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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57)화 (5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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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이한은 그제야, 제가 무엇 때문에 정안궁까지 이리 한달음에 달려왔는지를 다시 떠올렸는데 문득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고 드니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지는 것을 느꼈다.

네가 그리 어여쁜 얼굴로 온 궁을 활개치고 다니며 궁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으니 당장 그것을 그만두어라!

황제의 체면에 당연히 그리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이한은 답지 않게 말을 머뭇거렸다. 언제고, 누구의 앞에서고 망설이며 말할 일이 없는 황제로서는 당연히 드문 일이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화운은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마음 깊이 듣고 명심하겠다는 의지가 너무나도 선명히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직 말로 꺼내지도 않은 속마음에 이한은 벌써 낯이 뜨거워졌다.

앞으로 그런 옷은 입고 다니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사내인 이를 두고 사내처럼 굴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네 얼굴에 엄한 궁인들이 괜한 소란을 떨고 있으니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차례차례 제가 하고는 싶지만 절대로 하지 못할 말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이한은 제가 정말 미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을 입 밖으로 꺼내든 안 꺼내든 저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저런 말들을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게다가 그럴 의도는 물론 없겠으나 순한 얼굴로 자신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다리고 있는 화운의 얼굴을 마주하자니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한 압박감이 이한을 옥죄어왔다. 이런 총제적인 이유로, 절벽에서 떠밀린 사람처럼 이한이 입을 열었다.

“다음 주부터 각각의 지역에 구휼소를 설치하여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과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이 시작될 것이다.”

황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뒤로 물러나 문간에 서 있던 오 태감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고 황제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맞은편의 뒤쪽으로 물러나 있는 아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순간에, 굳이 정안궁까지 온 황제가 내뱉을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한이 어떤 심정으로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오 태감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오 태감에게 감히 황제의 말을 끊어내고 고쳐 줄 힘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이미 한 발자국을 내디뎌 그것이 잘못된 길인 것을 알면서 계속 갈 수밖에 없는 이한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난번에 말했듯 헛된 사치는 줄이고… 그… 자중을 해야 할 것이야….”

이한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이대로 그냥 일어나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곤욕스러운 상황에서도 적절하게 임기응변을 하여 일을 헤쳐 나갔던 황제로서의 능력은 전부 어디로 갔는지 한번 당황하자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비었다. 오늘 아침 조회 때 신하들과 조율하였던 구휼소 일정에 관한 이야기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걸. 차라리 그냥 한번 와봤다는 소리를 해버릴걸.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오 태감이 자신을 심히 비웃는 것만 같은 기분에 이한은 화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눈동자만 굴려대며 어울리지도 않게 발끝을 꼼질거린다. 어처구니가 없는 말에 연화운이 자신을 기가 차 쳐다볼 걸 생각하니 차마 그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때, 연화운이 대답했다.

“예,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폐하의 은덕에 만백성이 깊이 감복할 것이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다시 시선을 돌려 화운을 바라본 이한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설마하니 이토록 황당한 저의 말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자신의 말을 비꼬아 비웃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기도 하였으나 똑바로 마주 본 화운의 얼굴은 정말 이한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서 허탈해지기까지 하였다.

황제가, 후궁의 처소까지 와서 저와는 조금도 관련이 없고 굳이 여기까지 와 제게 할 만한 내용도 아닌 말이나 하고 있는데 어쩜 이리 실망한 기색이 하나도 없는지. 과연 이 연화운이 하루가 멀다 하고 폐하께선 어찌 제 처소를 찾아 주지 않으시느냐 울며불며 난리를 쳐 이한을 질리게 만들었던 그 연화운이 정말로 맞는 것인지. 이토록 낯선 화운을 오늘 처음 마주하는 것도 아니건만 새삼 그 낯선 변화가 마음으로 훅 다가와 어안이 벙벙했다.

“…….”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한은 화운의 표정이 다소 심각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그건 방금 전까지 보았던 이한의 말에 순응하는 표정과는 완전히 달랐다. 화운이 달라지고 나서는 매번 이전에는 없던 얼굴을 마주하곤 했지만 지금처럼 자신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드는 화운의 얼굴은 또 처음이라 이한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아…!”

