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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뱉어놓고 아차, 한 것은 이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이한은 정말로 손을 들어 자신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도대체 왜 갑자기 연화운 앞에만 서면 모든 것이 저의 뜻대로 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저도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뿐이다. 황제가 어찌 말하고 행동하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처럼 보이는 것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거의 연화운이 외치던 사랑이 이한에게는 사랑으로 와 닿지 못했다면, 지금 연화운이 보이는 모든 감정들은 아예 사랑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하여도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굳이 간식까지 챙겨 감사를 올리러 온 이에게 그렇게 말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변한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사람이 된 것이라고 한다면. 허면 폐하께오선 저를 어찌… 어찌 대하시겠습니까….’
불현듯 지난 어느 밤에 화운이 저를 향해 물었던 말이 떠올라 이한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밀려왔다. 변한 것조차 아니고, 다만 다른 사람이 된 연화운에게는 저를 향해 그 어떤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것이 맞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본디 황제의 자리는 연정에 휘둘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연화운의 그 태도가 마음 언저리를 쿡쿡 아프게 찔러 와서.
더 무슨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이한의 앞에서, 화운이 입을 열었다.
“…그 또한 마음 깊이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대답하는 화운의 목소리가 떨려 이한은 저 역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이한의 목구멍으로 불덩이를 쑤셔 넣은 것처럼 속이 타 비명을 지르고 싶기까지 한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무슨 말을 해도 아무 감상이 없을 것만 같던 이가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져 목소리를 떠니 이한은 그야말로 정신이 다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허나 사실 화운이 목소리를 떤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화운은 황제가 저에게 한 말을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니 상처받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화운이 동요한 것은 그가 연화운의 아버지를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어찌할 수 없으니 애써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문을 닫아두었던 문제들이 마치 수문이 열린 것처럼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연화운의 가족이. 연화운이 아무리 못난 아들이었어도 세상에서 그를 가장 사랑하였을 그 가족들이.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조차 알지 못하고 있을 그들이 떠오른 순간 화운은 갑자기 차디찬 물이 주변을 온통 채우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도망칠 새도 없이 밀려들어 차오른 물이 화운의 입을 막고 코를 막았다. 뼈까지 전부 얼려버릴 것 같은 차가움이 폐를 가득 채워와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자신이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지만 어떻게 숨을 틔워야 할지 알 수 없어 무너져 내리는 몸을 누군가가 단단하게 받아 안았다.
“…연화운! 나를 보아라!”
우레와도 같은 목소리가 서서히 화운을 둘러싸고 있던 얼음 같은 장벽을 깨부수고 들어왔다. 불길처럼 뜨거운 손길이 화운의 뺨을 감쌌고 등을 끌어안아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태양처럼 태어나 화염처럼 타오르는 생의 온기가 식어가던 화운의 체온을 이끌었고 서서히 흐려지던 화운의 눈동자가 다시 그 빛을 되찾았을 때 그의 눈에 처음 맺힌 상은, 언제 다가왔는지 화운을 품에 안은 채 절박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황제, 이한이었다.
“나를 보고 숨을 쉬어! 괜찮다. 괜찮을 것이야. 내가 여기에 있다.”
고통에 일그러져 덜덜 떨리고만 있던 화운의 손이 황제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것은 힘 하나 들어가지 않는 아주 연약한 움직임이었으나 이한은 그 손끝이 가지고 있는 절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삶을 갈구하는 것처럼. 물에 빠진 이가 살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처럼. 연화운이 그토록 간절하게 자신을 붙들고 있다.
“폐하….”
겨우 막혔던 숨을 한 번 터트린 화운이 스러져가는 촛불처럼 작은 목소리로 황제를 불렀다. 그것은 마치 빛을 찾는 본능과도 가까운 부름이었다. 오래 전 그날 하운에게 삶의 의미가 되어 주었던 그 얼굴을.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하였을 때 저의 악몽을 물리쳐 주었던 그 음성을 화운은 본능적으로 찾고 있었다.
화운의 손을 저의 커다란 손으로 덮어 쥐며 이한이 대답했다.
“내가… 내가 여기 네 곁에 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화운의 눈동자에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분의 곁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나는 얼마나 바라왔던가.
두 개의 생이 각기 다른 형태로 세상에서 지워지고 나서야 이리도 가까워진 거리가 서러워서. 애달파서. 이것을 정말로 제가 누려도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화운의 눈물에 더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하던 이한이 이내 그를 품으로 당겨 안아 등을 쓸어 주었고, 결국 화운은 아무리 입술을 깨물어도 참아낼 수가 없는 울음을 황제의 품에서 터트리고야 말았다.
