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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60)화 (6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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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운 채로 화운은 저의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폐하께서 돌아가신 지가 한참인데 화운은 여전히 그분의 따스한 온기가 제 손에 남아 있는 것 같아 자꾸만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네 주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그런 말을 하느냐 따지는 말 한 마디 없이 내가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고 말씀하여 주시던 황제의 음성이 연신 귓가에 맴돌았다. 어디 그뿐인가. 오 태감도, 아진도 모두 얼어버린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 속에서도 꿇어앉은 저를 향해 손을 내밀어 주시고 돌아서 가실 때까지 저를 향해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으시던 황제이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손끝이 저릿하기도 했다가 뺨이 슬그머니 달아오르기도 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올라 할 수만 있다면 제가 살던 저잣거리로 달려 나가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 이리도 어진 분이시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아니 어쩌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화운이 정말로 이토록 기쁘고 설레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건 단순히 폐하께서 성군이시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화운은. 꼭 인정받은 것 같았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러한 일들을 겪었지만 황제의 곁에 머물기 위해 그토록 먼 길을 달려 온 것이 결코 잘못된 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그 무엇도 후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것을 인정받은 것 같아서. 증명해낸 것 같아서.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하운은 망설임 없이 황제께서 계시는 이곳으로 올 것이라 그리 확신할 수가 있어서.

그래서 화운은 웃었다. 황제의 목소리와, 손길과, 숨결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생생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오 공공.”

이한과 마주 보고 앉아 오찬을 하고 있던 황후, 자란이 문득 무거운 목소리로 오 태감을 부르자 그때까지 딴생각에 잠겨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던 이한이 덩달아 시선을 돌려 황후를 바라보았다. 자란은 그런 이한에게는 시선을 두지 않고 곁에서 ‘예, 마마.’ 하고 허리를 굽혀 대답한 오 태감을 향해 말했다.

“폐하께서 이리 얼굴이 상하실 때까지 어찌하여 내게 이르지 않았는가.”

생각지도 못했던 황후의 말에 이한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보다 조금 더 빠르게, 오 태감이 바로 무릎을 굽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황후마마. 소인이 맡은 바 소임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고 폐하를 모심에 있어 부족함이 있었으니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아, 아니….”

정작 본인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황후와 오 태감이 서로 심각한 분위기가 되어버리니 당황한 이한이 더듬거리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오, 황후.”

“폐하. 지난밤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그것이….”

“안색이 한눈에 보일 만큼 좋지 않으십니다. 분명 입맛도 없으시니 오찬조차도 이리 제대로 드시지 못하고 계신 것이겠지요.”

황후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야말로 이한의 지금 상태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꼬집어 이한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그저 입을 꾹 다문다. 허나 이만 쉬시라 만류하는 오 태감의 말을 듣지 않고 새벽녘까지 수화원을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닌 건 전적으로 황제인 자신의 의지였다. 오 태감이 감히 어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폐하의 옥체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 태감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다면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황후인 저에게 고하였어야 옳았습니다.”

“…….”

“아니 그런가, 오 태감.”

황후의 말은 결국 황제가 오 태감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몸을 상하게 만들었음은 알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그렇다면 황후인 자신이 나서서라도 폐하를 살필 수 있게 미리 일렀어야 했다고, 그리 오 태감을 꾸짖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결국 황후는 황제로서 오 태감의 말조차 듣지 않고 그 자신을 상하게 만든 황제를 타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한이 당황한 표정을 풀고 황후를 바라보며 민망한 듯 한 번 웃었고, 오 태감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황후마마의 말씀이 백 번 천 번 옳습니다. 방만하였던 소인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허나 황후가 그 말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연 건 황제였다.

“…내가 잘못하였소. 그러니 황후는 이만 마음을 푸시오.”

황후, 자란의 시선이 그제야 오 태감에게서 벗어나 이한에게로 향한다. 왕부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때때로 이한을 경계하고, 꾸짖고, 북돋으며 걸어왔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충신의 모습 그대로의 눈빛이다. 그리 잠시 말이 없이 이한을 바라보던 자란이 이내 꿇어 있던 오 태감을 향해 말했다.

“폐하께오선 이미 국사로 더없이 어려운 길을 가시는 분이시지. 그러니 다른 일로는 더 마음 쓰시지 않도록 자네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네.”

“예, 황후마마. 명심하겠사옵니다.”

“이만 일어나시게.”

다른 일로는 더 마음 쓰시지 않도록.

