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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런 간식을 먹고 싶다고….”
정안궁에서 왔다는 찬합을 또 한 번 받아 든 이한은, 정안궁의 바람과는 다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아주, 아주, 아주 불쾌했기 때문이다.
“간식은 어선방에서 보내주는 것이 훨씬 맛있거늘. 내가 이런 간식이 없어서 못 먹을까 봐?”
“폐하. 연빈마마께서는 다만 폐하께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느긋하게 자신을 달래기라도 하듯 들려온 대답에 이한이 눈을 삐죽 뜨고 당장 호통이라도 칠 것처럼 사나운 얼굴로 오 태감을 노려보았다. 빤한 소리를 하는 오 태감의 대답이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한의 마음에 불을 더 지르고 만 모양이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설마하니 이한이 지금 그걸 몰라 이리 성을 내고 있겠느냔 말이다. 이한은 터질 것 같은 속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감사하면. 어? 이런 걸 보낼 게 아니라. 어어?”
가만히 놓여 있는 죄 없는 찬합에 대고 경박하게 마구 손가락질하며 황제가 말했다.
“그럼 직접 와서 감사를 표해야지!”
그랬다. 이한이 정말로 불쾌한 지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깟 간식 뭐 대수라고. 이것만 달랑 보내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제 손으로 직접 들고 온 것도 아니고 정안궁 궁인에게 들려 보낸 이깟 것으로 대신한다니.
자신은 제 앞에 꿇어앉았던 연화운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질 않아 원치도 않은 밤 산책을 그리 하며 잠까지 제대로 이루지 못했는데 정작 문제의 그 연화운은 팔자 좋게 이런 음식 몇 가지로 이 일을 넘기려고 한다는 게 억울하고 분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한은. 결국 그 화를 도무지 참을 수가 없던 이한은.
“정안궁으로 간다!”
그리 목소리를 높이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정말로 연화운이 괘씸하여 그러한 것이지 밤새 그 얼굴 하나가 보고 싶었다거나 하였던 건 절대로, 절대로 아니었다.
“다들 어딜 간 것이지…?”
정안궁의 뜰에 다다를 때까지 저를 마중하러 나오는 이들은커녕 누구 하나 돌아다니는 궁인들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에 이한이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오 태감 역시 조금 앞으로 나서 누구라도 불러 보려 연신 좌우를 두리번거렸으나 보이는 이가 없으니 어찌 할 방도가 없다.
그때, 저만치에서 궁녀 하나가 총총거리며 지나가는 것이 오 태감의 눈에 들어왔다.
“여봐라!”
오 태감이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부르고 나서야 황제가 이곳에 걸음한 것을 알아챈 궁녀가 순식간에 사색이 되어 뛰어왔다. 헌데 궁인이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오 태감과 이한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람쥐처럼 양 볼에 빵빵하게 무언가를 가득 담고 있는 궁녀의 얼굴이다.
“화,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과히 어려 보이는 궁녀는 황제를 눈앞에서 알현하는 것이 처음인 듯 바들바들 떨며 무릎을 꿇었다. 빵빵한 볼따구 때문에 발음은 뭉개지는데 이것을 황급히 삼켜야 하는지, 아니면 감히 황제 폐하의 앞에서 음식을 삼켜서는 아니 되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는 어린 궁녀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로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오 태감이 말했다.
“궁에 어찌 사람이 이리 없는 게냐.”
“그, 그것이… 연빈마마께서 오늘… 소, 소인들을 위해 귀한 음식을 내려 주시고… 쉬는 시간을 주셔서….”
별말을 한 것도 아닌데 지레 겁을 먹은 궁녀는 연신 더듬거리며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하였으나 이한도, 오 태감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굳이 귀한 음식이라고 칭했다면 분명 보통 때에는 궁인들의 입장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였을, 궁의 주인이 먹었어야 마땅할 음식들을 하사한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한이, 오 태감이 더 무엇을 묻기 전에 입을 열었다.
“…연빈은 안에 있느냐.”
오 태감이 아니라 황제께서 직접 내리시는 물음에 이제는 아예 바닥에 이마를 댄 궁녀가 대답했다.
“마, 마마께서는 안 계십니다….”
“없어? 어딜 갔지?”
“마마께서는… 저, 저희가 편하게 먹고 쉴 수 있도록… 수, 수화원으로 산책을 가셨습니다….”
궁녀의 대답에 이한이 허, 하고 기가 찬 웃음을 터트렸다. 아랫것들에게 제가 먹을 음식을 내려 주는 것도 모자라, 주인이 되어서 이제는 그들을 위해 친히 궁을 비워 주기까지 했다니. 정말이지 가볍고 제멋대로인 주인이 아닌가.
이한은 앞에 엎드린 궁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태생부터 가려진 귀천이 있고, 종이라 함은 오로지 자신들의 주인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라지만 이곳 황궁은 그 어느 곳보다 권력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이었다. 그만큼 상전으로서 힘을 잃은 이들에게는 더더욱 잔인한 곳이기도 했다.
