을 때엔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제 마음을 다스리곤 했으니 이따금 어지러운 생각으로 밤을 지새울 때마다 화운에게는 줄곧 제 손에 쥘 검 하나가 몹시도 간절했다.

“음… 우선 제가 내무부에 물어보도록 할게요. 진검도 아니니 쉽게 구할 수는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럼 꼭 부탁해, 아진. 고마워.”

화운은 혹시나 아진이 저에게 무언가 더 묻기라도 할까 냉큼 고맙다는 말까지 전부 전하고는 부러 다른 곳을 바라보며 시선을 돌렸다. 지금으로선 아진이 무엇을 물어도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누가 검을 주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벌써 마음이 들뜬 화운의 손이 무릎 위에서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검 하나를 손에 쥐고 허공을 가르던 감각들이 이제 와 제 것으로 다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없는 밤 날카로운 검 끝으로 허공을 가를 때마다 더없이 마음이 자유로워지던 감각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연화운의 몸으로는 당연히 하운이 하던 것처럼 검을 휘두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훈련 방법이며 초식 같은 것들은 전부 그의 머리에 있으니 잘하면 이토록 연약한 화운의 몸 역시 아주 조금은, 정말 아주 조금은 그것으로 수련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하면 지금보다는 아주 조금이라도 건강 역시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마, 마마….”

화운이 벌써 혼자만의 희망적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을 때. 갑자기 곁에 선 아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화운을 불렀다. 화운이 여전히 절반쯤은 검을 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멍하니 ‘으응?’ 하고 대답을 하려니, 아진이 화운의 팔을 잡아 슬쩍 일으키며 입을 연다.

“마마, 폐하께서….”

폐하께서. 그 한 마디가 들리자마자 화운은 정신이 번쩍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놀라 아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오 태감마저 물린 채 홀로 서 있는 황제, 이한이 있었다.


화운은 너무 놀라 인사를 올리는 것도 잊고 앉은 채로 황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때에 마주치는 황제의 얼굴은 화운에게 언제나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감각을 주었는데, 왜냐하면 화운은 황궁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황제가 자신을 찾아올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마마, 인사를….”

“아… 아!”

자리에 앉은 채로 그저 황제를 바라보고만 있는 화운의 팔을 슬쩍 끌어당기며 주의를 준 건 가까스로 먼저 정신을 차린 아진이었다. 화운은 그제야 파드득 놀라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탓인지 갑자기 눈앞이 핑, 하고 돌았다. 이래선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화운은 어떻게든 깜깜해지는 시야를 다잡아 보려 노력했으나 이미 어그러지기 시작한 균형 감각은 애를 쓴다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마!”

몸이 휘청거리는 감각과 함께 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어둠으로 뒤덮인 시야를 떨쳐내려 애쓰며 어떻게 해서든 폐하의 앞에서 넘어지는 추태는 부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화운이 무엇이든 잡으려 손을 뻗었을 때, 누군가의 단단한 팔이 화운의 어깨를 감싸 안아왔다.

설마. 아니겠지.

아진의 품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강한 품에 기댄 채로 화운이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 머리 위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너는 먼저 물러가 있거라.”

아진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화운은 이한의 품에서 아직도 시야가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아진을 왜 물러가라고 하는 걸까. 무언가 주위를 물리고 탓하실 일이 있으신 걸까. 하지만 수화원 출입은 이미 허락을 받았는데. 혹시 지난번 구휼소에 관련하여 도를 넘은 행태를 보여 허하셨던 것을 다시 되돌리고 싶으신 걸까.

알 수 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는 사이 등 뒤에서 아진이 물러간다고 황제에게 고하는 목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앞이 선명해진 화운이 이한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떨어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순간 앞이 어지러워 추태를 부리고 말았습니다.”

“…되었다. 몸이 약한 것을 너라고 어찌하겠느냐.”

이한은 순식간에 멀어진 화운이 제 품에 남긴 감각을 홀로 곱씹으며 가만히 화운을 바라본다.

그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화운을 만나러 오기 전에는 무언가 잔뜩 마음에 들지 않고, 불만스럽고, 괜히 부아가 나 속이 뒤틀려 만나기만 하면 그를 탓하는 말을 해 주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그런데 막상 화운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언제 제 마음이 그리 날뛰었냐는 듯 차분히 가라앉아 하고자 했던 말들은 전부 날아가 버리고 그저 화운의 눈치만 슬금슬금 보게 되었다.

