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50)화 (50/167)

50

“오늘 조회 때 보니 연주원의 얼굴이 아주 상했더군.”

위 총관이 물러간 대전의 적막 속에서 이한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안에는 이한과 오 태감 둘만이 남아 있었으니 저 말은 분명 오 태감에게 한 말이렷다. 태감이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한이 말을 잇는다.

“내색은 안 해도 어쨌든 제 아들이니 신경을 아니 쓸 수가 없겠지. 그래서 패를 돌리라 한 것이야.”

“그러하셨군요.”

“내가 연빈의 패를 뒤집을 일은 없겠지만 그 아비 얼굴 보기가 영 민망하니 말이지.”

“연 대인을 향한 폐하의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이한의 시선이 그제야 오 태감에게 향한다. 이상하게 요즘은 오 태감이 제 말에 맞장구를 치면 칠수록 이한은 기분이 나빠졌다. 허나 그것은 다만 이한의 기분 탓이었지 딱히 무어라 말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지라, 애써 불만스러운 표정을 꾹꾹 내리누른 이한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예, 폐하.”

“…정안궁에서는 별 소식이 없나?”

슬그머니 묻는 목소리가 옥음답지 않게 소심하고 은근하다. 갈수록 황제의 앞에서 표정 관리 하는 일이 쉽지 않은 오 태감이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어 방자하게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별다른 기별은 없었습니다. 궁금하신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니다. 궁금할 게 뭐가 있다고.”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이한은 오늘 제가 지나쳤던 화운의 모습을 다시 가만히 떠올린다. 혹시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화운의 바로 곁을 지나갈 땐 곁눈질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그때에 화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는 게 아쉬웠다. 지나치고 나서도 오 태감에게 그를 살피라고만 하였지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이한이 오 태감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야멸차게 그를 무시하여 겁을 먹었나?”

그러니 홀로 연빈의 반응을 살폈던 오 태감은 황제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네가 보기에 연빈의 표정이 아주 상처를 많이 받은 표정이었지? 그러니 간식도 보내질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오 태감은 정말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연빈의 패를 다시 올리도록 명하셨다는 소문은 다음 날 해가 뜨기 무섭게 온 황궁으로 퍼졌다. 아무래도 연 대인의 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란 의견이 대부분이긴 하였으나, 최근 달라진 연빈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황궁 내에서 들어 보지 못한 이가 없었으므로 폐하께서 정말 연빈을 용서하신 게 아니냐는 의견도 제법 신빙성을 얻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가 연빈과 함께 수화원을 둘러본 일이며, 연빈이 아팠을 때 정안궁을 찾은 일 역시 이미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가 퍼진지라 폐하께서도 달라진 연빈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돌리신 것이 아니냔 의견에 무게를 실어 주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소식들에 그 누구보다 발 빠르게 반응하고 있는 건 단연코 내무부였다. 내무부는 일의 특성상 내명부의 분위기며 자잘한 흐름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해야만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후궁들의 지위란 단순히 품계로만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집안으로만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황제의 총애가 가장 중요하지만 또한 그것만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무부를 관장하는 총관의 자리는 무릇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볼 것이 아니라 물밑에서 어떠한 흐름이 생겨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파악해야만 하는 자리였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내무부의 총관인 정 총관은 아침부터 부리나케 수방으로 직접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 공공. 이 시간에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수방의 이 상궁이 반가운 척을 하며 정 총관을 맞이했으나 그는 사소한 안부를 묻고 있을 틈이 없다는 듯 대충 인사를 받고는 물었다.

“연빈마마의 의복은 어찌 되었는가?”

“아직 수를 놓는 중이지요.”

“아직도 완성이 안 됐는가?”

갑자기 생전 직접 챙기지 않던 연빈마마의 의복 상황을 묻는 정 총관의 물음에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이 상궁은 이제는 아주 정색을 하고 되묻는 총관의 태도에 당황하여 눈만 깜빡인다.

연빈마마께서 이전에는 거의 입지 아니하시던 남후궁의 의복을 찾으시는데 오랫동안 남후궁 의복이 정안궁으로 들어간 적이 없으니 새로이 몇 벌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수방의 입장에서는 이미 만들고 있던 정안궁의 의복을 전부 버리고 새로 만들어야 하는지라 시간이 더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수방의 사정을 배려하여 정안궁에서는 급히 할 것 없다는 말을 전하긴 하였으나, 괜히 그 말만 믿고 늑장을 부리다간 감히 수방 것들이 나를 무시하니 무어니 한바탕 난리를 겪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수방에서도 나름 최대한 속도를 내는 중이었다.

“워낙에 갑작스러웠던 걸 공공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그리 조바심을 내십니까?”