타고나기를 귀하게 태어나 이제는 황제를 모시는 이들이라고 하여도 집안이 힘을 잃고 본인이 황제의 총애를 잃는 순간에는 이곳에서 누구보다 가장 비참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이들이 바로 후궁들이었다. 지난 역사에 황제의 총애를 잃었다고 하여 한낱 내관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조롱을 받았던 후궁들이 몇이며, 후궁 따위에게 핍박을 받았던 황후는 또 몇이었나.
그런 것들을 떠올려 보자면 이한은 이제 와 새삼 자신이 무시하였던 연빈을 향한 아랫것들의 시선이나 대우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의 아비가 여전히 황제의 신임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황후 또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세심한 신경을 쓰고 있으니 전처럼 경우 없는 일이야 벌어지지 않을 테지만 이한은 지금의 연화운이 매사에 너무 무르게 굴고 있는 것이 영 신경 쓰였다.
“지난날의 연빈이 너희에게 과히 모질었음을 알고 있다.”
하여 이한은 그것이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튀어나가는 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허나, 지금 연빈이 보이고 있는 관대함은 감히 너희가 쉽게 바랄 수 없는 일임을 너희 또한 잘 알고 있겠지.”
“무, 물론입니다, 폐하. 소, 소인들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더없이 과분한 일임을 너무나도 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안궁의 모든 이들은 응당 너희의 주인에게 마음 깊이 충성하고 최선을 다해 그를 보살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황제 폐하께서. 그간 연빈에 관한 일이라면 단 한 번도 좋은 말씀을 내려 주신 적이 없던 분께서. 지난번 정안궁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연빈을 탓하셨던 바로 그분께서 정안궁의 어린 궁녀에게 처음으로 너희가 응당 연빈을 잘 보필하여야 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 정안궁의 주인이 연화운이 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그 엄청난 압박감에 덜덜 떨며 대답을 올리면서도 어린 궁녀는 마음이 들떠 바닥을 짚은 두 손으로 주먹을 꾹 쥐며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제 마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벌써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는구나.”
수화원의 연못 곁에 있는 커다란 돌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만히 연못 위에 떠 있는 꽃잎이며 하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던 화운이 말을 꺼냈다. 오늘도 옆에 같이 앉자는 화운의 말을 한사코 거절한 채 서 있던 아진이 화운의 말에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예, 마마. 마마께오선 몸이 차시니 추위가 가시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날이 더워지면 쉽게 기력이 떨어지시는지라 걱정이에요….”
“사시사철 네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계절이 없겠구나.”
아진의 걱정스러운 음성을 들은 화운은 나름 농담을 하여 그의 마음을 풀어 주려 말을 한 것인데 아진은 더더욱 울상이 되고야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날이 추워서, 더워서, 건조해서 매번 걱정을 금할 길이 없을 날들이 문득 뻔히 보인 탓이었다.
이전에야 날이 궂으면 혹여나 몸이 아픈 화운이 제게 더 화풀이를 할까, 그 걱정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진심으로 화운의 몸 상태를 매번 염려하게 되었으니 말 그대로 사계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계절이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마마께서 조금 더 건강해지실 수 있을까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제 말에 더 시무룩해진 아진의 표정 때문에 덩달아 시무룩해진 화운이 눈치를 보며 ‘그러게….’ 하고 대답했다. 사실 툭하면 아프고 쉽게 앓고 쓰러지는 몸이 누구보다 답답한 건 화운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후궁이 되었으니 그전처럼 싸움을 하거나 몸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은 없겠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제 몸을 더없이 자유롭게 이용하며 살아왔던 화운에게 지금의 몸은 너무나도 제약이 많아 답답했다. 무술을 할 수 없게 된 것이야 둘째 치고 숨 쉬는 것까지 이리 힘든 몸이어서야.
“…아진.”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화운이 가만히 아진을 불렀다. 네? 하고 곧바로 대답을 해오는 아진에게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은 얼굴을 하던 화운이 조용히 입을 연다.
“혹시… 내무부에 요청을 하면….”
“네, 마마.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목검을 하나만 얻을 수 있을까?”
“…목검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에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목검이라니. 검이라니. 그건 살면서 화운의 입에서 들어 볼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단어였다. 아진이 황급히 화운을 향해 다시 물었다.
“목검은 어디에 쓰시려구요?”
되묻는 목소리에는 적잖은 의아함이 있다. 지금이야 그런 의심은 절대로 하지 않지만 조금만 더 예전이었다면 설마 그걸로 정안궁 아이들을 때리려고 하시는 거냔 물음이 절로 흘러나왔을 것이다. 일일이 듣지 않아도 지금 아진의 의아함이 얼마나 클지 느낄 수 있는 화운이 괜히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대답했다.
“아니, 그냥 조금… 갑자기 조금 궁금해서… 그냥…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