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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화운이 저도 모르게 순간 움찔한 것은 송현이 동생에 관하여 물었을 때였다. 자연스럽게 자신은 형제자매가 없다고 대답을 하려 했던 화운은 그것이 연화운의 대답이 아니라 저의 대답인 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연화운이 실제로 동생이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는 화운이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머뭇거리자 한 걸음 물러서 있던 아진이 냉큼 앞으로 나와 송현을 향해 대답했다.
“저희 마마께서는 아래로 여동생이 한 분 계십니다.”
여동생이 있다는 아진의 대답에 송현의 얼굴이 대번 환하게 밝아졌다. 송현은 이것을 거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사가에 그리워하는 오라버니가 계시고, 연빈 역시 만나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으니 그와 자신이 궁에서 서로를 남매처럼 여기며 의지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까부터 옆에서 계속 시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주아만 없었다면 송현은 그 자리에서 손뼉을 치며 좋아했을지도 몰랐다.
여기에 오기 바로 직전에도 주아는 연빈의 본성을 잊으셨냐고, 그는 언제라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마마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리 경고를 하였다. 그러나 송현은 만약에 화운이 정말로 과거의 기억을 잃었고, 지금 새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였다면 그를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맞서 주아의 말문을 막았다. 사람이 눈에 한번 콩깍지가 끼면 답이 없다더니 주아가 보기엔 제 주인이 딱 그런 경우였다.
그래서 송현이 급기야 그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주아가 그러지 마시라 말리고 또 말렸지만 물러서지 않고 연빈을 향해 허면 우리가 여기에서 서로를 남매로 여기고 의지하며 지내면 어떻겠냐고, 그런 말을 막 뱉으려고 하였을 때.
난데없는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
놀랍게도 그 불청객은 바로 황제였다.
“정빈이 정안궁에 갔다고?”
황후, 자란의 되물음에 선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마마. 오늘 문후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연빈에게 정안궁으로 놀러가도 되냐고 친히 묻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하하, 일이 참으로 재미있게 흘러가는구나.”
자란은 정말로 아주 즐거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연화운이 변하였을 때, 그리고 그 변한 연화운의 모습에 황제가 신경을 쓰기 시작했을 때 자란은 분명히 이 황궁 내의 어떠한 흐름이 연화운으로 인해 달라질 것을 예측하긴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비단 황제 폐하뿐만 아니라 후궁들에게까지 이토록 큰 영향을 끼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리 웃는 황후의 얼굴이 진심으로 즐거워 보여서 여전히 황후의 마음을 다 짐작할 수 없는 선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으려니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잠시 내려놓은 자란이 말을 이었다.
“정말 변하겠다고 마음먹었더라도 더없이 불리한 상황이라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그냥 보통의 사람이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기억 없이 삶을 이어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과거 자신이 한 일로 지금의 자신은 영문도 모른 채 모두의 미움을 받고, 멸시를 받아야만 하는 건 얼마나 막막한 일일까. 하여 자란은 화운이 진짜로 변한 것을 믿거나 믿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행동이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 여겼다.
특히나 본래 가진 심성이 곱지 못하다면 기억을 되찾지 않아도 주변의 외면과 무시로 인해 전과 다름없이 삐뚤어진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연화운은 꿋꿋했다.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지 못하고, 시험하려 하고, 바뀐 그의 모습을 조롱하고 무시해도 당장에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도 그는 지치지 않고 몸을 올곧게 세웠다. 그리고 이제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황제는 물론이요, 그와는 철천지원수처럼 지내던 이들의 마음까지 돌려내고 있다.
“…허면 이것이 본래 연화운이 가지고 있던 성정이었단 말인가.”
내려놓은 서책의 종이 위를 의미 없이 손끝으로 매만지며 자란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설득하고 깨닫게 하려 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아 가진 것이 거기까지인 모양이라고 그리 여겼던 연화운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일까.
어느 쪽으로도 시원하게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생각들에 자란이 눈이 깊어졌다. 하여간에, 지금의 연화운은 재밌는 사람이었다.
이한은 제 앞에 나란히 인사를 올린 두 사람을 다소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도 당황스러울 일인데, 심지어 연빈에게 온갖 막말을 수도 없이 들었던 정빈이 정안궁에 와 있는 상황이라니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어려운 광경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이가 없고 믿기 힘든 것은.
