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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49)화 (49/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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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하였지 뭐야.”

“누가 아니래. 예전의 연빈마마였으면 벌써 뺨을 맞고 신형사로 끌려갔을걸? 너는 제발 덜렁대는 그 성격 좀 고쳐, 좀! 그러다 정말 경을 칠라!”

미동도 없이 서서 궁의 안쪽으로 향하는 문을 지키고 있던 서천이 저만치 걸어오는 두 명의 궁녀들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손을 다친 건지 피가 묻은 손수건으로 손을 돌돌 감은 채 걸어오던 궁녀가 동료의 타박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알았어, 알았어. 이제 정말 조심할 거야. 근데 연빈마마께서 정말 이대로 나를 용서하시려는 걸까? 설마 나중에 불러서 더 호되게 혼을 내시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러진 않을 거야. 내가 정안궁 아이들에게 들었는데 마마께서 지난번 물에 빠졌다가 살아나신 이후로 한 번도 매질을 한 적이 없으시대. 진짜로.”

아마 예전이었다면 이런 말을 들어도 절대로 믿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마 연빈이 무슨 목적이 있어 그리 헛소문을 퍼트리라 또 정안궁 아이들을 쥐 잡듯이 잡았겠거니 생각했을 터다. 하지만 궁녀는 제가 들은 그 말을 의심하는 대신 저의 손에 감겨 있는 곱기가 그지없는 손수건을 바라본다.

그건 연빈마마께서 손수 저의 손에 직접 둘러 주신 마마의 손수건이었다. 조금 전 태의원에서 얻은 약재를 담은 그릇을 들고 가다가 문을 돌아 나오는 연빈과 부딪힐 뻔하여 놀라 그릇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 탓에 깨진 유리조각들이 마마의 발치에 튀고 난리도 아니었다.

제 앞에 선 이가 연빈마마인 것을 깨닫자마자 자신은 당장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이 들어 겁을 집어먹은 궁녀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거듭 외치며 황급히 엎드려 우선 연빈의 발 앞에 있는 유리조각들을 정신없이 줍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손바닥을 베어내는 게 느껴졌지만 궁녀는 그런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겁을 집어먹었다. 그런 궁녀를 일으켜 손수 상처를 봐준 건 당장 자신에게 벌을 내릴 거라 여겼던 연빈마마였다.

연빈은 궁녀의 손에서 난 피에 저의 손과 옷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상처를 살피더니 귀한 자신의 손수건으로 감싸 지혈을 해 주며 위험한 유리조각을 어찌 그리 조심성 없이 만지느냐 성을 내기까지 하였다. 잔뜩 찌푸려진 인상은 꼭 궁녀의 상처를 진심으로 속상해하고 있는 것 같아 앞에 선 두 궁녀는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연빈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을 정도이다.

그러니 이전에는 들어도 믿을 수 없던 그 말을 이제 와 그들은 믿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연빈마마께서 얼굴도 완전히 달라지신 거 같아. 그렇지 않아?”

“너도 느꼈어? 내 말이 그 말이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뭔가… 생김새는 그대로인데 이상하게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마주하는 것처럼….”

“잠시 말을 묻겠습니다, 낭자.”

순간 저도 모르게 무언가 홀린 듯 연빈의 미려한 용모를 떠올리고 있던 궁녀들이 갑자기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가 말을 건 상대를 확인하곤 얼굴을 붉혔다.

“서천 시위…?”

“서천 시위가 어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소를 머금는 얼굴들엔 감출 수 없는 설렘이 가득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천 시위라 하면 수많은 시위들 가운데서도 단연코 눈에 띄는 군계일학의 미남자였다. 비록 출신은 한미하지만 어느 귀족 집안의 자제들보다도 더 수려한 외형 탓에 그에게 말 한 번 붙이고 싶어 눈치를 보는 궁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묵묵하고 진중하여 더더욱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면이 있었는데, 그런 서천이 먼저 말을 걸어 주다니 두 궁녀는 이것이 실로 꿈은 아닐까 싶어질 지경이었다.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천이 말을 이었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나 방금 앞을 지나가시면서 나누신 대화를 우연치 않게 듣게 되었는데, 그 손수건이 연빈마마께서 주신 손수건이라는 게 사실입니까?”

“예? 아, 네네. 제가 실수로 손을 다치자 마마께서 손수 이리 감아 주셨어요.”

“그렇군요…. 별것 아닌 물음에도 답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생각 같아선 몇 시진이고 이곳에서 서천과 한담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이미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게다가 궁에 가지고 갈 약재까지 상하게 했으니 돌아가 수습을 하고 혼날 일을 생각만 해도 깜깜했다. 아쉬운 마음을 갈무리한 궁녀들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자 서천의 표정이 깊이 가라앉는다.

