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47)화 (47/167)

47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냉궁 소리를 듣던 정안궁에도 지금의 계절처럼 따뜻한 봄날이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서서의 말대로 무엇이든 더 열심히 하고, 더 마마를 잘 모셔야지, 그런 다짐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채워가고 있을 때쯤.

“일은 안 하고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야?”

그때까지 흐뭇하게 웃는 얼굴로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아진이 모르는 척 주방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뒤를 돌아본 서서가 아진을 발견하곤 환하게 웃으며 쪼르르 다가왔다.

“아진 언니! 여긴 왜 오셨어요? 마마께서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마마께서 필요한 것, 이라는 말에 과도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들을 바라보며 간신히 웃음을 참은 아진이 짐짓 모른 척을 하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마마께선 지금 황후마마께 문후를 드리러 가시니까 다녀오시면 바로 약을 드실 수 있도록 준비 잘 해놓으라고.”

“아아! 네, 물론이죠! 너무 뜨겁지도, 아주 식지도 않은 약을 바로 드릴 수 있도록 저희가 잘 준비해 놓을게요!”

가장 앞에 선 서서가 말하자 뒤에서 저마다 ‘걱정 마세요, 언니!’ 하고 말을 거드는 아이들이 보였다. 어쩐지 지나치게 의욕에 가득 차 있는 것 같기는 하였으나 아이들이 마마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건 결코 나쁜 변화는 아니었으니.

돌아서서 주방을 나오는 아진의 얼굴에도 결국엔 함박웃음이 걸린 아침의 일이었다.


“무리해서 문후를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거늘….”

황후가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 앉는 비빈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연빈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은은하게 보라색의 물을 들인 옷자락에 짙은 색의 허리끈을 넓게 두른 화운은 여전히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으나 옷 때문인지 보통의 후궁들보다는 훨씬 활동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화운은 이내 앉은 채로 황후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황후마마. 염려해 주신 덕분에 이제는 정말 괜찮아졌습니다. 정안궁까지 오셔서 살펴 주신 황후마마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그것이야 본궁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동안 네게 무심한 면이 있었지.”

황제가 그러했듯 황후 역시 지난날 동안에는 연빈이 아파 드러누웠다는 소식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황후의 그 말에 ‘당치 않으십니다, 마마.’ 하는 말로 대답을 한 화운이 이번에는 고개를 살짝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숙비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연다.

“숙비마마께오서 보내주신 향 덕분에 깊이 잘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숙비마마가요? 향을 보내셨다구요?”

허나 화운의 인사에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옆에 앉아서 화운을 힐끔거리며 바라보고 있던 정빈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거의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들썩이던 정빈이 황급히 입을 다물곤 몸을 웅크렸지만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숙비와 연빈을 번갈아 바라보는 것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다.

저한테는 설마 연빈을 걱정하는 거냐고 그리 묻더니 뒤로는 말도 없이 향을 보내 연빈을 위로하다니!

물론 숙비가 딱히 자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 말을 한 건 아니었으나 정빈은 어쩐지 미묘한 배신감이 들어 자꾸만 입술이 튀어나왔다.

“그게 뭐 별거라고. 그리 고마워할 것 없네.”

마주치기만 하면 서로 죽일 듯이 굴 때는 언제고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연빈에게 대답을 하는 숙비를 보자니 왠지 모르게 더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정빈은 급기야 고개를 돌려 제 뒤쪽에 있는 주아를 노려보았다.

그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나는 정안궁으로 직접 가 친히 연빈을 위로해 주었을 텐데.

아무래도 앞으로는 주아 말을 듣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정빈이었다.


“잘 들어라.”

조회를 마치고 나와 가마에 오르던 걸음을 잠시 멈춘 황제가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 태감이 급히 허리를 굽혀 말씀을 받잡자니 이한이 말을 잇는다.

“오늘도 만약 돌아가다가 연빈을 발견하게 된다면….”

황제는 오늘도 가장 빠른 길이 아닌 길로 돌아가길 명했다. 가마꾼들이야 폐하께서 왜 자꾸 그런 명을 내리는지 의아하여도 감히 물을 수가 없으니 묵묵히 따를 뿐이고 오로지 그 연유를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는 오 태감만이 표정을 감추고 황제의 말을 듣고 있었다.

“혹시나 내가 실수로 마음에도 없이 멈추라고 말을 하더라도 연빈이 있는 곳에서는 절대 멈추지 말고 그냥 지나가도록 해라.”

