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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54)화 (5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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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을 연달아 묻는 것이 무언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다. 사실 이미 송현이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그가 말을 걸 때부터 눈치챈 아진이 송현의 곁에 있는 주아에게 ‘너희 주인은 갑자기 왜 이러신다니?’쯤 되는 시선을 보냈지만 어딘지 모르게 체념한 듯한 주아의 표정은 아무리 잘 봐주어도 ‘낸들 아니.’ 정도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그사이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몸을 배배 꼬던 송현이 말했다.

“허면…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제가… 정안궁으로 간식을 가지고 놀러 가도 되겠습니까?”

화운은 몰랐겠으나 이 한마디를 자연스럽게 화운에게 하고 싶어 어제 하루 중일 주아를 앞에 두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송현이다. 이전에 이미 송현이 운을 띄운 적은 있었지만 정말로 이리 말해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화운은 아주 잠시 놀란 얼굴을 하였으나 이내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음식을 대접하는 건 주인의 몫이니 정빈께서는 편하게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정말이죠? 정말 가도 되는 거죠?”

“물론이죠.”

“네! 그럼 이따가 뵈어요, 연빈!”

혹시라도 연빈이 거절을 하면 어쩌나 오늘 황후마마께 문후를 드리는 내내 초조해했던 송현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잔뜩 들뜬 목소리로 대답을 하곤 누가 보아도 신이 난 걸음으로 순식간에 저만치 멀어진다.

이런 비유를 해서는 안 되는 걸 알지만 그 뒷모습이 꼭 자그마한 강아지가 봄볕 아래 뛰어가는 것 같았다. 화운이 저도 모르게 그에게 시선을 두곤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불쑥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의 수완이 아주 대단하군.”

송현과는 달리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숙비, 비영이었다. 그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없어 화운이 잠시 숙비를 바라보고만 있으려니 그가 말을 이었다.

“자네라면 나 못지않게 치를 떨던 정빈을 하루아침에 저리 바꾸어 놓았으니 하는 말일세. 폐하와 황후마마에 이어 정빈까지… 자네의 기세에 내가 두려울 지경이야.”

숙비의 말은 일견 아주 차갑고 냉정하게 들리는 면이 있었으나 정작 그리 말을 하는 시선이며 목소리에는 달리 악의적인 빛이 없고 오히려 매우 조심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화운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대답했다.

“지난날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나 관대하게 보아 주신 덕분입니다.”

역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단정하고 흠잡을 곳 없는 대답이었다.

사실 숙비라고 하여 이리 순순히 예의 바르게 저를 대하는 연빈에게 굳이 날을 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누가 보아도 이 궁에서 연빈의 앙숙이라고 할 사람은 숙비였기 때문에 쉬이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만약 연빈이 저런 선량한 표정 뒤에 칼을 갈고 있다면 그 칼에 가장 먼저 다칠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부디 그 마음이 변치 않길 바라네.”

“예, 숙비마마.”

연빈은 그리 말하며 저를 지나치는 숙비의 뒤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 자신이 아팠을 때 향을 보내준 것으로 보면 숙비 역시 자신과 이유도 없이 다투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 연화운이라는 존재를 온전히 믿을 수 없는 관계로 경계를 다 풀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겠지.

그 마음은 연빈 역시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달리 마음이 상할 일도 없어 화운은 그저 숙비가 저만치 멀어지길 기다렸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도 드디어 그분을 봤어!”

“누구?”

“누구긴 누구야, 연빈마마지!”

병상에 오래 누워 있어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는 태후를 마주하고 나와 무거워진 마음에 조용히 태후궁 길을 따라 걷던 황제가 갑자기 귓가에 들리는 익숙한 이름에 문득 멈추어 섰다.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돌화단 너머에서 궁녀들이 떠드는 소리였다.

나서서 기척을 내려는 오 태감을 쉿, 하고 말린 황제는 그 자리에 서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 태감은 잠시 그런 황제를 불경하게 바라볼 뻔하였으나 그는 아주 능숙한 사람이었으므로 금세 그 표정을 갈무리하고 조용히 시립해 있을 뿐이다.

화단 너머에서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드디어 봤구나! 소감이 어때?”

“솔직히 나도 아주 예전에 연빈마마를 한 번 스치듯 본 적이 있었거든? 그때도 성격과는 다르게 고운 얼굴이라는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세상에….”

“내 말이 맞지? 정말 눈부신 미공자가 따로 없지?”

“난 정말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단정한 얼굴과 푸른 의복이 어찌나 잘 어울리시던지…!”

신이 나서 떠드는 두 궁녀의 이야기를 훔쳐 듣는 당당한 황제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오 태감을 바라본다. 미공자…? 하고 얼이 빠져 입모양으로 되묻는 황제의 얼굴을 오 태감은 못 본 척하며 고개를 숙인다.

