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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55)화 (5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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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에서의 입지도, 폐하와의 관계도, 황후마마나 다른 비빈들과의 사이도. 무엇 하나 이전과 비교해 나빠진 것이 없는데도 저의 주인은 종종 거대한 두려움에 쫓기는 사람처럼 어려운 얼굴을 하였으니 분명 아진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아진은 여기에서, 저의 하나뿐인 주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가 있어드릴게요.”

그게 무엇이든, 이제는 자신이 곁에 있겠다고.

“언젠가 마마께서 그 무거운 마음을 어딘가에 털어놓고 싶어지실 때. 그럴 때 제가 있어드릴게요.”

미천한 힘으로는 감히 해결해드릴 수 없더라도 눈이 없고, 귀가 없고, 입이 없는 사람처럼 묵묵하게 함께해드리겠다고.

“마마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무엇을 감추고 계시든. 어떤 것을 견뎌내고 계시든.”

“…….”

“마마께서 그것을 누군가 들어 주길 원하실 때, 그때는 가장 가까운 곳에 제가 있을 거예요.”

그것은 이전과 완전히 변한 연화운에게 이제 와 아진이 새롭게 하는 충성이었다.


“그게 정말이냐?”

식사를 하다 말고, 이한은 여전히 반쯤 얼이 빠진 얼굴을 하곤 오 태감에게 물었다. 태감이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한은 다시 또 입을 연다.

“정말 연빈을 미공자라 칭하며 다들 그리 난리란 말이야?”

이한은 태후궁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었던 궁녀들의 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난감한 얼굴의 오 태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저 심심한 아랫것들이 가볍게 입을 놀린 것뿐이옵니다, 폐하.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지요.”

하지만 그 시점에 이한은 이미 오 태감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있었다. 대신 이한은 최근 제가 보았던 화운의 모습을 샅샅이 머릿속으로 다시 살피고 있는 중이다.

이전엔 다른 후궁들과 하나 다를 바가 없이 그저 미색이 뛰어난 여인처럼 꾸미고 다니던 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생전 거들떠보지도 않던 남후궁의 의복을 꺼내 입었다. 화려한 장신구는 전부 어디에 버렸는지 서생들이나 하는 옥관으로 머리를 올리지 않나, 풍류를 읊는 이처럼 자유롭게 장포자락 흩날리듯 다니지를 않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한은 궁인들이 연빈을 두고 그리 입을 놀리는 게 이해가 가지 못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이상하게 속이 쓰렸다.

게다가 가마에 올라 아랫것들이 감히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지 못하게 한 것도 아니고 매일같이 멋대로 황궁의 길을 두 발로 휘젓고 다니니 이것은 아예 사람들에게 저를 보라고 얼굴을 부러 내걸고 다닌 꼴이 아닌가?

오 태감이 제 그릇 위에 올린 찬 하나를 대충 입에 넣고 이한은 마치 그 음식이 지금 제 속을 긁고 있는 누군가라도 되는 것처럼 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남은 밤새도록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거늘….”

그가 난데없이 제 품에 안겨 우는 바람에 황제는 밤새도록 마음이 심란했다. 요즘은 생전 하지도 않던 예전 생각이 나질 않나, 이유는 모르겠으나 어느 남후궁에게 정안궁을 지어 주었던 오래 전 선황의 마음에 대해 괜히 곱씹어 보질 않나,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연심이나 정인이니 무어니 하는 단어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잠 한숨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물론 자신이 갑자기 그런 생각들에 빠져든 게 꼭 연화운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한이 생각할 때 연화운은 여전히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가 괜히 제 앞에서 낯설게 눈물을 뚝뚝 흘려내니 괜히 저까지 쓸데없는 감상에 빠져든 것이 아니겠는가.

“정작 저는 얼굴로 남들의 환심을 사려고 그리 애를 쓰고 있었단 말이지….”

“폐하, 그런 게 아니옵고….”

“오냐오냐 했더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방자한 짓이 아니고 무어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 튀는 황제의 생각의 흐름을 붙잡아 보려 오 태감이 황급히 말을 붙였지만 여전히 황제는 들은 체도 아니 하고 있다. 황제의 머릿속에선 벌써 연빈이 여기저기 웃음을 흘리고 궁녀들을 희롱하여 마음을 꼬여내고 있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오 태감이 간신히 한숨을 참고 있으려니 이윽고 황제가 말했다.

“식사를 마치고 정안궁으로 간다.”

