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51)화 (51/167)

51

폐하께서 연빈을 용서하시어 패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정안궁에도 들어왔다. 그 소식에 정안궁은 온통 들떠서 당장 폐하께서 정안궁으로 밤을 보내러 오실 것처럼 난리통이 되었으나 정작 화운은 그 일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그저 노력하는 이를 오래 박대하지는 못하는 폐하의 다정한 성품 탓이겠거니 하였을 뿐.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지난번 정안궁으로 친히 병문안을 와 주시기도 하였고 이번 일도 있으니 감사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여 폐하께서 계시는 안정전으로 가야겠다, 말을 한 것인데 그 말을 들은 아진이 펄쩍 뛰며 이대로는 절대 못 가신다며 여태 화운을 붙들고 새롭게 치장을 하여 준 것이다.

“마마. 이제 가실까요?”

저가 더 설레는 목소리로 말을 하는 아진의 목소리에 짧은 상념에 빠졌던 화운이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연화운이 된 이후로, 제 발로 폐하를 뵈러 찾아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갑자기 감사를 드리겠다며 찾아온 자신을 폐하께서는 어찌 보실지. 어째서 유난을 떨어대느냐 그리 타박을 하시지는 않을지. 가마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 화운은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하여 정안궁의 아이들이 온통 제 얼굴을 보고 넋을 놓아버린 일 같은 건 알지도 못하였다.


“폐하, 잠시 쉬었다 하시지요. 다과를 들이라 일렀습니다.”

황후궁에서 오찬을 하고 와 오수도 거른 채로 정무를 보고 있던 황제, 이한이 오 태감이 뱉은 다과라는 말에 순간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다과? 정안궁에서 보냈느냐?”

“…….”

“…….”

“…….”

“아니, 내 말은… 어느… 어느 궁에서 보낸 것이냐 물은 것이다. 흠흠.”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온 정안궁 소리에 천하의 오 태감마저도 당황하여 할 말을 잃었으니 뒤늦게 이한이 다급하게 말을 덧붙여 보아도 황망한 적막은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한참 만에 오 태감이 말을 이었다.

“정안궁은 아니옵고 어선방에서 만든 것이옵니다, 폐하.”

이한은 대답이 없이 정무를 보던 책상 앞에서 몸을 일으켜 내실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괘씸하기는….”

“송구하옵시다, 폐하.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소인이 듣지 못하였나이다.”

“괘씸하다고 하였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말에 오 태감이 깜짝 놀라 감히 괘씸하게 군 자신의 죄를 청하려 막 무릎을 꿇으려는데 서둘러 손을 휘휘 저으며 오 태감의 행동을 막은 이한이 말했다.

“너 말고. 연빈 말이다.”

“연빈마마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난번 간식 한 번 겨우 보내고 입을 싹 닦질 않느냐. 지금쯤이면 내가 저의 패를 돌려준 것도 이미 알았을 터인데.”

말이 길어질수록 이한의 목소리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서운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의 목소리처럼 수그러들고 있었다. 더 이상 연빈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신경 쓰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던 다짐은 그새 또 잊은 모양이다. 오 태감이 말했다.

“지난번 그냥 지나치신 일을 두고 폐하께서 여전히 마마를 보고 싶지 않아 하신다고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닐까요, 폐하.”

사실 오 태감은 연빈이 조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최근의 황제 폐하는 어딘지 모르게 놀리고 싶은 어린 소년과도 같은 감상을 불러일으키는지라 오 태감은 답지 않게 황제를 향해 불경을 저지르는 저의 입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설마…….”

오 태감의 그 말 한마디에 황제가 한껏 당황한 얼굴을 하였을 때, 밖에서 내관 하나가 종종 달려와 아뢰었다.

“연빈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언제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투덜거렸냐는 듯 금세 미소가 번지는 황제의 얼굴은 오 태감 홀로 보기엔 정말로 아까웠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이한은 제게 인사를 올리며 꿇어앉은 연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은은한 푸른빛을 머금은 흰 옷자락은 그의 투명한 피부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게다가 다행히 몸이 많이 나아진 모양인지 지난날보다 한결 혈색이 도니 그 얼굴이 또 파리하게 창백할 때와는 다르게 눈에 띄어 이한의 시선이 연빈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폐하….”

“아…! 흠흠. 일어나라.”

그러다 보니 또 저도 모르게 연빈을 꿇려두고 시간을 보내게 되어버린 격이라, 오 태감의 목소리를 듣고 겨우 정신을 차린 이한이 서둘러 입을 열자 단아하게 시선을 내리깐 채로 연빈이 몸을 일으켰다. 이한은 혹시나 연빈이 일부러 저를 꿇려둔 것으로 오해를 하진 않았을까 신경이 쓰여 그의 표정을 살폈으나 가만히 일어서는 연빈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 담담한 얼굴에 미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이한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왔지?”