내무부에서 수방의 작업 속도를 두고 이리저리 간섭을 하는 일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나 정안궁으로 가는 물건에 정 총관이 직접 나서서 재촉을 하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이 상궁이 다시 묻자 총관이 허리를 살짝 숙여 이 상궁의 귓가에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폐하께서 연빈마마의 패를 올리라 하셨다네.”

“연빈마마의 패를요…?”

“그래. 어디 그뿐인가. 최근 정안궁에 걸음을 하시는 일도 잦으시고… 아무래도 뭔가 마음의 변화가 있으신 모양이야.”

“에이, 설마요. 이런저런 소문이야 저도 듣기는 했습니다만… 아무리 연빈마마께서 변하셨다고 해도 그간 해온 것이 있는데 폐하께서 정말 마음이 바뀌셨으려고요.”

사실 이 상궁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그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연빈이 바뀌었다는 건 이미 정안궁의 궁인들을 비롯하여 연빈과 마주치는 수많은 이들이 증명을 하고 있는 일이었으니 믿는다 하더라도 그런 연빈을 향한 폐하의 마음은 또 전혀 다른 것이었다. 실제로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폐하께서 정안궁까지 납시어 연빈을 호되게 타박하신 일도 있지 않았나.

게다가 어쨌든 연빈은 연 대인을 뒤에 업고 있는 분이었으니 이번 일도 그저 연 대인의 얼굴을 보고 용서해 주셨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아니야…. 이 일은 그리 간단치가 않은 것 같네.”

하지만 정 총관은 홀로 대단한 낌새를 차린 사람처럼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무부 총관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내 감이 그리 경고를 하고 있다는 말일세.”

사실 연빈이 황제에게 더없는 무시를 당하고 있을 때에도 내무부는 정안궁을 완전히 소홀하게 대한 적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연빈의 아버지인 연 대인은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공신이었으니, 아무리 연빈이 후궁으로서 답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해도 그의 집안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황후마마께서는 내무부가 멋대로 황제의 총애를 가늠하여 궁마다 대놓고 차별을 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기에 지금까지도 내무부는 정안궁에 할 만큼은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 총관은 이제 그저 ‘할 만큼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을 받았다.

“자네도 내 말을 잘 듣는 것이 좋을 게야. 내명부의 분위기를 나보다 더 잘 파악하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나?”

“그거야 그렇지요….”

“그러니 연빈마마의 의복을 서둘러 준비하여 보내주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 상궁은 여전히 단호한 얼굴로 그리 말하고 돌아가는 정 총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뒤로 돌아서선 입을 열었다.

“연빈마마의 의복은 얼마나 되었느냐!”

그의 말대로 이 황궁에서 내명부의 분위기를 정 총관보다 잘 파악하는 이는 없을 테니 그의 말을 들어 나쁠 일은 없을 터였다.


“입술이 너무 붉지 않아?”

아까부터 연신 뭔가가 불편한 표정으로 면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화운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백색의 옥관으로 올린 머리에 작은 꽃장식을 달고 있던 아진이 금세 표정을 샐쭉거리며 대답한다.

“마마. 옷 색도 이리 수수하시고, 머리 장식도 얼마 하지도 않으시는데 입술 색이라도 화사하게 하셔야지요. 폐하께서 마마의 안색을 걱정하시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붉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마마께서 자꾸 신경을 쓰시니까 붉게 보이는 것이지 다른 분들과 비교하면 이것도 오히려 옅은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마마. 지금 아주 아름다우셔요.”

마침내 제가 원하는 대로 장식을 마친 아진은 한 걸음 물러서 주인의 자태를 점검하며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백색에 가까운 옅은 푸른 기가 도는 의복에 백옥관으로 머리를 올리고 허리에는 영롱한 구슬을 꿴 단정한 장식을 드리우니 깊은 산중의 호수에서 만나는 신선이 있다면 딱 제 주인 같은 모습일 게 분명했다.

이리 변하기 전의 연빈은 꾸밈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황제의 앞에서 보이는 표정마저도 과히 색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물론 그때라고 그가 아름답지 않았던 건 아니었으나 지금의 주인은 매사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내리감는 눈매마저도 고아하여 그 분위기가 남달랐다. 요즘 들어 대단한 미색을 갖춘 공자와 같은 연빈의 모습에 남몰래 가슴앓이를 하는 궁녀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풍문마저 돌 정도라 아진은 지금 제 주인의 모습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그저 깨끗하고 단정하기만 하면 되었지 무얼 이렇게까지….”

“마마, 무슨 말씀을 그리 하셔요. 다른 곳도 아니고 폐하를 뵈러 가시는 거잖아요. 당연히 특별히 신경 쓰셔야지요.”

아진은 제가 다 들뜬 목소리로 말을 하였으나 폐하를 뵈러 가는 길, 이라는 말에 화운은 또다시 긴장한 얼굴을 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