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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53)화 (5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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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부에서 장차 황후가 될 수도 있는 정실인 적복진을 들일 적에… 어마마마는 당신이 추려놓은 여인들을 한 명 한 명 내게 보여 주셨다.”

늦은 밤, 홀로 침전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이한이 불현듯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좀처럼 헤아릴 수 없는 황제의 기색에 숨소리마저 죽인 채 조용히 곁을 지키고 있던 오 태감은 굳이 그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허리만 깊이 숙일 따름이다. 지금 황제께서 원하시는 건 다만 없는 것처럼 듣고 잊어 줄 사람임을 오 태감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명씩 내 앞에 소개를 해 주시며 어마마마는 그들을 보는 내 표정을 빠짐없이 살피셨지. 내가 그 얼굴을 얼마나 들여다보는지, 혹시 내가 그 얼굴을 보고 웃지는 않는지, 눈동자를 떠는지, 기대가 어린 표정을 짓지는 않는지.”

“…….”

“그때는 그 연유가 무엇인지 몰랐어. 다만 무서울 정도로 예리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살피는 어머니의 시선이 낯설고 두렵다는 생각만 했었다.”

어미가 살핀 것은 비단 아들의 표정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장차 저의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 동시에 이 나라에 단 하나뿐인 황후가 될 수도 있는 어린 여인들의 표정 또한 칼날처럼 예리하게 살폈다. 감히 얼굴을 붉히지는 않는지. 그 순간 아들의 마음을 어찌 얻어내 보기라도 하려고 여우 같은 표정을 짓지는 않는지.

혹시라도 자신에게서 아들을 꿰어내 빼앗아갈 그런 요망한 계집은 아닌지, 그런 것들을 가늠하려고 말이다.

“불안하셨을 게야. 아바마마의 총애는 그때 이미 비에게로 쏟아진 지 오래라 어마마마의 권력을 지켜 줄 수 있는 방패막이인 아들이 행여나 다른 여인에게 홀려 어미를 소홀히 하진 않을지 걱정이 되셨겠지. 하여 누구보다 조용하고, 우직하며,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지금의 황후가 당시의 복진으로 왕부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셨군요….”

“내가 그런 어마마마를 야속하다 생각하였을 것 같으냐.”

술이 가득 찬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황제가 물었다. 이번에도 역시 시선을 들지 않는 황제는 대답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 태감은 듣고만 있었다.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지. 나는 어마마마를 이해했다. 잘하신 일이라고도 생각하였지. 머지않아 아바마마의 총애를 등에 업은 비가 귀비가 되어 내명부를 통솔하며 감히 황후를 권력으로 압박하였으니 어마마마는 자신을 지키셔야만 하였어.”

“…….”

“오히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아바마마였다.”

그 순간 오 태감이 눈을 빛내며 주위를 살폈다. 황제께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주위를 모두 물린 상태였으나 혹시나 모르는 일이니 더 예리하게 경계를 해야 했다. 무릇 천자의 속내란 그 누구도 함부로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황제란 본디 그 어떤 감정에도 휘둘리지 않고 모두를 살펴야 하는 자리가 아니냐. 총애하는 후궁을 둘 수는 있지만 어찌 그 후궁이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황후를 압박하고, 태자를 해칠 생각을 하도록 놓아둘 수가 있었던 건지.”

“폐하…….”

“아바마마께서 그들에게 그토록 과분한 총애를 쏟지 않으셨다면 어찌 감히 귀비가 제 아들을 앞세워 나를 몰아낼 생각을 할 수가 있었겠느냔 말이다.”

“무도한 자들의 이야기를 소인이 감히 들을 수 없사옵시다….”

더 이상 황제께서 하시는 말씀을 감히 들을 수 없던 오 태감이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한은 그런 오 태감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황제의 정인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

새카맣게 깊어진 눈동자에 정안궁을 비추던 달빛이 어렸다. 황제가 그토록 절절하게 가졌던 연심의 증거라는 정안궁을 이한은 사실 아주 오랫동안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황제에게는 황후가 있고, 또한 후궁들이 있을 수 있다. 그들 중 누군가를 조금 더 어여쁘게 대할 수도 있어.”

정안궁의 주인이 더없이 병약하여 일찍이 생을 달리 하였으니 망정이지 그가 건강하였고, 또한 권력에 욕심이 있는 이였다면 지금껏 그 남후궁을 향한 황제의 총애가 이토록 아름다운 설화처럼 전해질 수 있었을까. 피바람 하나 몰아치지 않은 그런 애틋한 이야기로 과연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허나 연심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이한은 다시 한 번 스스로 저의 술잔에 술을 채우며 고개를 젓는다. 어찌하여 그 순간 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연화운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할 것이다. 되지 못해야만 했다.