“말해 뭐 해. 요즘 황후마마께 문후를 드리고 난 후 언제나 정안궁까지 걸어가시니까… 오죽하면 궁녀고, 어린 내관들이고 할 것 없이 그 시간이면 죄다 내무부에 간다, 어딜 간다, 핑계를 대며 그 길만 기웃거릴 지경이라니까.”

“왜 아니겠어. 이제야 왜들 그렇게 난리였는지 이해가 가. 누구라도 다가가 인사를 하면 다정하게 웃으며 받아 주시니….”

말을 하는 궁녀는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좋아 죽겠는지 목소리에서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니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황제의 미간이 아주 깊이 패여 펴질 줄을 모르는 지경에 다다르자 보다 못한 오 태감이 냉큼 앞으로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갑작스러운 호통에 놀란 궁녀들이 후다닥 앞으로 튀어나왔다가 황제의 얼굴을 보곤 넋이 나가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무슨 말을 더 하지 못하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덜덜 떨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지만 사실 이한은 지금 정신이 다른 쪽으로 쏠려 있어 그들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오 태감이 서둘러 다시 말했다.

“뚫린 입이라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다가는 경을 칠 것이다. 어서 물러가라!”

“감사합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일개 궁녀가 황제의 앞에서 후궁인 연빈에 대해 입을 놀렸으니 이대로 곤장을 맞고 끌려가도 할 말이 없을 터. 궁녀들은 오 태감의 호통에 서둘러 몸을 일으켜 떨리는 두 다리를 움직여 물러갔고 남은 황제가, 오 태감을 보며 기가 막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빈을 두고… 지금 미공자라 칭하며 저리들 좋아하는 거냐?”

“그것이 폐하….”

“연빈을 보려고 어딜 기웃거린다고…?”

아무리 그가 사내기로서니, 살다 살다 황궁의 궁인들이 후궁의 얼굴을 보려 야단법석을 떨었다는 이야기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거늘.

이한은 그저 기가 막힌 얼굴로 한참을 그 자리에서 떠나질 못했다.


“아진.”

“예?”

“오늘 생각이 많아 보이네.”

이제는 당연한 일과가 되어버린 듯 황후궁에서 정안궁으로 걸어 돌아가는 길, 평소와는 달리 유독 말이 없는 아진에게 화운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갑작스러운 주인의 질문에 아진은 그렇다 대답하지도 못하고, 아니라 대답할 수도 없어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다. 화운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나 때문에 많이 놀란 것을 알아….”

어제는 화운 본인도 너무나 지쳐버려 바로 이야기하지 못했으나 자신이 보여 준 모습 때문에 황제 폐하는 물론이고 아진까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화운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짐들은 모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전적으로 그 혼자만이 지고 있는 문제였으니 밖에서 보기엔 정말로 아무런 이유 없이 홀로 계속 이상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당장 내가 어찌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들은 우선은 마음에 담아놓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갑작스럽게 마주한 연화운의 가족에 관한 생각에 순식간에 마음이 허물어져 괜한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어제는 아마도…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몸이 다 낫질 않아 그러했던 것 같구나. 지금은 훨씬 더 나아졌으니 그만 걱정을 내려놓아도 될 것 같아.”

새벽녘 홀로 눈을 뜬 화운은 밤이 다 가도록 다짐했다. 나약하게 굴지 말자고. 세상에서 홀로 아픔을 지고 있는 사람처럼 굴지 말자고. 정말로 울어야 할 사람은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죽어버린 연화운이지 그의 자리에서 감히 꿈꾸지도 못했던 것들을 누리고 있는 내가 아니라고. 그렇게.

하여 해가 뜨고 난 뒤에는 마음이 많이 진정된 화운은 지금 이리 아진을 다독이고 있었던 것인데, 아진은 그 말을 듣고도 표정이 밝아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한숨처럼 깊은 숨을 한 번 푹 내쉬곤 잠시 걸음을 멈춘 채 화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마. 저는 그저 마마를 모시는 일개 몸종에 지나지 않으니 마마께 대단한 도움을 드리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갑작스러운 아진의 말에 화운이 놀라 무어라 그 말을 반박하려 입을 열었으나 단호한 표정의 아진은 주인이 먼저 저의 말을 다 들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듯 서둘러 말을 이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제가 어찌 마마의 생각을 다 알 수 있겠으며 마마께서 가지고 계신 어려움을 짐작할 수가 있을까요. 다만 마마,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난밤은 아진에게도 긴 밤이었다. 마마께서 단순히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고된 무언가를 견디고 계심은 분명해 보이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연유를 알 수가 없어 한숨도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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