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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집착인 걸 알면서도. 자신에게도, 그리고 죽은 하운에게도 전혀 도움 되지 않을 미련이고 감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천은 기어코 정안궁으로 가 그를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정확하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하운이 마지막에 있었던 그 자리에 단순히 머물고 싶은 건지, 아니면 연빈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기고 싶은 마음인 건지, 그것도 아니면 다만 연빈에게 하운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은 건지 무언지.
‘어찌 손에 이리 상처가 날 때까지 미련하게 훈련을 하고 그래.’
늦은 밤 물집이 터진 저의 손에 손수건을 감아 주며 제 손이 다친 듯 속상한 목소리로 타박을 주던 하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 모든 미련은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전부 하지 못한 제 마음에 대한 미련은 아닌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밤 속에서 서천은 그저 많은 감정들을 삼키고만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마마….”
따뜻한 물에 담근 화운의 손을 부지런히 주물러 주며 아진이 잔뜩 지쳐버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진은 아직도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심장이 거칠게 뛰고 두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아진의 목소리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화운이 고개를 들어 아진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응. 이제 안 그럴게.”
“말씀만 그리 하지 마시구요….”
“응응. 놀라게 해서 미안해.”
대답 하나는 참으로 잘하시는 주인의 얼굴을 샐쭉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진이 따뜻한 물에 담그고 나서야 겨우 온기가 돌아온 화운의 손을 부드러운 수건을 닦아내며 생각에 잠긴다.
이제는 제 주인의 변화에 대해 더 놀랄 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있었던 일은 그 누구보다 화운의 변화를 일찍 받아들이고 지지하던 아진에게도 정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의 주인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느끼는 아픔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단 한 번도 약하거나 어려운 이들을 동정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길을 가다 굶주리고 더러운 어린아이가 배가 고파 옷자락을 잡아오면 제 옷자락에 묻은 더러운 흙먼지를 불쾌해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헌데 그런 자신의 주인이 오늘 보인 행동은 어떠했나. 그는 후궁의 몸으로 감히 황제께서 하시는 일에 관여했다는 죄를 뒤집어쓸 것을 기꺼이 각오하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었다. 만약 아진이 바로 곁에서 듣지 않았다면 절대로 믿지 못했을 일이다.
그래서일까. 화운의 손에 남은 물기를 모두 닦아낸 수건을 손에 든 채로 그를 바라보던 아진은 문득 제 주인의 얼굴이 너무나도 낯설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함께해와 이제는 눈을 감고도 그의 눈망울이, 입매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낼 수 있다고 여겼는데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앉아 있는 이의 얼굴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익숙하지가 않았다.
“아진…?”
갑자기 멍하니 서서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아진의 기색이 이상함을 눈치챈 화운이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놀란 아진이 ‘네?’ 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잠시 흐려졌던 시선을 다잡자 근심어린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화운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오늘 너무 놀라게 했나 보구나. 어서 가서 쉬어. 응?”
응? 하고 높여오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다정해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따라 그 다정함마저도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낯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마마….”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계속해서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아진의 모습에 순간 표정이 안 좋아진 화운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아진에게로 더 다가서 안색을 살폈다. 섬세한 눈빛으로 혹시나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화운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진은 이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 아니에요, 마마. 그냥 마마의 말씀대로 오늘 너무 놀라서 그런 것 같아요.”
“으응…. 이제 나도 자리에 누울 테니까 어서 가서 편히 쉬어.”
“네. 그럴게요, 마마.”
혹여나 주인이 더 걱정하지 않도록 애써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은 아진은 손에 든 수건을 꼭 쥐며 마음을 황급히 다잡는다. 마마께서는 그저 큰일을 겪고 기억을 잃은 뒤 달라지신 것뿐이었다. 지금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익숙한 얼굴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닌가. 아무래도 오늘 일이 정말로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라고. 그리 생각하며 아진은 익숙한 손길로 화운의 침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이러한 이상한 감정은 자고 일어나면 모두 사라질 일이었다.