오래된 상처가 드러난 황제의 밤이 깊어졌다. 해가 뜨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그런 밤이었다.


“언니. 여기서 뭐 해요?”

정원을 한 번 둘러보고 막 자러 들어가던 서서가 정원 한쪽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는 아진을 보고 황급히 다가가 물었다. 오늘 안정전에 갔다가 안색이 창백해져서 돌아오신 마마는 일찍 잠자리에 든 것으로 아는데 아진이 침전을 지키지 않고 이곳에 나와 있는 게 의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선을 들어 서서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한 아진은 별다른 대답도 없이 그저 한숨을 푸욱 쉬며 다시 몸을 웅크려 땅만 바라보고 있다. 덩달아 심각한 얼굴을 한 서서가 냉큼 아진의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요? 마마께서 또 아프셔서 그런 거예요?”

“뭐, 그것도 그렇고….”

“폐하께서 오늘 또… 마마께 뭐라 하셨어요…?”

서서가 목소리를 죽이며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그래도 마마께서 안정전에 다녀오시더니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여 저들끼리 또 폐하께서 마마를 아프게 하신 건 아닌지 적잖이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다. 하지만 아진은 서서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마마는 왜 저리 기운이 없으시고, 언니는 왜 이렇게 다 죽어가는 표정인 건데요?”

서서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어 보이는데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는 아진 때문에 속이 답답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서는 자신이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아진을 제외하면 정안궁 궁인들의 나이는 전부 저와 비슷했다.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자라서 아진과 함께 마마의 양팔이 되고 싶다는 의지가 굳건한 서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로 아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결국 안 그래도 속이 답답해 어딘가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던 아진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마마께서 요즘 좀 이상해서….”

“마마께서 어디가요…?”

“근데 그게… 나도 잘 모르겠어. 뭔가 이상한데 그게 뭔지를 잘 모르겠어서… 뭐랄까… 마마께서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계시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진의 고민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지난번 악몽을 꾸고 일어나 앓았을 때도 그렇고, 오늘 황제의 앞에서 갑자기 무너지신 것도 그렇고 무언가 아진이 다 알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을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전이었으면 아진도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주인의 고민은 오로지 모두 황제 폐하에 관한 일이었으므로 그것은 달리 깊이 생각할 거리도 되지 못하였고, 아진 역시 주인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헤아리고픈 생각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큰일을 당하지 않고 내 한 몸 무사히 보내기도 벅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 아진은 그 무엇보다 제 주인의 안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주인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정작 이런 때가 되자 이상하게도 무언가 그가 둘러놓은 어떠한 벽에 막혀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뭐든 나와 함께 나누어 주시면 좋을 텐데….”

도대체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시는 건지. 무엇 때문에 자꾸만 무너지시는 건지. 폐하와의 관계는 오히려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는데 어째서 제 주인은 때때로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것처럼 외로운 얼굴을 하시는지.

아진의 표정이 또다시 가라앉으며 어둡게 변하자 서서가 함께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마마께 힘이 되어드리는 길이란 아직도 요원한 것 같아 우울한 밤이었다.


“그러고 보니 곧 숙비의 생일이로군.”

비빈들이 문후를 드리는 자리에서, 황후가 불현듯 생각난 듯 숙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살짝 눈꼬리를 접어 웃은 숙비가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마마께서 잊지 않고 챙겨 주시니 따로 날을 챙기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자네의 생일을 그냥 지나갈 수가 있나. 폐하께서도 신경 써 준비하라 하셨으니 걱정 마시게.”

“마음 깊이 챙겨 주심에 감사드리옵니다, 마마.”

“그럼, 오늘은 더 전할 말이 없으니 이만 물러들 가도록.”

숙비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황후가 문후를 끝내자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에게 인사를 올린 이들이 차례로 황후궁을 나섰다.

“연빈!”

그리고 오늘도 돌아가는 연빈을 불러 세운 건 다름 아닌 정빈, 송현이었다. 시선을 돌려 저에게 다가오는 송현을 바라본 화운이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자 그 얼굴에 저도 모르게 마찬가지로 얼굴 가득 생글생글 미소를 지은 송현이 서둘러 다가와 말을 이었다.

“곧장 정안궁으로 돌아가시나요?”

“그렇습니다.”

“돌아가신 뒤에는 이따가 식사를 하시겠지요?”

“그러하겠지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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