“네 주인이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이냐!”
화운을 품에 안은 이한이 한 발 뒤에서 마찬가지로 놀라 사색이 되어 있는 아진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난 아진이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린다.
“저, 전부 소인의 잘못입니다! 소인이 마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였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때까지 어떻게든 소리를 죽이려 애를 쓰며 눈물을 쏟고 있던 화운이 아진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놀라 황급히 이한의 가슴을 두 팔로 밀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땐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무려 황제 폐하의 앞에서 너무나도 물색없이 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아 순식간에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어찌 이리 나약해졌는가. 분에 넘치는 것을 받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이리 자기연민에 빠져 이제는 하다못해 폐하의 앞에서까지 이토록 경우 없이 굴고 있는가. 염치없는 자신의 행태에 절로 부끄러움이 일었다.
화운은 서둘러 소매로 눈물에 젖은 제 얼굴을 아무렇게나 닦으며 무릎으로 걸어 황제의 품에서 물러나 저도 모르게 히끅거리려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연다.
“아진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갑자기… 그러니까 제가 갑자기….”
허나 한번 당황한 머릿속은 좀처럼 차분하게 생각이 굴러가지 않아 화운은 자신이 갑자기 이리 발작을 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채 말을 더듬는다. 아무리 바삐 생각을 해보아도 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토록 감정이 터져버린 이유를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한은 사실 화운이 설명하는 내용을 제대로 듣고 있지 못하였다. 이한은 그저 화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눈물을 흘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며 촉촉하게 젖은 두 볼 같은 것을. 울먹임에 자꾸만 숨이 차올라 어깨를 가늘게 들썩이다가 애써 그것을 참으려 입술을 깨무는 등의 행동을. 이한은 홀린 듯 체통도 잊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바라보고만 있다.
연화운의 우는 얼굴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처음이 아니다 뿐인가. 아마 이한이 가장 많이 보았을 연화운의 표정을 꼽자면 악을 지르는 모습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두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연화운이 우는 모습 따위는 더 이상 이한에게 조금도 특별할 게 없는 모습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오늘의 얼굴은. 오늘 이리 눈물에 젖어 저를 향해 울먹이는 화운의 얼굴은 이전과는 아주 다른 감정으로 이한의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있으니.
“폐하….”
어느새 다가온 오 태감이 황제를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이한이 얼마나 갑자기 튀어나갔는지 지엄하신 황제께서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는데도 그를 말릴 겨를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한은 제 팔을 붙든 오 태감의 손을 가만히 밀어내곤 그대로 눈앞에서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화운을 부드럽게 감싸곤 조심스럽게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되었다. 아진을 탓하지 않을 테니 진정해라.”
더듬거리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 애쓰던 화운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이한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황제의 눈동자에는 어떻게 하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염려의 감정이 담겨 있다. 홀린 듯 그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을 한 번 깜빡이려니 화운의 눈꼬리에 걸려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한의 손끝이 일순 움찔거렸다. 그날 밤, 잠든 화운의 뺨을 몰래 매만졌을 때 느꼈던 감각이 불현듯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하여 주먹을 꽉 쥐어 그 안에 든 어떠한 마음이 흘러나가지 못하게 틀어쥔 이한이 말했다.
“태의를 불러 주랴.”
“아닙니다, 폐하.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또다시 폐하의 앞에서 추태를 부렸습니다.”
그리 말하며 화운은 몸을 완전히 일으키곤 다시 한 번 황제의 품을 밀어내 한 걸음 물러나 홀로 섰다. 이한은 마른 몸이 저에게서 벗어나는 그 감각에 더없는 허전함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그를 계속 안고 있기를 바라진 않았기에 순순히 두 팔에서 힘을 풀어 화운을 놓아주었다.
아니. 사실은 화운을 계속 안아 주고 싶어 놓아주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도록 하고 싶은 감정은 황제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감각이었다.
“…몸이 아직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 쉬도록 해라.”
“예, 폐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아 무엇도 물을 수 없던 이한과,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무슨 말도 할 수 없는 화운 사이에는 더 오갈 말이 없었으므로 화운은 그저 인사를 올리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고 황제는 그 뒷모습이 애달파도 잡을 길이 없다.
문득 제게서 멀어지는 화운이 안개처럼 흐릿해 사그라질 것 같아서, 이한은 그의 모습이 아주 보이지 않게 멀어질 때까지 그곳에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