“폐하…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오 태감이 답지 않게 초조한 얼굴을 하곤 황제에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한은 한 시간째 밤의 수화원을 정처 없이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시곤 늦게까지 내도록 일에 매달리다 또 이리 하염없이 길을 걷기만 하시니 오 태감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한은 그런 오 태감을 한번 바라보지도 않고 여전히 말이 없이 걸음을 내디딜 뿐이다. 그늘진 황제의 얼굴이 과연 어떠한 상념을 담고 있는지 오 태감은 감히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오늘 정안궁에서 연빈과 대화를 나눈 이후 줄곧 어두운 얼굴을 하고 계시었으니 막연히 그와 관련된 감정이겠거니 생각을 할 뿐.
그렇게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불현듯, 이한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기억을 잃었다면, 갑자기 다른 세상에 홀로 떨어진 것 같았겠지.”
그때 이한의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가 보고 있는 건 눈앞에 펼쳐진 수화원의 그 어디도 아닌 이 자리에는 없는 누군가의 모습일지라, 오 태감은 저도 모르게 대답하려던 목소리를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이한이 말을 이었다.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주변에 있는 이들이 전부 자신을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제가 하는 그 어떤 말도 믿지 않았다면 얼마나 막막하고 겁이 났을까.”
이한은 화운이 물에 빠졌다 깨어난 후 제가 처음 정안궁을 찾아갔던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몸조차도 아직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이를 앞에 꿇려놓고 자신은 무슨 말을 했던가. 무슨 말들로 그를 무시하고 탓하였던가. 한 마디, 한 마디 제가 했던 말이 기억이 되어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이한은 심장이 매번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아 입술을 깨문다.
“제가 하는 모든 노력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모욕하던 내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럴 때마다….”
우연히 마주친 수화원에서. 무턱대고 찾아가 궁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를 멸시했던 정안궁에서 자신의 앞에 있던 연화운의 얼굴이, 표정이 어떠했는지 이한은 차마 다시 되짚어 볼 수도 없다. 겁이 났다. 그가 아프고 서러운 표정을 꾹꾹 참아 견뎌내고 있었을까 봐 이제 와 이한은 그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가… 그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고, 아팠을지….”
“폐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았나이까. 연빈마마의 과거 행적이 그러하였으니 폐하께서 어찌 단번에 그 모든 말들을 믿을 수가 있었겠는지요….”
오 태감의 말에 이한이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저만치 달빛이 어린 길의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한도 알고 있었다. 연화운의 과거 행적을 알고 있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이한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을. 오히려 자신은 그가 저지른 짓에 비하면 유하게 그를 대하였다는 것을 이한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더 낮은 자리의, 더 약한 이들을 부디 살펴 주시라 간청하던 화운을 떠올려 보면. 저의 손등에 이마를 대고 마치 그 자신이 구원 받기라도 한 것처럼 감사를 올리던 연화운을 곱씹고 있으면. 그러면.
그러면 이한은 제가 그에게 모진 말을 내뱉은 날에 맞이하였을 연화운의 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자신은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일을 때문에 매번 무릎 꿇고, 반성하고,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던 연화운의 밤을. 그날의 기분들을.
“…그러니 연화운이 내게 그리 담담하게 구는 것도 무리가 아닌 일이지.”
“…….”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날들에 저를 향해 악독한 말만 퍼부은 이를 과연 누가….”
과연 누가, 은애할 수 있을까. 이미 그에겐 저를 연모하던 날들은 기억마저도 없을 터인데.
이한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였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황제와 후궁의 사이란 애초에 연모이니 무어니 하는 감정 따위는 끼어들 이유가 없는 관계이고 그런 감정들은 황제인 자신이 일개의 후궁과 나눌 만한 것들은 더더욱 아니었으니.
‘저는 아직 폐하의 믿음을 받을 이가 되지 못합니다.’
지난 어느 날, 더없이 혼란스러웠던 이한을 앞에 두고 화운이 마치 그를 위로하기라도 하는 듯 건네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제 입으로 해야만 했던 연화운의 심정 따위를, 이한은 정말로 이제 와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안정전으로 돌아가자.”
한참 만에 황제의 걸음이 돌아섰다.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가는 또 하나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