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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얼른 자라서… 더 똑똑하고 강한 사람들이 되어서 앞으로 마마를 지켜드릴 것이에요….”
하여 진심이 가득 담긴 어린 궁녀의 말을 들으며 화운은 생각하는 것이다. 황제 폐하께오서 돌아가지 말고 머물러 있어도 좋다고 하였고, 매일을 지옥에서 보내듯 고통스러워하던 아이들은 다시금 웃음을 되찾고 있으니 비록 거짓을 두르고 있는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아직은 괜찮은 것이라고. 끝없는 죄책감과 싸우는 밤을 견디며 조금 더 나은 길로 걸어갈 이유가 충분한 것이라고.
화운은 마찬가지로 감격스러운 얼굴을 한 아진과 서서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를 잃고 고아로 고단한 삶을 전전하였을 때에도 묵묵히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생을 걸어왔듯 지금도, 앞으로도, 화운은 그저 제게 주어진 삶을 걸어갈 것이다.
“요즘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모양이군.”
숙비, 비영과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던 황후가 피로가 가득 묻어나는 비영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황후의 말에 대번 한숨을 푸욱 내쉰 비영이 대답했다.
“요즘 폐하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연빈을 찾고 계시니 잠이 올 리가요.”
“천하의 현비영이 투기를 다 하고?”
놀리듯 이어진 황후, 자란의 말에 비영이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일개 후궁이 감히 황후마마께 보일 태도는 아니었으나 그것은 자란이 이미 오래 전에 비영에게 관대하게 허락한 태도였으니 문제될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황후를 향해 더없이 깍듯한 태도를 취했던 숙비였으니 가능한 일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쩌면 그들이 황제와 나눈 것들보다도 더 많은 일과 감정들이 있었다.
“마마. 제가 설마하니 연빈을 투기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허면…?”
“…연빈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불안하여 그런 것이지요….”
그사이 입 한번 대지 않고 그대로 식어버린 비영의 차를 슬쩍 건너본 자란이 눈짓을 하자 선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차가 식었으니 새로 대령하겠습니다.’ 하고 비영의 찻잔을 거두어 갔다. 허나 애초에 차에는 관심도 없던 비영은 자란에게 말을 이었다.
“마마… 연빈이 그동안 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면서도 어쩌지 못했던 건 폐하께서 너무나도 확고하게 저에게 무게를 실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으음….”
“연빈이 정말로 지난날을 반성하여 변한 것이라면 상관이 없겠으나 만에 하나 거짓으로 꾸민 것이라면… 속에 칼을 숨기고 벼르며 겉모습을 꾸며 폐하의 총애를 얻어내기라도 한다면….”
물론 비영은 그들의 황제가 어느 후궁의 속살거림에 속아 다른 비빈들을 해치게 두지 않으실 분이라는 걸 믿었다. 설령 이제 와 연빈이 황제에게 총애를 얻게 된들 그 힘을 믿고 자신을 어찌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어디 예상한 그대로 흘러가라는 법이 있던가.
황제 폐하께서 누군가를 총애하면 어찌 변하시는 분인지 그들은 몰랐다.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라는 명칭을 듣고 있으면서도 비영은 제가 받고 있는 것이 진정으로 대단한 총애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실로 현황제가 누군가에게 깊이 빠지면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니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만에 하나 황제께서 정말로 연빈을 총애하게 되신다면 그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쉬이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하여 연빈이 달라진 이후, 그리고 그 달라진 행동이 황제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명백하게 보이게 된 날 이후 비영의 밤은 내도록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영.”
그때, 황후가 나지마한 목소리로 비영의 이름을 불렀다. 불안함에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비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황후에게 가 닿았다.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자란의 눈동자가 비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비영이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황후를 바라보고만 있으려니 느긋하게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황후가 말을 이었다.
“자네는 황후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예?”
“설마하니 내가 연빈에게서 자네 하나를 지키지 못하려고.”
황후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바람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비영은 거기에 앉아서, 바로 지난밤에도 폐하께서 아픈 연빈의 처소를 찾으셨다는 얘기에 이런저런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자네가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헛된 생각에 잘못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폐하의 숙비인 자네를 감히 누가 건드릴 수 있겠나.”
비영은 그 순간 자신이 처음 입궁하였을 때 보았던 황후의 모습을 떠올렸다. 작은 체구에 온화한 표정을 하고서도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을 가지고 있던 그날의 어린 황후는 어느덧 온 비빈들의 머리 위를 거대하게 감싸고 있는 거목 같은 존재가 되어 있다.
