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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저만치 오늘도 가마 없이 걸어가고 있는 화운을 보고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 전에 몸에 탈까지 나서 고생을 한 사람이 왜 또 이 길을 제 발로 걷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알 바가 아니지.”
하지만 오늘 이한은 아주 무심하고 태연하게 연화운을 지나치기로 그렇게 결심을 했으므로. 연화운이 두 발로 걷든 말든, 걸어서 지치든 말든, 그래서 아프든 말든 오늘 이한은 정말로 조금도 하나도 신경 쓰지 않기로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이한은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는 눈동자를 애써 가운데로 되돌리며 가마의 등받이에 똑바로 등을 기댔다.
오늘따라 유독 위아래로 넓게 맨 허리끈 탓에 잘록한 허리가 보였다. 이한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자칫 잘못 입으면 더없이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보라색이 뒤에서만 보아도 어쩜 그리 잘 어울리는지. 이한은 다시 또 정면을 바라본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밌게 나누는지 옆에 함께 걷고 있는 아진이 무어라 말을 하자 고개를 돌려 아진을 바라본 채로 화운이 얼굴 가득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한은 다시 또 황급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가까워지는 가마의 기척을 느낀 화운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황제를 발견하곤 길의 한쪽으로 물러나 무릎을 굽히고 인사를 올렸다. 이한의 입술이 순간 움찔거렸다.
멈추고 내려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몸은 좀 나아졌느냐. 그리 아팠으면서 왜 가마를 타지 않고 걷고 있느냐. 그러다가 또 아프다고 드러누워서 나를 신경 쓰이게 할 요량이냐. 온갖 하찮고도 유치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폭죽 터지듯 펑펑 터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럴수록 이한은 입을 더 꾹 다물었다. 천천히 가마가 화운을 지나쳐 가기 시작하자 왠지 모르게 온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고 목 안쪽에서 끙끙 답답한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도 같았으나 황제가 되어서 이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이대로 적응하기만 하면 된다. 과거 연화운의 모습을 끌어내기 위해 괜한 시비를 붙이는 것 또한 사실은 연화운의 손바닥에 놀아나는 일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냥 지금처럼 담담하게 보고, 인정하고, 지나치면 된다. 그러면 이전처럼 온종일 연화운의 생각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어버리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이제 와 이한이 바라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멈추라는 말도 하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사히 연화운을 완전히 지나친 이한이 입을 열었다.
“오진성.”
“예, 폐하.”
“티가 나지 않게 지금 몰래 연화운을 살펴봐라.”
갑작스러운 이한의 명에 오 태감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도 제가 받은 명령대로 슬쩍 고개를 돌려 이미 저만치 지나쳐버린 화운을 바라보았다. 태감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자 가마 위에서 오 태감 쪽으로 몸을 슬그머니 기울인 이한이 속삭이듯 말했다.
“연빈의 표정이 어떠냐?”
“연빈마마의 표정을 말씀하십니까….”
“그래. 내가 저한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치니 당황한 얼굴이지?”
어딘지 모르게 살짝 들뜬 것처럼 들리기까지 하는 이한의 목소리에 오 태감이 그제야 아, 하고 깨달음을 얻은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아주 난처한 상황이 된 것 같았다. 이한이 다시 물었다.
“아주 당황스러울 거야. 자기 생각으로는 내가 내려서 또 무어라 타박을 하고 그래야 하는데 본체만체하고 지나가니 무언가 잘못된 것 같겠지.”
오 태감의 입술이 움찔거린다. 돌아본 오 태감이 본 연빈은 그저 담담하게 어가가 완전히 자신을 지나치기를 기다리다가 단정한 몸짓으로 몸을 일으킨 것 외에 다른 감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나긴 황궁 생활로 얼굴이 두꺼워지기론 따를 사람이 없을 오 태감이라도 지금의 황제에게 그리 말을 고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앞으로는 결코 연빈이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그러더니 이한은 이제 아예 오 태감의 대답은 중요하지도 않은 것처럼 홀로 결론을 내곤 뿌듯한 얼굴로 다시 앞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게 뭐라고. 연빈을 한 번 그냥 지나친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었다고.
오 태감이 올려다본 황제의 얼굴은 아주 대단한 상을 받은 아이와도 같이 뿌듯해 보여, 차마 연빈은 폐하께서 지나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 같다는 말은 솔직히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폐하께서 그냥 지나가시네요.”