부러 딱딱한 말투로 말을 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이제는 그런 말투를 꾸미는 것조차 오히려 그를 신경 쓰는 일이라는 걸 납득했으니 이한은 오히려 연빈에게 이제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평범한 말투를 그를 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순간 저도 모르게 서늘한 목소리가 나온 것은 다만 이한이 몹시도 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하의 성이한이. 대 안국의 당당한 황제가 일개 빈 앞에서 긴장을 하다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한은 지금 자신의 감정을 긴장했다는 것 말고는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무어라 변명할 여지도 없이 이한은 지금 갑작스럽게 마주한, 그것도 연화운이 직접 자신을 찾아와 마주한 이 상황에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허나 손만 대도 터질 것 같은 그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 오로지 성이한 하나뿐인지. 여전히 동요가 없는 얼굴을 한 연화운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제게 보여 주신 하해와 같은 성은에 조금이라도 감사를 표하고자 이리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습니다.”

화운이 그리 말을 하며 뒤쪽에 서 있던 아진에게 눈짓을 하자 아진이 걸어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찬합을 오 태감에게 넘겨주었다. 이한의 시선이 오 태감의 손에 들린 찬합을 향해 또르르 움직였다. 태감이 찬합의 뚜껑을 열자 고소한 냄새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갖가지 간식들이 담겨 있다. 화운이 말을 이었다.

“별것 아니지만 곧 간식을 드시면 좋을 시간이기에 준비하였는데,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연빈마마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군요. 전부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것들뿐이니 말입니다.”

옆에서 오 태감이 슬쩍 말을 거들자 화운이 쑥스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인다. 화운은 당연히 기억할 수 없었으나 황제가 무엇을 즐겨 드시는지는 이미 후궁의 측근 궁녀였던 아진이 이미 전부 다 꿰고 있었기 때문에 준비할 수 있던 간식거리였다.

황궁의 음식은 도통 아는 것이 없는 화운이었으니 직접 손을 대 신경 쓴 것은 아니었으나 부디 폐하께서 단 하나라도 입에 맞아 드셔주시길 간절히 바라던 마음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화운이 다시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심려만 끼쳐드린 저를 찾아와 위로하여 주시고, 제가 지난날 저지른 과오를 용서하여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폐하. 폐하께서 보여 주신 관대함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고 앞으로 더더욱 경계하고 조심하여 다시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오 태감의 말대로 하나하나 제가 즐겨 먹는 것들로만 담겨 있는 찬합 속 내용물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있던 이한의 시선이 곧장 앞에 꿇고 앉은 화운에게로 향했다. 한 마디 한 마디 저를 향한 모든 말들이 그야말로 흠잡을 곳 없이 단정하고 담백하다. 과연 예의와 법도라는 걸 알고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럽던 이전의 모습과 비교하면 정말로 괄목상대할 만큼 달라진 모습이었다.

헌데 이상하게 이한은 그 모습이 마냥 기껍지가 않았다. 간식을 보고 씰룩거렸던 입매가 다시 일자로 굳어진다. 왜일까. 이한은 생각했다. 하나 틀린 것이 없는 화운의 태도에 왜 갑자기 들뜨던 마음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이한의 시선이 얌전히 내려앉은 화운의 속눈썹 위에 닿았다. 손을 대 만져 본 것도 아닌데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흔들림 하나 없는 화운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한은 이내 자신이 방금 느꼈던 기묘한 불쾌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한은 연화운이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 앞에서 무엇이든 꾸미고, 거짓을 일삼으며, 매번 눈물과 악으로 자신을 대하던 연화운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연화운은. 말하는 것은 물론이요, 행동거지나 옷차림까지 빠짐없이 변한, 그래서 이따금은 그 얼굴마저도 낯선 이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연화운은 지나치게 자신에게 담담했다. 제게 차리는 예의는 후궁의 것이 아니라 꼭 대신들이나 무관들이 보이는 행동처럼 보일 지경이다.

마치 개인적인 감정은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더 이상 이한에게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는 사람처럼.

그것이 이상하게도 이한의 마음을 갉아먹어서, 이윽고 이한이 말했다.

“너를 위하여 그리한 것이 아니다. 네 아비 얼굴을 봐서 한 것뿐이지.”

이한의 말을 들은 오 태감이 일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행동이라면 누구보다 앞서 예상하는 오 태감도 지금, 이 자리에서 황제가 할 수 있는 수많은 말 중에 이런 말을 꺼낼 줄은 정말로 몰랐기 때문이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