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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조금만… 구휼소에서 곡식을 나누어 주는 이들에게 조금만 더 상황을 살피라 명하시어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치이는 더 약한 이들을 보호하여 주신다면 하늘을 덮고 땅을 채우는 폐하의 은혜가 더더욱 낮은 곳까지… 폐하께서 살피길 원하셨던 바로 그 자리에까지 가닿을 수 있을 테니….”
“……”
“폐하. 감히 후궁 된 몸으로 폐하께 이리 방자하게 구는 저를 벌하시되 부디 한 번만 더 그들을 살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화운의 처소에 침묵이 맴돌았다. 황제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이 화운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 그 누구도 감히 먼저 입을 열 수가 없음이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한은 제 앞에 꿇고 있는 화운을 바라보며 내도록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연화운의 모습이,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이것이 단지 죽음을 경험했다고 하여 변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일이 맞을까.
반성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이다. 자신이 했던 일을 후회하여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연화운이 그간 보여 준 변화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격렬하여 놀람이 있을지언즉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틈이 나면 매질을 하고 괴롭히던 아랫것들에게 관대하게 대하는 것. 방자하고 불경하게 굴던 황후에게 예를 다하는 것. 더 이상 황제에게 집착하지 않고 그를 거짓으로 기만하려 들지도 않는 것. 이러한 것들은 연화운이 할 수 있었다. 이전에 자신이 했던 행동들의 반대로만 행동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진정으로 지난날을 후회한다면 얼마든지 행동을 바꾸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것은 아니다. 지금 연화운이 제게 고한 말은 위의 것들과는 전혀 궤를 달리 하는 것이라고 이한은 생각했다.
연화운에게 백성이란 없는 존재였다. 그는 태어나기를 이미 이 나라에서 가장 인정받는 공신의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을 곱게 자랐고 이제는 황제의 후궁이 되어 황궁 안에서 머무는 이었다. 그는 황제나 황후처럼 백성을 돌아볼 의무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 본성 자체가 백성의 삶에 관심을 두어 그들을 살피려 하던 이도 아니다.
밖에서 굶주리는 이들은 정안궁에서 화운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이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단 한 번도 화운의 삶 안으로 들어온 적이 없고, 화운이 저의 신경 안에 들여놓은 이들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 연화운이, 아무리 지난 삶을 반성하였다고 하여도 하루아침에 이 정도로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살피고, 나아가 황제에게 그것을 위해 대책을 고할 정도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니. 이게 정말 말이 되는 일인지 이한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의 침묵 끝에 이한이 입을 열었다.
“…그만 일어나거라.”
“…….”
“내가… 너의 뜻을 잘 알았으니.”
폐하께서 호통을 치시진 않을까. 네 주제에 무엇을 안다고 감히 나랏일에 참견을 하느냐 그리 역정을 내시진 않을까. 길어지는 침묵 속에 내도록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화운은 제게로 건네진 황제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부드러워 놀란 눈을 들어 황제를 바라본다.
마주친 황제의 눈동자는 다소 놀란 듯 보였고, 또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하였으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 절로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진 화운이 쉬이 일어나지 못하고 그저 이한을 바라보고만 있으려니 짧은 한숨 같은 숨을 내쉰 이한이 이내 화운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수화원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단단하고 따뜻함이 깃들어 있는 손길을 내민 채로 이한이 말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던 부분이었다.”
“…….”
“네가 나를… 깨우쳐 주었구나.”
그리하여 화운은 그 순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의 황제는 처음부터 이러한 분이셨던 것을. 하운이 황제와 처음 스치었던 그 순간부터 그분은 한결같이 할 수 있는 한 허리를 굽혀 백성들의 삶을 바라보고 이끌어가고 싶어 하셨던 분인 것을.
어떤 상황에서라도 백성들을 위해 자신이 들어야 할 말들은 기꺼이 듣고 받아들이는. 하여 진정 백성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연화운 따위가 하는 말이라고 하여도 기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있으신, 그러한 성군이심을 바로 이 자리에서 화운은 뼈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도무지 벅차오르지 아니할 수가 없어서. 이러한 분을 어찌 마음 깊이 진정으로 존경하고 경외하지 않을 수 있는지 화운으로서는 도무지 그 방법을 알 수가 없어서. 화운은 내밀어진 황제의 손을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감싸 쥐고는 그 위로 이마를 대며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비록 하운은 그날 우연히 황제 폐하를 마주해 이 멀고 먼 황궁까지 와 결국 허무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의 황제가 이토록 좋은 분이라서, 화운은 오로지 한 분만을 보고 황궁에 들어왔던 그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서천! 서천!!”