“그러하옵니다, 황후마마. 제가 경솔한 생각을 하였어요. 황후마마께서 깨우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지난 새벽, 저도 모르게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잠시 하였던 비영은 황후의 한 마디 말 앞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네와 내가 다만 폐하의 여인이 아니라 충신 같은 사람으로 서로를 도와 이전에는 없던, 서로를 아끼고 나라를 위하며 골육상잔의 일이 벌어지지 않는 그런 내명부를 만들어 보자 말하던 어린 황후의 모습이 떠올라서. 비영은 차마 다른 마음을 먹을 수가 없었다.
“저기, 마마….”
계속 아픈 안색을 하고 있으면 괜한 걱정만 더 살 것 같아 아진의 도움을 받아 간단한 치장을 마친 화운이 경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머리를 빗으며 정리를 해 주고 있던 아진이 갑자기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화운을 불렀다. ‘응?’ 하고 마찬가지로 가볍게 대답한 화운에게 아진은 여전히 어딘가 조금 망설이는 듯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그… 저기….”
“무슨 말이기에 그렇게 망설여?”
“그… 폐하께서 어제 친히 찾아와 주셨는데… 감사의 뜻으로 폐하께 간식이라도 보내시면 어떨까 해서요….”
아진의 말을 들은 화운이 아, 하고 짧은 소리를 흘린다. 그건 화운 역시 오늘 아침부터 고민하고 있던 문제이기도 했다.
그저 몸이 약해 조금 앓았던 것뿐인데 그런 화운을 위해 두 번이나 정안궁에 다녀가셨던 폐하가 아니신가. 거기다 황후마마 역시 다녀가셨다고 하니 지금은 태의가 아직 바깥바람을 쐬지 말라 하여 정안궁에 머물러 있지만 몸이 나가도 괜찮을 만큼 회복하게 되면 감사 인사를 올리러 가야 함이 마땅했다.
황후궁의 경우는 크게 고민할 것이 없었다. 그저 문후를 드릴 때 그러했던 것처럼 가서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황제는 달랐다. 화운은 이것이 제가 폐하의 허락 없이 그분을 찾아가도 되는 명분이 되는 일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정안궁에 친히 납시어 준 황제의 성은을 무시할 수도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차 아진이 이러한 말을 해 준 것이다.
“아직 밖에 나가실 순 없으니 직접 인사를 올리진 못하여도 폐하께서 계신 곳으로 정성스러운 간식을 전해드린다면 폐하께오서도 마마의 마음을 알아주시지 않을까요?”
“그래도 될까…?”
“그럼요, 마마. 아마 분명히 좋아하실 거예요!”
화운이 바로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고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니 더욱 신난 얼굴을 한 아진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운은 미처 보지 못하였던 황제의 번민을 마주한 적이 있는 아진에게는 분명 폐하께서도 이 일을 반기실 거란 확신이 있었다.
아마 며칠 전이었다면 화운은 아진의 제안을 단박에 잘랐을 것이다. 지난번 아진이 같은 의견을 내었을 때처럼 말이다. 내 얼굴도 마주하기 싫어하시는 분이니 괜히 눈치도 없이 간식을 보내 기분을 상하게 만들 일이 무어냐고, 화운은 그리 말하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지금 화운은 지난밤 보았던 황제를 떠올리고 있었다. 비록 큰 의미가 있어서는 아니겠으나 아픈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찾아와 주시고,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황제로서는 영문 모를 말을 한 자신에게 그는 또 한 번 오직 화운에게 가장 의미가 있는 말로 그의 악몽을 잠재워 주었다.
그러니 별것 아닌 것이라도, 보잘것없는 간식 따위에 지나지 않다고 하더라도 화운은 폐하께 감사한 자신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나마 표현하고 싶었다.
“그럼 한 번….”
이윽고 아주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화운의 목소리에 아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더없이 느리기는 하였으나 분명히 나아가고 있으니, 그리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제가 원하는 만큼 폐하와 마마께서 다시 가까워지는 날도 오겠거니. 요즘은 밤마다 그러한 날을 꿈꾸는 아진은 바람처럼 빠르게 주방으로 달려갔다.
“역시 좀 그렇지? 너무 막 자존심이 없어 보이지?”
감히 주인에게 비유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내실을 빙글빙글 돌며 초조한 목소리로 묻는 정빈, 송현의 말에 주아가 다소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
“예, 마마. 연빈이 마마를 괴롭힌 게 얼만데 말 한 마디 잘해 주었다고 마음이 풀어지시면 어째요.”
“맞아. 그동안 내가 들은 막말이 얼만데!”
“그럼요. 정안궁에 가서 흙탕물을 뿌려도 부족하다구요.”
“그렇지, 그렇지.”