잠시 혼자만의 깊은 상념으로 빠져들었던 화운이 이한의 물음에 불쑥 주의를 환기하며 시선을 든다.

그때 화운은, 제가 하운으로서 살았던 생의 날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삶에 언제나 함께 있었고, 또한 제 주변의 삶들에 역시 지겹도록 함께 하였던 굶주림과, 고독과, 추위와 그 모든 것을.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있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하운의 삶은 이미 끝이 났고 그는 이제 연화운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굳이 지나가 다시 오지 않을 날을 끄집어내 주제넘은 말을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고민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비록 지금의 자신에게는 없는 일이나 밖에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는 그것이 여전히 견뎌야만 하는 삶이었기에. 심호흡을 한 번 한 화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주제넘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구휼소에 관하여 한 말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화운의 태도에 덩달아 자세를 고치며 진지한 얼굴이 된 이한이 이내 ‘말하라.’ 하고 허락의 말을 건네주자 화운이 말을 이었다.

“각지에 구휼소를 두어 백성을 돕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엄청난 인력과 자금이 드는 일인 것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폐하.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들 중에서도 더 약한 이들 또한 소외당하지 않고 폐하의 성은을 입을 수 있도록 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뒤에서 듣고 있던 오 태감의 표정은 물론이고 제 주인의 말을 함께 들은 아진의 안색이 창백하게 바뀌었다. 후궁의 몸으로 황제께서 하시는 일에 감히 말을 얹는다는 건 대대로 금기시 되어오는 일이었다. 비록 이 일이 안국의 중요한 정사와 관련된 일은 아니라고 하나 그렇다고 하여 일개 후궁이, 심지어 황후도 아닌 빈이 쉽게 말을 더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것을 모르지도 않을 텐데 아진은 어째서 제 주인이 갑자기 이토록 위험천만한 말을 폐하께 고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겨우 빛이 보이고 있는데. 최악으로만 치달았던 두 분의 사이에 이제야 조금 작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생전 한번 신경도 써 본 적이 없는 궁 밖 백성들의 일에 어째서 저의 주인이 나서는 걸까. 아진은 당장이라도 폐하께서 호통을 치고 정안궁을 떠나실까 하염없이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다.

황제가 굳은 얼굴로 제 앞에 꿇어앉은 화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황제의 낮은 목소리는 좀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지만 화운은 이미 큰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그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폐하. 크게 보면 그들은 전부 굶주린 폐하의 백성들이나 사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하나하나 너무나도 다른 삶들이 있습니다. 천민들 사이에서도 가진 힘에 따라 서로 간의 우위가 아주 분명하지요.”

“…….”

“사내들은 그들 안에서 또 하나의 권력자가 됩니다. 여인과 아이들은 천한 계층 안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고요. 구휼미든 무엇이든 그것이 전국의 모든 백성들을 전부 다 배부르게 먹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 되면 결국 힘없는 아이들과 여인들은 아예 구제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거나, 운이 좋아 곡식을 얻어도 쉽게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짐작이 아니었다. 어쭙잖게 머리를 굴려 생각해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곧 하운의 삶이었기에. 최소한 자신을 보호하여 줄 부모조차 없던 고아로서 하운이 당하고 버텨내었던 삶이었기에 알고 있는 사정이다.

황제가 아무리 어질고 자애로워도. 황후가 아무리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여도. 그러해도 그들은 세상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기에 결코 속속들이 알 수 없는 바닥의 삶들이 있다. 몰랐으면 모를까, 화운은 그것을 알면서도 지금 저의 삶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핑계로 그것들을 모두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들 모두를 챙기고 살필 수 없다는 건 압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도요. 이렇게 폐하께서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셔 구휼소를 열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히 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는 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저… 폐하….”

하운의 삶에는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있었다. 무엇 하나 대단하지 않은 죽음들이. 너무도 초라하고 비참한 죽음들이 하운이 살아온 나날들에는 모래알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그것들은 하운이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을 이루어 궁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간다고 하여 전부 다 주워 담을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화운은 자신이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겨우 얻은 만두 하나를 절반으로 잘라 자신보다 더 어린 아이에게 나누어 주었던 오래 전의 날들처럼. 지금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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