한쪽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린 화운을 부축해 일으키며 아진이 다소 아쉬움이 어린 얼굴로 말했다. 화운은 저만치 멀어지는 어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진을 돌아보며 가볍게 미소 짓고는 말했다.
“폐하께서는 바쁘신 분이시잖아. 따로 이르실 말씀이 없으시면 굳이 머무르실 필요가 없지.”
“그건 그렇지만요….”
아진도 화운의 말이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의 황제 폐하는 제 주인을 그냥 지나친 일이 거의 없었으니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곧 제가 고작 이런 일로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폐하와 마마의 사이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어 이내 다시 기분이 좋아진 아진이 화운의 팔을 잡아 가볍게 부축하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마마. 힘들진 않으세요?”
“응. 괜찮아. 오히려 걸으니 몸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고 좋구나.”
“그래도 혹시나 중간에라도 힘드시거나 하시면 무리하지 마시고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아셨죠?”
“그래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그만 걱정하렴.”
화운의 입장에서는 이렇게라도 조금씩 걷는 것이 제 몸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선택한 일인데 오랫동안 약한 연빈의 몸을 돌보아왔던 아진으로서는 여전히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계절은 하루가 다르게 흘러가 이제 한낮의 태양은 제법 살갗을 달아오르게 만들 정도로 강해졌지만 정오가 되기 전까지는 적당히 따스해서 걷기에 아주 좋은 날이었다. 언제나 남들보다 서늘한 체온을 가지고 있는 화운은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따사로운 햇살에 기분이 좋아져 입가에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정안궁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아진이 아주 미묘한 주변의 기류를 읽은 건 그 순간이었다. 화운의 안색이 더 나빠지지는 않는 것 같아 아진은 이제야 조금 마음을 놓으며 주위를 살필 수 있었는데 그러자 화운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처음엔 그 이질감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건 아마도 아진 역시 여태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종류의 분위기라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진은 이내,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낯선 시선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나가다 화운을 발견하고 인사를 하고 물러가는 궁인들의 얼굴에. 힐끔거리는 시선들에.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지나가는, 전부 다 들리지 않는 말소리들에.
그 모든 것들에 화운을 향한 전과는 다른 감정들이 있다. 화운이 지나가는 이들의 인사를 부드럽게 받아 줄 때마다. 스스로는 미처 자각하지도 못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들을 바라볼 때마다 아진은 그들의 얼굴에 어리는 당황스러움과 미미한 설렘 같은 것들을 읽었다.
이전에는 높은 가마를 타고 다니니 정안궁 궁인들이 아닌 다른 이들은 연빈을 마주치면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올리며 몸을 사리기 바빴다. 완전히 달라졌다던 소문의 연빈마마를 눈앞에서 보고 대할 일이 거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리 같은 눈높이에서 화운이 걸어가니 그들도 그간 무서워 피하고만 싶었던 연빈의 달라진 모습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부러 그러려 한 것도 아닌데 아진의 허리가 절로 꼿꼿하게 펴졌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참을 수 없는 통쾌함에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인다. 제 주인이 한 번 저를 보고 미소를 지을 때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감히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연빈의 얼굴에 넋을 놓았다.
연빈마마께서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아.
에이, 설마. 그분 성질이 그렇게 쉽게 바뀔 성질이야, 어디?
아니, 글쎄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늘 내가 연빈마마를 마주 뵈었거든? 인사를 올리는 내게 부드럽게 웃어 주시며 인사를 받아 주시는데 완전 눈이 부신 미공자가 따로 없더라니까?
나도 지난번에 연빈마마를 뵈었어. 그동안은 늘 야차 같은 표정만 짓고 다니시니 실감할 일이 없었는데 어찌나 곱고 아름다우시던지.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려 아주 혼났지 뭐야.
아진은 벌써부터 저마다 모여서 그리 속살거릴 이들의 목소리를 전부 다 들은 것만 같았다.
“아진. 왜 갑자기 그렇게 웃어?”
결국 참을 수 없는 뿌듯함이 얼굴에 전부 다 드러나 버리고 말았는지 아진은 의아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며 묻는 주인의 사랑스러운, 제가 마마께 그런 표현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나 정말로 사랑스럽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그런 주인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냥… 좋아서요.”
화운을 모시고 살았던 그 긴긴 삶 동안 늘 좋은 주인을 만난 다른 이들을 부러워하기만 하였는데. 머지않아 이 황궁에서 남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궁녀가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어 아진은 화운과 함께 정안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