교대를 마치고 돌아와 씻고 잠잘 준비를 마친 서천을 도명이 다급하게 찾았다. 이내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서천을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온 도명은 서천이 무슨 일이냐 묻기도 전에 목소리를 높여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너야말로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 너 정안궁으로 위치를 옮겨달라고 했다며!”
그제야 서천은 도명이 갑자기 왜 이리 흥분한 건지 깨달았다. 별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서천이 아… 하고 태연한 소리나 내고 있자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 도명이 서천의 옆에 주저앉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로 너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는 무슨. 정안궁에 사람이 부족하다고 하길래 그러면 내가 가겠다고 한 것뿐이야.”
“야, 귀신은 속여도 날 속일 생각은 하지 마라. 아직도 밤마다 하운이 생각에 잠을 못 이루는 거 내가 다 아는데 네가 퍽이나 정안궁으로 아무 생각 없이 가겠다!”
도명은 서천이 하운의 죽음을 연빈의 탓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 말이 아주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연빈이 하운을 죽이기 위해 물에 뛰어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억지로 누군가가 하운에게 물에 뛰어들도록 강요한 것도 아니고, 연빈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건 전적으로 하운의 뜻이었다. 도명은 냉정하게 말해 그 일을 두고 연빈의 탓을 할 수만은 없다고 여겼다.
물론 도명도 연빈이 황제의 동정을 사기 위해 일부러 물에 빠졌다고 생각하긴 했으므로 하운을 아끼는 입장에서는 그 죽음이 억울하고 분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이해가 갔다. 하지만 하운은 이미 죽었고 그것은 되돌릴 수는 없었다. 도명은 혹시라도 서천이 그 일에 얽매여 큰 실수를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대답이 없는 서천을 두고 도명이 말을 이었다.
“친우로서 내가 이렇게 부탁한다. 허튼짓할 생각이라면 제발 여기서 그만둬. 응?”
“…그런 거 아니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말고 가서 잠이나 자.”
“어휴, 진짜. 이러다 내가 내 명에 못 죽지. 소속 이동까지는 며칠 시일이 걸릴 테니 그때까지 제발 잘! 잘 좀 생각해 보고 마음을 바꾸길 바란다! 제발!”
무슨 말을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 서천의 표정에 도명은 속이 터지는 듯 제 가슴을 팡팡 치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한번 마음먹은 건 옆에서 무슨 말을 해도 바꾸지 않는 녀석이니 더 말을 해 봤자 제 속만 답답할 터였다. 도명은 제발 서천이 순간의 감정으로 자신의 삶을 그르치는 일만은 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도명이 물러간 자리에 다시 혼자가 된 서천은 이내 자신의 품에서 손수건 하나를 가만히 꺼내 들어 바라보았다. 언젠가 서천의 다친 손에 하운이 손수 감아 주었던 그의 손수건이었다. 지난번 연빈이 어느 궁녀의 손에 손수건을 친히 둘러 주었다는 말을 듣고 난 후 서천은 내내 하운의 이 손수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서천도 알고 있었다. 죽은 이는 이제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연빈이 아무리 천하의 몹쓸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가 일부러 하운을 죽인 것은 아니었으니 그를 탓하는 일 역시 마땅한 일은 아니라는 걸 서천도 머리로는 알았다. 그래서 이제 그만 잊으려고도 수없이 노력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서천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운이 죽은 뒤 온 황궁에 연빈의 이름이 자꾸만 퍼져나갔다. 전처럼 악독한 일들 때문에 나오는 말들이 아니었다. 연빈이 죽었다 살아난 후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가 얼마나 다정하게 변하였고, 얼마나 아랫사람들에게 자애롭게 대하는지. 그리 변한 연빈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아하게 보이는지. 그런 말들이 서천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허면 서천은 사실 정말로 다정한 이가 누구였고, 저보다 더 약한 이들을 아끼고 챙기며 살아왔던 이가 누구이며, 정말로 아름답고 고아한 이는 누구였는지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연화운이 듣고 있는 모든 말들은 사실 누구보다 하운에게 가장 어울리는 평가였다.
그래서 연빈을 향한 그런 말들을 듣고 있으면 서천은 제 것도 아닌데 빼앗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운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가. 하운을 그리 허무하게 죽도록 만들었던 이가 이제는 본래 하운이 가지고 있던 성품까지도 제 것으로 빼앗아 간 것만 같았다. 그게 마땅한 감정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