맞은편을 지키고 있던 동료가 그제야 서천을 향해 말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은 거야?”

생전 남의 일에는 관심도 없던 이가 갑자기 궁녀들에게까지 먼저 말을 걸어 별것도 아닌 걸 물으니 궁금증이 든 것이다. 하지만 서천은 그의 물음에도 그저 고개를 저으며 ‘아니야.’ 하고 짧은 대답만을 남긴 채 궁녀들이 이미 지나간 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연빈이 얼마나 악독하고 고약한 사람인지는 서천 역시 황궁에 들어온 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야기였다. 그가 아랫사람들에게 벌을 내리고 매질을 한 이유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에 생각지도 못한 이유들이 수도 없이 많았으니 연빈의 앞에서 그릇을 깼다가 혼쭐이 난 이들 또한 적잖았을 것이다.

그런 연빈이 자신의 앞에서 그런 실수를 한 궁녀를 용서해 준 것도 모자라 귀한 저의 손수건까지 둘러 손수 상처를 지혈해 주었다니 직접 듣지 않았다면 믿지 못하였을 말이다.

죽을 뻔한 일을 겪고 난 뒤 연빈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는 이미 서천도 여러 번 들은 바가 있었으나 그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치며 믿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믿든 믿지 않든, 황궁 내에서의 연빈의 평판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인 것처럼 보였다.

서천이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다정한 이의 얼굴이 순간 서천의 눈동자 위로 스쳐 지나갔다. 하운은 관사에서 함께 지내는 이들 중 그 누구의 작은 상처라도 쉬이 지나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운은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가족도 없이 홀로 지내와 말이 없고 무감한 성격이라 스스로를 아쉬워했으나 서천이 곁에서 지켜본 하운은 그 누구보다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 순간 연빈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현듯 하운의 어느 날들이 겹쳐서 떠오르는 건 다만 하운의 죽음이 그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까.

해소할 길이 없는 감정의 무게를 끌어안은 서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위 총관은 제가 들고 있는 패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서간만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반응에 마른침을 삼켰다. 황제가 후궁들의 처소를 찾지 않은 지도 벌써 한참이다. 원래도 요즘처럼 신경 쓸 일이 많거나, 혹은 별다른 이유가 없이도 오랫동안 시침을 받지 않는 일이 잦은 황제였으니 딱히 이상할 게 없는 일이긴 하였으나 경사방의 총관으로서 황제가 너무 오랫동안 후궁들의 처소를 찾지 않는 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총관의 마음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황제는 손을 한 번 휘휘 젓는 것으로 후궁의 패를 모두 물려버렸다. 위 총관은 순간 시선을 들어 오 태감에게 살짝 눈짓을 해 도움을 청하였으나 보통 때라면 곁에서 한 마디 거들어 황제를 황후궁으로라도 모셨을 오 태감이 오늘은 웬일인지 고개를 살짝 저으며 총관의 시선을 거절한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결국 비빌 언덕을 모두 잃고만 위 총관이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인사를 올리고 천천히 뒷걸음질 쳐 나오려는데 갑자기 황제가 고개를 들어 총관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잠깐.”

“예, 폐하!”

위 총관은 혹시 이제라도 폐하께서 패를 뒤집으시려는 걸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하지만 총관을 그리 불러놓고도 황제는 잠시 말이 없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이제부턴… 연빈의 패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아라.”

“예…… 예?”

황제의 말에 습관적으로 허리를 굽히며 대답을 했던 위 총관이 뒤늦게 황제의 명령을 제대로 파악하곤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안 그래도 제가 말을 해놓고도 영 민망하여 보지 않아도 되는 눈치를 보고 있던 황제, 이한은 눈치도 없는 위 총관이 그걸 또 되묻고 있자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어서 돌아가시게.”

“아… 아, 예! 예, 알겠습니다, 폐하!”

오 태감이 눈치를 주고 나서야 위 총관은 제가 방금 더없이 멍청하게 굴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허리를 굽히곤 황급히 멈추었던 걸음을 움직여 대전을 빠져나왔다. 황제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와 길게 숨을 한 번 내쉰 위 총관이 이내 고개를 돌려 폐하께서 계시는 안쪽을 바라본다.

“연빈마마의 패를 곧 쓰게 될 거라더니….”

지난번 오 태감의 충고를 들었을 때만 해도 쉽게 믿기지가 않아 아무리 오 태감이라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잘못 짚은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아 오늘 이렇게 황제의 명을 듣고 나니 위 총관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일이 어찌 흘러가려고 이리 되는가….”

이러다 설마하니 다음번에는 폐하께서 정말로 연빈의 패를 뒤집는 건 아닌가 싶어 괜히 등골이 오싹해진 위 총관은 어깨를 한 번 살짝 떨고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황궁의 일은 정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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