“폐하께서 갑자기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저를 향해 그리 묻는 정빈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미묘한 실망감이었다. 그는 마치 이곳에 나타난 황제를 조금도 반기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시선이 낯설고 기가 막혀 이한이 잠시 말이 없이 정빈을 바라보았으나 정빈은 황제의 그 시선도 느끼지 못하고 입술을 곰실거리고 있을 뿐이다.
정빈은 정말로 속이 상했다. 아쉬웠다. 겨우 겨우 여기까지 와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딱 알맞게 꺼낼 분위기까지 만들었는데 폐하께서 갑자기 오는 바람에 말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정빈은 그것이 불경한 마음인 걸 알면서도 자꾸만 폐하가 야속했다.
오지 않으셨다면. 아니 단 오 분만이라도 늦게 오셨다면. 그러면 자신이 지금 비영과 언니 동생으로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 것처럼 연빈과 자신도 오라버니와 그의 막냇동생처럼 그리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고작 그런 이유로 감히 황제에게 야속한 마음을 품는다는 걸 누군가 들으면 기함을 하겠으나 그건 지금 이 순간 송현이 느끼는 솔직한 감상이었다.
하지만 이한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았다. 안 그래도 궁녀들이 연빈을 두고 미공자니 무어니 입방아를 찧어 기분이 상한 채로 정안궁에 왔는데, 황제인 자신도 변한 연화운과 아직까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건만 정빈은 무려 연빈과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더없이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니 이 상황에 이상하게 속이 꿍하게 뒤틀리는 게 누군데 거기다 대고 정빈은 오히려 제가 서운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이한으로서는 정말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이유도 모르고 마음이 상한 이한이 이윽고 정빈에게 말했다.
“내가 연빈과 할 말이 있어 왔으니 정빈은 이만 물러가거라.”
송현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하, 하지만 폐하, 저도 방금 왔는걸요…!”
“마마!”
누가 무어라 말릴 새도 없이 튀어나온 송현의 말에 기겁한 주아가 황급히 송현의 팔을 당기며 그를 말렸다. 그제야 송현도 자신이 너무 건방지게 굴었다는 걸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예… 허면 이만 물러가옵니다, 폐하.”
인사를 올리고 정안궁을 나서는 송현의 시선이 마지막까지 아쉬움을 가득 담고 화운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던 이한은 그대로 시선을 돌려 태연한 표정으로 제 앞에 서 있는 연화운을 바라본다. 그의 희고 깨끗한, 그리고 담담한 얼굴을 보자니 다시금 속이 쓰려왔다.
오늘따라 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피부는 더더욱 희어 보였다. 단정하게 정리된 옷자락 아래로는 여느 사내처럼 입은 바지의 밑단이 보이니 그는 이제 어딜 보아도 황제의 후궁처럼은 좀처럼 보이질 않았다.
그러니까 저 얼굴을 보려고. 이한은 정말로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의 말에 따르면 저 수려한 미공자의 얼굴을 보려고 이 황궁이 정말로 그리 들썩이고 있다 이 말이렷다.
“폐하. 앉으시지요.”
하도 어이가 없고, 그게 사실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리 보다 보니 어느 새인가 저도 모르게 잠시 넋을 놓게 되어서 이한이 한참을 말도 없이 화운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화운이 황제를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선 채로 그를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이한이 황급히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흠흠, 괜한 헛기침을 하며 조금 전 정빈이 앉아 있던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앞에 놓인 향이 좋은 차며 이것저것 아기자기하게 잘도 준비한 당과를 보자니 이유도 모른 채 괜히 또 마음이 불편한 이한이었다.
“정빈과는 언제부터 이리 친해진 것이냐?”
결국 이한이 그 속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물었다. 화운은 망설임 없이 곧장 대답했다.
“정빈이 정안궁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제가 정빈에게 옳지 않게 행동한 일이 많은데 고맙게도 정빈이 지금 제가 하는 노력을 좋게 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답을 들은 이한의 마음이 또 덜컥 내려앉는다. 연빈이 하는 노력을 좋게 보아 주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조롱하였으며,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믿지 않았던 건 바로 이한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 말을 하는 연빈의 얼굴은 추호도 이한을 탓하거나 이한과 정빈을 비교하려 드는 기색이 아니었으나 그래서 괜히 더 마음이 쪼그라든 이한은 이리저리 시선을 굴렸다.
다행인지 무언지, 그사이 아진이 새로운 차와 다과를 내왔다. 화운의 시선을 피한 이한이 그런 아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화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폐하… 오늘 오신 것은 혹시 제게 따로 이르실 말씀이 있으셔서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