나는 네가 그리 입고 다니는 것도 마땅찮고, 네가 그리 입고 온 황궁 보란 듯이 걸어다는 것도 싫고, 네가 이렇게 연약해 픽픽 쓰러져대기나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며, 정안궁의 궁인들이며 정빈이며 할 것 없이 오만 곳에 다정하게 대하는 주제에, 내게는 생전 먼저 찾아오는 일도 없이 간식이나 보내고 말아버리는 그러한 점이 너무나도 싫고, 화가 나고, 아주 불쾌하다!

…라는 말 같은 건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이한이 하고 싶던 말들을 모두 삼키며 괜히 볼 안쪽만 하릴없이 깨물고 있자니 화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헌데 어찌 오 태감도 없이 수화원을 거니십니까.”

그리 말하며 오 태감을 찾는 듯 황제의 뒤쪽을 연신 살피는 화운은 황제가 그저 수화원을 거닌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이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도. 이런 것도 이한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무지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것처럼 구는 이런 태도 말이다. 바라는 것이 없어 아무런 기대도 없는 것처럼. 황제의 총애 따위는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화운은 이한의 모든 말과 행동의 원인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배제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이한이 연화운에게 바라 마지않는 행동이었으나 그것은 온갖 패악질을 일삼던 그 시절의 연화운에게 바라던 것이지 결코 지금의 연화운에게. 그러니까 이토록 단정하고, 예의바르며, 조용하고, 그리고 다정한. 그런 지금의 연화운에게 바라는 일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화운의 태도에 묘한 서운함을 느낀 이한은 이제야 깨닫는다.

“…수화원을 거닌 것이 아니라 너를 보러 왔다.”

그래서 이한은 절반쯤은 충동적으로 그리 말했다. 매사 제 앞에서 담담하게 구는 연화운의 표정을 깨트리고 싶었다. 허나 화운은 이한의 말을 듣고서도 달리 놀라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연다.

“제가 생각이 짧아 미처 폐하께 어떤 실수를 하였는지 미리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알려 주신다면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없도록 노력하….”

“그것이 아니고!”

생각지도 못한 기가 막힌 소리에 오히려 평정이 깨진 건 이한이었다. 저를 보러 왔다고 하여도 어째서 믿지를 못하고 자연스럽게 또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겠거니 하는 쪽으로 생각이 튀는지 모를 일이라고 그리 생각이 들었다가, 제가 그동안 달라진 연화운한테 어떻게 행동했는지가 자연스럽게 떠올라 또 할 말이 없어져 속이 탔다. 출구가 없는 길을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이 아니고….”

“폐하…?”

“그냥 나는 정말로… 너를… 너를 보러 왔다는 말이다.”

하여 이것저것 떠오르지도 않는 핑계를 다시 한 번 전부 걷어버리고 툭, 제 마음을 내뱉은 황제의 말에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화운의 눈이 이내 동그랗게 뜨였다.

이제야 화운이 제가 원하는 반응을 조금 보여 주자 또 고새 마음이 슬쩍 들뜬 이한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나와 함께 조금 걷겠느냐.”

조금도 예상치 못하였던 황제의 말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커다랗게 뜬 두 눈을 깜빡깜빡 하고 있는 화운의 얼굴이 너무나도 귀엽다고, 찰나의 이한이 생각했다.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한 것을 깨닫고 나서는 자신의 뺨을 치고 싶을 만큼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그래도 부정할 수가 없을 만큼, 눈앞의 연화운은 너무나도 귀여웠다.


“…오 공공?”

다급한 몸짓으로 황급히 가마에서 내려 걸음을 옮기던 정빈, 송현은 수화원의 입구를 지나자마자 보이는 오 태감의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오 태감이 있다는 건 곧 폐하께서도 계시다는 소리인데. 송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오 태감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정빈마마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아니, 나는….”

송현은 잠시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왜냐하면 지금 송현은 연빈을 찾기 위해 수화원으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정안궁에서 진녕헌으로 간식을 보냈다. 그것은 송현이 가장 좋아하는 계화떡이었는데, 떡을 가지고 온 정안궁의 궁인이 말하길 연빈마마께서 지난번에 보니 정빈마마께서 이 떡을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 가져다 드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송현은 정안궁 궁인이 돌아가자마자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연빈이 그 짧은 시간에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채 준 것도 놀랍고 감동이었거니와 또 한 가지, 언제나 제가 기분이 우울해 있으면 계화떡을 가지고 와 저를 달래 주던 오라버니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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