이제는 연빈을 그저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그에게 휘둘리는 일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하던 황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마, 정빈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내실에 앉아 오늘도 아이들이 정성스럽게 만들어 준 화병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화운은 안으로 들어와 고하는 서서의 목소리에 다소 놀란 얼굴을 하곤 ‘어서 모시어라.’ 하고 대답했다. 정안궁으로 놀러오겠다는 말을 이미 듣기는 하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후궁이 저에게 이정도로 친근하게 구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지라 듣고도 쉬이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정말 올지 모르니 간식을 준비해두라 한 것이 다행이었다. 아진이 서서에게 어서 주방에 가 간식을 내오라고 말하자마자 문간에서 정빈, 송현이 빼꼼 고개를 먼저 들이밀며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정빈.”

화운으로 깨어난 후 다른 후궁들과 이토록 사적인 자리를 가져 본 적이 처음인 화운은 약간의 긴장과 어색함, 그리고 작은 설렘을 함께 느끼며 송현을 맞이했다. 지금껏 화운이 대해왔던 이들이 전부 이전의 연화운으로부터 깊이 이어진 인연이라면, 조금 어색해 보이지만 미소를 지은 채로 들어오는 송현은 지금의 화운 그 자신이 시작하는 관계란 생각이 들어 이상하게 마음이 들떴다.

물론 정빈 역시 과거의 연화운과 수도 없이 부딪혔을 사람이긴 하지만, 그는 연화운의 마음에 정말 조금도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 뻔했다. 하여 화운은 이것이 온전히 제가 처음으로 의미를 두어 시작한 관계인 것만 같았다.

“쉬고 있는데 제가 방해한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천천히 안으로 들어온 송현은 그리 작게 중얼거리면서도 연신 시선을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걸 참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정안궁의 안으로 들어와 본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정안궁이 다른 궁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화려하다는 말은 익히 들어 보았고 밖에서 보기에도 궁의 위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는 하였으나 막상 직접 안으로 들어와 본 정안궁은 정말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궁이었다.

황제가 그의 유일한 정인에게 지어 준 애정의 산물이라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허나 그 아름다운 궁 한가운데에서, 결국 송현의 시선이 닿은 곳은 연빈이었다. 전각 밖이든 안이든 할 것 없이 화려하게 꾸며진 곳에서 정작 궁의 주인은 더없이 수수하고 단정한 차림으로 있었는데 그 모습이 초라하거나 없어 보이질 않고 오히려 더 고아해 보여 주변의 화려함을 압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통 후궁들은 잘 입지 않은 짙은 푸른색의 의복을 입고 선 연빈은 미색이 뛰어난, 그저 청렴한 서생처럼 보이기도 해 또다시 궁밖에 있는 오라버니 생각이 난 송현은 서둘러 연빈의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민망한 것도 모르고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송현은 곁에 선 주아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해 눈치를 주고 나서야 시선을 떼었다.

여전히 호기심 많은 작은 강아지 같은 송현의 모습에 부드럽게 웃어 보인 연빈이 말했다.

“방해라니요.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곳에 정빈이 걸음 하여 주시니 반가울 따름입니다.”

“제가 찾아오는 걸 불편하게 여기시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그… 사실은 그러니까… 이전에는 저희 사이가 좀….”

“제가 정빈에게 더없이 무례하였지요.”

난장판이 따로 없던 이전 자신들의 관계를 어찌 표현해야 좋을지 송현이 망설이는 사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편안하게 화운이 말을 받았다. 그러자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송현은 이내 마주 웃음을 한 번 터트리며 조금 더 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에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드리지 못하였던 차를 가지고 왔으니 주방으로 보내 함께 마시면 좋겠어요.”

연빈에게 모욕을 당하고 궁으로 돌아온 날은 화가 나고 분통이 터져 잠을 이루지 못한 날도 여럿이었다. 그때에는 이리 연빈과 마주 보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오게 되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는데. 그 고약한 연빈 따위를 보며 오라버니를 떠올릴 날이 올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도 못하였는데.

정말로 사람의 속은 한 길을 모르고, 사람의 앞은 한 치를 모르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동그란 탁자에 화운과 송현이 마주 앉았다. 새로운 날이라고 불러도 좋을, 볕이 좋은 날이었다.


처음이라 어색할 거라 여겼던 송현과 화운의 대화는 생각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보통은 송현이 재잘재잘 떠들면 화운은 웃으며 이야기를 들어 주는 식이었고, 송현이 이따금 화운에 관해 질문을 하면 화운은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는데 이전까지는 전혀 교류가 없던 두 사람이다 보니 서로 좋아하는 것만 이야기해도 말이 끊이지 않았다.

어색하지 않게 분위기를 잘 이끌어가며 밝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송현의 모습은 영락없이 집에서 한껏 사랑 받고 귀하게 자란 막내의 모습이라 화운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런 송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저는 위로 오라버니가 계시는데, 연빈은 혹시 동생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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