황후는 부러 그 말에 힘을 주었다. 이한은 그 말을 그저 가볍게 듣고 흘리는 것 같았으나 순간 잠시 예리해진 오 태감의 눈동자를 보았던 자란은 그가 자신의 뜻을 깨달았음을 눈치챘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리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심란해하는지 정작 이한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였으니 그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 마땅히 황제를 모시는 이들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황후께서는 과연 어디까지 그 책임을 다하실 생각이신지. 차마 그리 황후에게 물을 수는 없는 오 태감은 그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것은 진녕헌에 가져다주어라.”

“진녕헌에요?”

아진이 놀란 토끼눈이 되어 제 주인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진녕헌이라면 정빈의 궁을 말하는 것인데 화운은 방금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계화떡을 그곳에 가져다주라 한 것이다. 아진의 되물음에도 화운은 여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난번에 보니 계화떡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 폐하께서 오시는 바람에 얼마 먹지도 못하고 돌아가질 않았니. 이왕 만든 김에 함께 나누어 먹으면 좋지.”

그러나 화운의 대답에도 아진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입술을 꼼질거렸다. 화운이 변한 것을 다른 궁의 궁인들이 전부 믿지 못한 것처럼 아진 역시 갑자기 제 주인에게 와 친한 척을 하는 정빈을 믿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연빈에 대한 악감정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빈이 아니던가. 물론 제 주인이 그에게 한 일이 있으니 아진도 그것 자체를 무어라 따지고 싶은 건 아니었으나 정빈이 하루아침에 정안궁까지 찾아올 정도로 마마께 들이대는 것이 영 미심쩍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마마….”

지금의 마마는 너무나도 곱고 여려서 행여나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먹고 다가온다면 분명히 상처를 입힐 수도 있기에 더더욱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아진이 다시 한 번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물론 화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가져다줘. 노력하는 나를 받아 주고 먼저 다가와 준 분이니 얼마나 고마우니.”

하지만 이어진 화운의 말에는 아진도 결국 마음이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매번 거절당하기만 했던 화운의 노력들이 얼마나 제 주인의 마음속에서 아픔이 되었을지 새삼 떠오른 탓이었다. 갑자기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파 아진이 ‘네에….’ 하고 울적하게 대답을 하려니 화운이 그런 아진을 달래듯 조금 더 목소리를 밝게 높이며 말했다.

“그보다, 이제 간식이 전부 준비되었으면 다들 모여 먹으라고 전해 줘.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챙겨 줘야 해, 알겠지?”

그 말에 아진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정안궁은 지금 전에 없이 모두가 들떠 떠들썩한 분위기였는데, 그 이유는 마마의 명으로 오늘 간식거리들을 만들어 정안궁 아이들과 다 함께 나누어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각 궁으로 오는 음식의 재료들은 사실 매번 필요한 양보다 더 웃돌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비싸고 좋은 재료들은 오로지 궁의 주인만이 먹을 수가 있는데 감히 황제 폐하의 비빈들에게 보내는 것을 궁색하게 할 순 없으니 보통 혼자는 다 먹지도 못할 만큼의 양이 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전부 상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며칠 전 그리 버려지는 음식들이 매번 넘친다는 걸 알게 된 화운이 먼저 제안을 한 것이다. 허면 그것들을 모두가 함께 나누어 먹자고. 나 혼자서는 다 먹지 못할 양이니 맛있게 만들어 다 같이 나누어 먹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그 말을 처음 들었던 아진이 엉엉 울지 않기 위해 얼마나 입술을 깨물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고급스러운 음식이 버려진다고 하여 그것을 아랫것들과 함께 나누어 먹을 생각을 하는 주인을 아진은 살면서 들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날 아진에게서 그 말을 전해들은 정안궁의 어린 궁인들이 죄다 눈물바람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 마마.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먹을 수 있게 제가 잘 챙길게요.”

“그리고 이건….”

아진의 목소리가 조금 물기에 젖어 있는 것은 눈치챘지만 괜한 생색은 내고 싶지 않아 모른 척을 하며 화운이 이번엔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화려하게 준비되어 있는 찬합을 바라본다. 코를 한 번 훌쩍거린 아진이 잽싸게 말을 받았다.

“이것도 무사히… 폐하께 잘 전해드리고 올게요.”

비록 폐하께서 원하지 않으실지라도, 이토록 별것 아닌 하찮은 것이라도 화운은 폐하께 저의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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