실로 바보 같은 명이 아닐 수 없다. 이한도 그걸 알았다. 물론 이한은 자신이 그토록 멍청하게 다시 연빈의 앞에서 가마를 세우라고 명령을 내리는 그런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최근에 연빈에 관한 일에서만큼은 벌써 몇 번이나 스스로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어 벌인 일들이 꽤 되었기 때문에 이한은 미리 방어책을 세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내 말 알겠나? 내가 지난번처럼 갑자기 멈추라고 해도 멈추지 말고 안정전까지 곧장 돌아갈 것이다. 명심하도록.”

“예,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애초에 연빈이 돌아갈 길을 피하면 되는 것을.

그러나 오 태감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충직한 사람이었으므로 폐하께서 굳이 모른 척을 하는 일을 다시 고하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연빈!”

문후를 마치고 나와 막 돌아가려는 연빈의 걸음을 붙잡은 건 정빈이었다. 걸음을 멈추어 서서 고개를 돌리자 거의 뛰듯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정빈의 모습이 보였다. 제 앞까지 다가오는 그를 가만히 기다리다가, 이내 화운이 입을 열었다.

“천천히 다니세요. 그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진심이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걱정을 담아오는 연빈의 목소리에 정빈, 송현이 순간 하려던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문다. 어릴 때 종종걸음으로 오라버니를 따라 가겠다며 서둘러 뛰다가 넘어지면 울음이 터진 자신을 품에 안고 다정하게 달래주던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연빈의 목소리 위로 또다시 아른거린 탓이다.

송현의 오라버니는 타고나기를 다정하게 태어난 사람처럼 송현뿐만이 아니라 집안의 하인들에게도 결코 막 대하는 일이 없던 좋은 분이었다. 헌데 어찌하여 한때 태어날 때부터 악독하게 태어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던 연빈에게서 제 오라비와 같은 느낌을 받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네, 그럴게요….”

허나 이해를 할 수 없어도 사람의 감정은 물길과도 같아 한번 어느 방향으로 트여 흐르기 시작하면 도무지 막거나 되돌리기가 힘이 드는 법.

“헌데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그게… 그게 사실은… 사실은 저도 병문안을 가려고 했거든요…!”

뒤에서 한껏 눈치를 주는 주아의 시선을 꿋꿋하게 무시하고 정빈이 문후를 드리는 내내 연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굳이 변명할 일도 아닌데. 두 사람이 이전에 어떤 사이로 지내왔는지를 생각하면 사실 송현이 병문안을 가지 않은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송현은 자꾸만 병문안을 가지 못한 자신을 변명하고 싶어 내도록 애가 탔다.

“병문안도 가고… 몸에 좋다는 차도 보내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그래서 말을 꺼내기는 했는데 막상 말을 시작하고 보니 생각만 하고 왜 행동하지 못했는지 마땅히 댈 이유가 없었다. 곧이곧대로 네가 또 무슨 꼬투리를 잡아 나를 괴롭힐지 몰라 가지 못했다, 그리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결국에 제 주인 하는 양을 보다 못한 주아가 한 걸음 나서서 연빈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소인이 대신 전하옵니다, 연빈마마. 저희 마마께오선 연빈마마의 소식을 듣고 몹시 걱정을 하시여 병문안을 가고 싶어 하셨는데 괜히 갑작스럽게 찾아갔다가 연빈마마를 더 귀찮고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에 미처 가지 못하셨습니다.”

“맞아요! 그래서 못 간 거예요! 차를 보내도 혹시나 연빈이 불편하게 생각할까 봐….”

주아의 말에 서둘러 맞장구를 친 송현은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연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송현의 눈에, 잠시 의아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어내며 가벼운 미소를 짓는 연빈의 모습이 생생하게 들어왔다. 이윽고 연빈, 연화운이 말했다.

“그러셨습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이미 정빈의 마음을 받았으니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 귀여운 어린 누이를 달래듯 다정하고 다감한 그런 목소리였다. 그래서 결국엔 참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송현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면 다음에… 정안궁으로 놀러가도 되나요…?”

곁에서 주아가 말없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지금 송현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눈앞에 있는 연빈이 반응뿐이었고, 잠시 놀란 얼굴로 송현을 바라보던 화운은 이내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정안궁에서 정빈을 뵈면 더 반갑겠군요.”

대답을 들은 송현의 얼굴에 그제야 환한 미소가 어렸다. 나중에 주아에게 들을 잔소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기분이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